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소통은 타인의 생각이나 실천에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표현의 이유와 닮은 듯 차이가 있는 것도 변화를 요구하는 화자의 실천행위라는 측면이다. 의사표현은 욕구 또는 욕망을 담아내기 바쁜데 비해 소통은 타자와 교류하는 것을 말한다. 타인에게 단지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인간은 미디어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천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이해받기 위해 미디어가 진화했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 의사소통을 혁신적으로 전환시킨 몇 가지 (발견 또는 발명으로 습득하고 체화한)미디어를 나열해 본다면 몸-소리-음성언어-문자-인쇄-전파와 통신기술-컴퓨터-온라인 네트워크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한다. 물론 이 모든 미디어는 인간의 사용을 근거로 발견했거나 만들어졌다. 또한 이 모든 미디어가 우연이든 필연이든 의사소통을 돕는데 종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뉴미디어의 탄생을 마치 지금까지의 불통을 해소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굳이 아니라고 우길 이유는 없지만 생각해 봐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인구가 늘고 집단을 형성하고, 그 집단에서 문화를 만들어 가노라면 사용해야 하는 새로운 언어와 미디어가 늘어간다. 새로운 언어와 미디어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그로인해 또 새로운 언어와 그 언어를 싣고 나르는 미디어가 탄생한다. 다시 말해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절대시간을 단축하고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이유가 생기기에 뉴미디어가 생기는 사라지는 기간은 단축되고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당연해졌다. 이때 우리를 환기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미디어”그 자체의 개념이다. 모든 미디어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서 인간에게 다가간다. 때로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최고이자 최초의 미디어라고 말해야 한다. 건강한 미디어에는 건강한 인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버추얼...사이버...온라인...네트워크...이제는 이런 단어들도 트랜드에서 조금 벗어난 듯 느껴진다. 소셜미디어, SNS가 화두다. 마치 소셜네트워크를 모르거나, 사용자의 입장이 되지 않는 것이 사회적 도태를 말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곤 한다. 하긴 이 사회의 대부분의 정보가 신문과 TV를 넘어서서 웹으로 움직였고, 웹이 정보를 집적하는 공간에서 분화되는 공간으로 향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정보는 곧 생산력과 비례했다. 역사적으로 그랬다.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잘 듣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던 사회에서 생존을 위한 생산력을 얻는 경위를 따져보면 된다. 사냥하는 방법과 수렵, 이동, 집단생활의 모든 것을 선 경험자의 언어와 행동으로 동 시간에 경험해야 했다. 이를 위해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고 윗세대의 정보는 나의 생존과 직결되었다. 그렇게 쌓여온 것이 지식을 넘어선 지혜가 되는 과정이었다. 시간이 흘러 기억과 경험에 의존하던 정보가 기록되기 시작했다. 기록은 읽고 쓰는 능력을 요구했다. 자연스럽게 기록된 정보를 누가 갖는가에 따라 생산력이 달라졌다. 지식은 문자에 의존했고 사람들은 그 기록된 정보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경험과 지혜를 기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커뮤니티가 확장되고 보다 복잡한 사회를 구성하면서 효율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모든 감각을 열어두려고 노력하지 않고, 기록된 정보에만 매달렸다. 그것은 시각정보였다. 정보는 갖게 된 사람은 생산력을 얻게 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많은 인구가 기록된 정보를 얻고 싶어 했다. 놀랍게도 그렇게 쌓여진 정보들은 지식으로 쌓여갔다. 그 지식을 득한 사람들은 또 다른 정보를 가공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또 다른 생산력을 갖게 했다. 정보와 지식의 교류방식과 태도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방식과 같은 것이었다. 전기와 전파는 수신기를 가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사회는 이렇게 순환되고 있는 정보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태시키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스미디어가 창궐하던 시대에 대부분의 인구가 라디오와 TV를 그렇게 까지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구성원으로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는 미디어를 통한 정보유통 채널에서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이것 역시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생존과 직결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이런 미디어는 미디어문화를 형성하고, 단 한 번도 예술적 삶과 떨어져 있던 적은 없다. 인간감정을 묘사하려 했고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생존과 직결된 정보라지만 인간이기에 풍요로운 삶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문학적 상상력이 그러하며, 인간의 감각을 무뎌지지 않게 하려는 예술의 노력들이 그러하다. 미디어와 미디어문화의 본질은 다분히 인간답기를 지향했다. 최근 정보채널이 늘어나거나 접근성이 좋아졌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대안처럼 말하는 미디어들이 쏟아진다. 마치 개인의 접근권이 열려있으니 언제든 접속하여 “우리의 통계 안으로 진입하라”는 말처럼 들려서 불편해진다. 처리해야 할 정보가 늘어나면 그에 따른 정보해독에 따르는 집중력이 분산되는 것이 당연하기에, 한 개인이 균형을 찾는 일이란 쉽지 않다. 그 덕분에 다수의 의견이나 말 잘하는 논객의 화려한 언어유희에 속아 넘어가기 쉽다. 메일이 이동전화 문자메시지처럼 실시간으로 들어온다. 스마트폰이 실시간으로 우리 사회를 연결하고 중계해 준다. 편리함을 넘어선 처리할 정보의 양이 늘어났다는 것. 속도와 편의성을 무기로 찾아 온 통신의 혁신적 변화에 그리 좋아만 할 것일까를 생각해보자. 마치 새로운 정보를 남보다 빨리 얻게 되면 쿨하고 멋진 신세계에서 사는 것 같은 환상이 늘어난 것은 아닐까. 미디어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여 풍요로운 인간사회를 꿈꾸는 것이라면 지금의 미디어가 취하는 태도는 그에 반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마치 소셜미디어가 생산력을 높여 줄 것이라는 마케팅의 언어로 언제 어디서든 네트워크에 접속해서 노동하라는 행동지침으로 치환된다면 경계하자는 말이다. 지금 당장 하라는 요구가 늘어난다는 것을 행복에 겨워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곳에서 온라인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라는 광고카피는, 당신이 언제든 일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인간에겐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조절할 자율성도 가지고 있 다. (또는 가지고 있다고 믿거나 전제하고 싶다) 정보를 가진 자가 승자가 되는 사회에 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가. 서양인들은 예로부터 생각하는 모든 것은 표현 가능할 것이라는 억지스런 관념을 명제화 한듯하다. 대부분의 수사학과 언어학의 기초는 그렇게 완성되었다고 본다. 그냥 무시할 법도 한데 학자를 신봉하고, 학설을 떠받드는 사람의 수가 워낙 많으니 개인이 무시한다고 무시될 수 있는 건 분명 아니다 싶다. 몰라도 되거나, 몰라야 하는 정보가 나에게 와서 비효율성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그 스트레스의 정도를 안다. 가족이나 지인과의 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수가 혹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전화벨이나 문자메시지라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가. 스마트폰 사용자들이 트위터에 접속하고 세상을 구원할 듯 말하고 있지만,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과 대화가 방해받는다면 "의사소통을 위한 매체가 의사소통을 방해하는"꼴이다. 온라인에서 의사소통의 대안으로 포장된 소셜미디어는 교류와 소통이 사라진 정치와 특정인물의 욕망이 드러나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이른바 "social"이 지향하고 있는 신념과 확신이 빠진 것에 문제의식이 별로 생기지 않거나, 무리한 사회적 요구로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되면 사람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몰려들 것이 분명하다. 이보다 더 중요 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 집에서 나오면서 만나는 동네사람과 인사 나눌 여유는 있었는지? 친구의 현재 고민을 함께 나눌 시간을 내고 있는지? 문자메시지와 실시간 메일을 확인하면서 부모님과의 통화는 늘어나고 있는지?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망치와 못은 가구를 만들 때나 고칠 때 사용하는 도구다. 하지만 같은 도구를 쓰면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그것이 도구의 본질이다. 미디어가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이며 때로는 도구를 넘어선 문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 현재 모습을 한걸음 떨어져서 살펴보려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간혹 학부모(?)특강 강의를 끝내고나면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그 질문의 핵심은 “청소년이 된 우리아이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어려워요” “방문을 꼭 닫고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 저와 말하는 것이 싫은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럴 때면 나는 대답대신 먼저 확인하고 싶은 생각에 질문을 던진다. “혹시 거실에 소파는 TV를 향해 배치되어 있진 않은가요?” 많은 가정에서 온 가족이 모여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은 거실이다. 그런 거실에서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공간을 디자인 해놓고, 자녀와대화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숨 쉬는 것.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공간을 연출하는 것에는 너무도 인색하다. 물론 아이들이 성장에서 흔히 말하는 사춘기를 거치면서 자기세계가 생긴것에도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와 더불어 어떤 환경이나 조건이 없는 상황에서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다소 무모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들어줄 수 있는 구조와 들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닌데 말하는 것은 참 어려운 것이다. 우리 문화 안에서 집단의사소통이 일어나는 과정을 살펴보면, 수없이 반복되는 오류와 ‘사유방식의 소비적 반복’을 목격할 수 있다. 어제 회의에서 충분히 이야기하고 결론을 내렸건만 다시 만나서 확인하면 간혹 전혀 다른 결론을 말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같은 시-공간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 우리는 이런 오류가 생기는 것을 단순히 화자의 ‘말하기 방법’이나 ‘화술을 펼치는 태도’에서 그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상호작용이란 것이 의사소통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청자의 ‘듣는 방법’이나 ‘경청’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같은 말을 다르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내용을 어떻게 잘 전달하고 잘 전달 받을 수 있게 하는가 하는 구체적 내용에 대한 문제라는 것에 초점을 두어보자. 표현에는 구체적인 단어나 문장의 조합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태도와 적극적으로 듣는 행위가 포함된다. 능동적 경청자에게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은 “잘 전달하여 말걸기”보다 더 중요한 “스스로 말하게 하기”가 들어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즉, 의사소통의 환경이 문제라는 발상이 필요하다. 의사소통의 내용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여도 ‘의사소통의 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가능할리 없다. 소통이 시도되는 타이밍은 항상 어떤 환경에 놓여져 있는가와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문화가 평상이다. 근대 이후 교육이나 정보가 공공영역으로 급격히 팽창되어 가정과 지역사회의 기능이 분명히 약화되었다. 하지만 항상 마을입구에는 느티나무가 서 있다. 느티나무는 그저 한그루의 식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이 시작되는 진입에 대한 상징이다.

사람들은 느티나무 밑에서 마을로 들어가기전 잠시 쉰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시작을 알리는 곳이기에 몸이 그렇게 반응한다. 그곳에는 거의 평상이 있었다. 비를 피하기도 하고, 잠시 누굴 기다리기도 한다. 긴 시간을 걸음에 피곤한 다리를 쉴 수도 있다. 이것이 그 기능의 전부가 아니었다. 평상은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앉게 되는가에 따라 인원구성이 다양하다. 둘러앉거나 마주볼 수 있지만 등을 대고 사적인 공간으로 빠져나올 수도 있다. 그래서 평상에 앉은 사람들은 자연스럽다. 그렇게 평상에 앉으면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 현재, 우리에게 평상은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