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쉽게 공동체를 말합니다. 흔히 공동체는 의식을 공유하는 집단을 지칭합니다. 그것은 미래나 운명을 같이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공동체는 그런 거창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너무 쉽게 입에 오르내립니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가 가진 생각을 가장 잘 이해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만, 자신이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첫번째 어른이 부모였다는 것을 잊기 쉽습니다. 즉, 모두가 다르게 성장하는 객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합으로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가 형성될것이라는 신념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결국 허상을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먼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상상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주거지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었을까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내 고장 내 마을이기 때문에 지키고하는 사람이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지금 거주의 결정을 내리는데 중요한 요인은 경제력입니다.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재산의 정도에 따라 대부분 결정되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입니다. 안타깝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경제적 수준에 따라 주거를 결정하고, 살다보니 적응하고 익숙해 져서 정주성이 형성되곤 합니다. 지역사회에서 나고 자랐다 해도 이주를 결정하는 가장 큰 이유 역시 경제력에 의해 좌우되기 쉽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떠나서 새로운 문화적 경험을 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당연한 욕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속해있는 지역사회가 순수하게 자기주도적인 결정이라고 보긴 어려워집니다.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어쩔 수 없이 지금의 지역을 선택한 사람도 꽤 많을 것이며, 언제든 부의 정도에 따라 지역을 옮기고 싶어하는 욕구 역시 적은 수가 아닐 것입니다. 감추지 않고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지역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사업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업이란 형식을 빌어야 하기 때문에 따뜻한 사람들의 마음씨를 키우거나, 부족한 것을 메우면서 애향심을 북돋아야 한다고 말할 수 밖엔 없기 때문입니다.

공공지원사업이 되는 순간 실체로서 공동체는 드러나기 힘들고, 사업체로서 공동체가 더 부각되기 쉽습니다. 더구나 지원사업의 형태가 행정에서 주도하는 것으로 보일 때 훨씬 강회됩니다. 공공성이 가진 함정은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환상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다수의 만족을 따를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합니다. 이제는 익숙한 개념이 되어버린 님비NIMBY나 핌피PIMFY가 집단의 크기와 이익에 대한 문제이며 다수의 만족이라는 이유로 공공성이 훼손되는 것을 목격하곤 합니다. 결국 다양한 개인의 집합이라는 명제와 모두의 이익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사업의 구성과 참여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와 연관된 다양한 지원사업에서도 필요와 요구가 다양하기 때문에 유형화한 사업형태를 최종 목표로 삼거나, 단기간의 사업으로 성과를 드러내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부터 자유로와져야 합니다. 행정기관과 함께 해낼 수 있을까를 의심하면서 지역사회에서 공동체활성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등장했습니다. 대부분의 활동가는 이미 지역공동체에서 선의를 가지고 일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것 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들 입을 모아 말합니다. 그 행동은 사람들을 모으고, 생각을 공유하며, 함께 하니 즐겁다는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래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지원사업을 만나게 되었을 때 조금 더 확장하여 다양한 일을 지역에서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다른 누구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고 필요에 의해 행동을 결정한 사람들을 우리는 활동가라고 칭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최상위의 가치는 물적보상이 아니라 가치를 알아채는 동료가 늘어나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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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공동체, 커뮤티니, 평생교육, 마을등의 이름으로 활동가를 양성하는 교육이 많습니다. 이름을 조금씩 달리 쓸 뿐이지 교육과정에서 다루는 것은 거의 비슷합니다. 모든 교육프로그램이 다 달라야 하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양성교육이 비슷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 양성교육으로 양성이 되는가에 대한 문제는 다릅니다.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활동가가 단지 여가활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살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삶의 태도를 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양성교육은 어떻게 할것인가에서 어떻게 살것인가로 변화하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매우 어려운 시도라고 생각하고, 오래 걸릴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일 생겼을 때 반창고 붙이는 방식에 신물이 난 활동가들이 떠나지 않기 위한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활동가가 자율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과로 부터 자유로와져야 합니다. 공공의 비용을 들였기 때문에 그에 응당한 성과를 내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은 행정기관만이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활동으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성과가 아니더라도 활동가는 다양한 시도와 실패를 통해서 성장합니다. 즉, 성과로 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은 다양한 활동가의 경험을 축적하게 만드는 일종의 양식장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결국 공동체활성화는 공동체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을 남겼는가에 초점이 맞춰질 수 밖엔 없습니다. 사업성과로 축제가 만들어지고, 공원과 텃밭이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애정을 가진 지역사회의 참여자가 없다면 생명력에는 한계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공동체활동을 이해하는게 너무 어려웠다고 말은 공동체활동은 특정한 범주로 정의하거나, 옳거나 그른것에 판단이 단지 사업평가등으로 내려지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자주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사업이 조금이라도 확장되면 사업을 자꾸 분류하여 지원부서가 바뀌거나, 같은 내용의 사업이 다른 이름으로 둔갑하여 늘어납니다. 사업이 확장되면 그때가 가장 큰 위기 입니다. 예를 들어 50년전통의 맛집이라고 해서 찾아가던 곳이 갑자기 프렌차이즈가 되면 그 맛과 멋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결국 고유성이 사라지면 형식이 남고, 형식이 내용을 따라가기 힘들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니까요. 운영하는 사업이 활성화 단계를 거쳐 가능성이 보이면 무조건 확장하려 하지만, 그 고유성을 어떻게 지키면서 더 많은 참여를 독려할 수 있을지 우선 고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럴 때에도 공동체활동을 어떻게 할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에서 어떻게 살것인가를 이야기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