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교에서 설문을 돌렸다. "집에 혼자 있을 때 가장 하고 싶은 일은?"이라는 문항에서 의외의 응답을 본적이 있다. 정크푸드를 맘껏 먹거나 온라인게임등이 물론 나왔지만 의외의 답변이 있었다. “다리떨기”였다. 어렸을 때 다리를 떨어서 어른들에게 혼난 경험이 있다. 복 나간다며 못하게 했다. 지금은 다리를 떠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어른들에게 제지 당했기 때문에 고쳐진 건 아니다. 과한 움직임과 소리는 타인과의 교류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지가 생기면서 부터다. 각종 인간행동 연구보고서에는 집중력 향상이나 긴장완화의 효과가 있다고도 주장한다. 때로는 뭔가 기대되고 신나서 다리를 떠는 때도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 다리를 떨지 않는 건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신나는 일도 줄어들고, 호기심 자극하는 상황도 줄어든 건 아닐까 의심도 하게 된다. 그런데 다리떨기라고 답을 쓴 초등학생은 진짜 다리를 반드시(!) 꼭(!) 떨고 싶었던 걸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15세기를 가운데 두고 일어난 르네상스의 예술가 절대다수는 과학자였으며, 새로운 물질과 현상에 대한 탐닉 경향을 드러낸다. 다양한 물질의 조합과 현상의 관찰을 즐기는 "광maniac"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에 몰입하고 호기심으로 반복하는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에 문화와 문명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끝없이 시도하고, 실험하는 경험이 쌓여가는 동안 산업혁명이 다가오고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그들은 창의력으로 세계를 변화시켰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찾아가기 보다 생산된 도구와 물질을 소비하는데 익숙하다. 이때 창의력은 조합하는 능력처럼 여겨졌다.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하다 보니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능력과 기술의 전수가 아니라 가르침의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 시스템은 효율성을 기반으로 동작하다 보니, 시도나 도전이 가로막히는 경우가 생긴다. 다시 말해 대량생산 시스템의 환경에서 배움이 일어나게 되니 개인의 창의력은 한계에 부딪히고, "광maniac"이 등장하기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이때 창의력은 학습가능한 능력인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발상과 구현(또는 실현)능력이 통일되어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이른바 창의력이다. 이는 특정한 콘텐트나 커리큘럼에 의해 교육가능하다는 의견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효율이 떨어지고, 성과가 단번에 나오지 않으며,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즐거워서 흔쾌히 하는 탐닉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을 뒤흔들었다. GPS와 초소형칩셋, 무선인터넷환경과 IoT가 놀라운 속도로 대중화 되었다. 자본은 발빠르게 움직이며 판매방식과 유통망을 재편했다. 지금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의사소통하고 소비패턴의 변화를 주도한다. 이런 기술력의 기반에 결국 과학과 수학, 공학과 테크놀로지로 부터 새로운 발상과 행동이 유발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추론 가능한 요소들이다. 하지만 창의력으로 전환되는 티핑포인트를 만든 건 자발적으로 선택한 시간에 충분한 시도와 실험이 가능한 환경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교육상품을 판매하거나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서 창의력 교육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다수의 창의력 교육은 "창의력=생산성"이라는 프레임에서 훨씬 큰 생산을 위한 방법론으로 시작하는 것에 가깝다. 실제로는 자신이 속한 세계나 다양한 재료를 탐색하고, 스스로 선택한 문화적 행위자가 되었을 때 창의적인 발상과 행동으로 이어질 뿐이다. 제공한 창의력 훈련으로 창의적인 인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때 교육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장 문화적인 환경을 세팅하는 것과, 창의적 발상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서점에서 책을 펼치고 첫장을 읽는데 재밌는 사례가 하나 눈에 들어 왔다. 독창성에 대한 내용이다.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들의 업무특징을 조사했다. 여러가지 특이점으로 분류하여 근거를 찾아보는 방식. 인터넷 브라우져에서 실마리를 찾아낸 사례다. 인터넷 익스프로러와 사파리를 쓰는 사람들 보다, 파이어 폭스와 크롬을 쓰는 사람들이 꽤 높은 비율로 독창적 일처리를 해내고 만족도가 높다는 것이다. 컴퓨터를 구매 하면서 이미 설치된 브라우져에 적응하는 사람과 새로운 브라우져를 찾고 자기 방식을 찾아가는 사람의 차이에 대한 설명이다. 당연히 수동적인 것보다 능동적 대처가 독창성을 발휘한다. 하지만 읽는데 헛헛한 웃음이 함께 나왔다. 첫째는 이 책을 읽고 새로운 브라우져를 쓰면서 스스로 창의적인 행동을 했다고 착각하게 될 사람들이 떠올랐다. 둘째로 한국에선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아니면 아예 일을 할 수 없는 업무환경이 얼마나 많은가. 선택할 수 없는 봉쇄된 환경에서 독창성을 넘어서서 창의성을 강요받을 때 과연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에 대한 헛헛함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제약이 그득한 환경에서 선택과 자유로움으로 창의력을 발휘하라고 말하고 누군가에게 성과를 보고하는 일 말이다. 교육환경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창의환경이 있다면 창의력은 발생한다. 그 환경을 만드는 일은 창의력의 발생빈도를 높이는 것이지, 창의력 자체를 전달하는 것은 매우 희박한 확률일 수 밖엔 없다.

수년전 내셔널트러스트에서 선정한 12세가 되기전에 꼭 경험하길 권하는 리스트가 있었다. 나무타기, 큰 언덕에서 굴러 내리기, 야생 자연에서 야영하기, 나무 은신처나 동굴 같은 아지트 만들기, 물 수제비 뜨기, 빗속에서 뛰어다니기. 이 리스트를 보면서 반드시 꼭 해봐야 할 것이 아니더라도 위험하여 금지되거나, 그런 환경을 만나는 것은 특별한 이벤트가 되어 버린 우리사회의 아동/청소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런 경험이 결국 창의력을 만들텐데 말이다. 하물며 다리떨기를 눈치 보고 싶지 않다고 까지 말하면서 자기 선택을 외쳐야 한다면, 우리가 창의력과 창의교육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할 시점은 점점 늦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