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언젠가 썼던 글. 기고글이었는데, 다른 주제를 먼저 써달라고 해서 그냥 묵혀 두었던 드래프트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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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단숨에 권력, 제도, 경제등 근복적인 것을 바꾸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다. 60년대의 끝자락에 태어난 나는 혁명이란 말은 입밖으로 꺼내기 힘든 금기/taboo에 가까운 단어였다. 흔하면 내성이 생긴다고나 할까. 어원과 뜻이 무엇인지 보다 유머코드가 적용되면 입에 담기 힘들었던 단어와 문장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곤 한다. 한 예로 "엽기"가 그렇다. 엽기란 괴이하고 비이성적인 상황이나 환경등을 따라다니는 행동을 말한다. 그래서 공포스런 뉘앙스다. 허나 1990년대 인터넷에서 아주 사소한 일에 엽기적이라는 과장은 유머로 쓰이기 시작했다. 물론 흔치 않은 복식이나 기이한 행동과 범죄에 따라 붙은 수식어인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서서히 엽기의 강도가 낮아지고 무감각해진다. 엽기토끼나 엽기떡볶이가 생겨나고, 반어적 표현으로 쓰이거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면 엽기(적)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진짜 엽기적 행각에는 엽기라는 말을 쓰기 어려워졌다. 본래 그 어휘의 뜻이 표현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혁명이 그렇다. 금기시 되던 이유는 이데올로기와 관련 있었다지만, 혁명은 본래 근본이 뒤 흔들려 전환될 때를 지칭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수시로 혁명이고 혁신이다. 쉽게 무너진다면 이미 근본적인 것일리 없다. 지금은 혁명이나 혁신은 아무데나 가져다 붙여 놓아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한국인의 입맛에 단순당인 설탕을 쏟아부어서 인기를 끄는 장사꾼이 등장하자 요식업계는 "혁명(?)이 일어나고, 혁신(?)적인 사업가의 모델이 된다"고 써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말이다.

산업혁명. 이건 산업이 근본적으로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도구나 장치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면서 엄청난 생산량의 증가를 불러왔다. 쉴새없이 노동해도 최대생산량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다가 근본적인 변화를 주도한 대량생산이 가능케 한 혁명. 그게 산업혁명이다. 구조와 환경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말장난에 가까운 유행이 지나가곤 있지만 4차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무려 4차다. 하지만 참 근본없이 불쑥 튀어나온 말이다. 2016년 다보스포럼에서 클라우스 슈밥이 스피치에 섞어 뱉은 말이다. 생각을 다시 해보자. 단숨에 근본적인 것을 어떻게 바꾸게 되었는가. 미국의 제러미 러프킨은 2011년 3차산업혁명이란 책을 썼다. 디지털혁명에 대한 언급이 주로 이루고 있으며, 4차산업혁명이 지칭하는 거의 대부분이 겹친다. 갑분싸라고 하나? 느닷없다고 해야 하나. 클라우스 슈밥이 4차산업혁명이란 말을 꺼낸게 2016년이다. 어떤 의도가 감지되지 않는가. 이에 대해 제러미 러프킨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표현은 잘못됐다는 내용으로 긴 글을 쓰기도 했다. 최근 3차 산업혁명이 폭발적인 속도로 진행된 건 맞지만 여전히 3차 산업혁명의 시대다. 이 단어를 처음 소개한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WEF) 회장은 마케팅 목적에서 이런 단어를 썼고, 우리 모두를 혼란스럽게 했다. 한국 정부나 기업에 어떤 표현을 쓰라고 강제할 순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전히 3차산업혁명에 대한 포럼과 강연을 연다. 혁명을 마구 들먹이며 사용하면서 규제를 풀어달라고 주장하고, 이슈몰이와 더불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그들의 유명세가 자본을 긁어 모으는 사이 혁명은 무감각해진다. 5년사이 혁명이 한 시대(era)를 건너뛰어도, 유행으로 재화를 얻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태도다. 그저 누군가 이용가치가 남아 있는 어휘와 문장이 있다면 얼마든 복붙(copy&paste)하겠다는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수작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자본의 이동을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 만들어진 의도된 사건이다.

제러미 러프킨의 [3차산업혁명]은 동의할 수 있는 언어로 채워진 저서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수평적 분산자본의 시작, 재편된 노동과 시장의 가능성, 화석연료의 종말로 시작하는 새로운 에너지 등등. 여전히 그 역시 혁명일까를 의심과 검증의 시간적 여유도 없이 급하게 등장한 4차산업혁명이라니. 여전히 걸핏하면 써먹는 말이 되어버렸다. 이거야 말로 혁명이다. 근본을 뒤집어 놓았으니 말이다.

예술교육에 몇 년전부터 4차산업혁명의 망령이 돌아다니다 최근에는 좀비가 되었다. 령은 손에 잡히지 않아서 무시할 수 있었지만, 좀비는 위해를 가한다. 융합교육이 4차산업혁명의 시대를 대비한다고 떠들어대거나, 뉴미디어로 예술행위를 하면 새로운 시대를 여는 패러다임이라고 말한다. 아동과 청소년에게 기술과 과학과 예술이 공존하는 세계에 신앙심을 갖고 따르면 미래를 대비하는 것 처럼 떠드는 것 처럼 영혼없고 근본없는 표현이 또 있을까. 장르간 컨버전스가 굳이 요구되지 않는 순수예술이 있지만, 이미 융합없는 예술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매체의 속성을 종단(전수되는)하고 테크놀로지의 범용적 가능성을 횡단(수평성)한다. 한마디로 종횡무진이 딱 맞는 말이다. 누가? 아티스트가 그렇다. 단지 새로운 공산품을 조립하면서 뉴미디어 아트라 우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가운데에서도 이미 수 많은 아티스트는 테크놀로지와 지식과 정보를 순환시켜가며 자연스럽고 적극적으로 크로스오버를 실행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회로도 읽고, 코딩하고, 센서와 와이어리스 컨트롤러를 보면 "앗!@@ 4차산업혁명 시대의 융합교육이다"라고 외치는 이유가 무엇인가.

혹시 신상품을 좋아하고, 낯선 단어를 말하면 섹시하다고 착각하고, 인싸 흉내를 내고 싶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자. 근본없는 어휘를 주워들고 힙스터가 되었다는 착각은 버릴 때가 이미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