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에 대한 대화에 참여하는 참신한 방법_데뷰작과 최신작으로 읽기
플란다스의 개와 기생충
봉준호는 이미 한국 영화에서 최고 수준의 감독이다. 관객 뿐 아니라 영화계에서도 아니라고 말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작품이라기 보다 진짜 “잘 만든”영화를 줄줄이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데뷰작 플란다스의 개는 제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플란다스의 개는 독창적인 작품이고, 기생충은 독보적인 작품이다. 한 감독의 데뷰작과 최신작을 나란히 놓고 보면 작품세계를 더 많이 이해한 느낌이 들곤한다. 우선 플란다스의 개는 영국의 아동문학에서 제목을 가져 왔겠지만, 오히려 봉준호 감독의 어린시절에 보았을 법한 쿠로다 요시오감독의 TV애니메이션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1970년대 애니메이션이 대부분 밝은 분위기였던 것과 달리 플란다스의 개는 어린이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가난한 소년이 우유배달을 하며 자기의 꿈인 화가가 되겠다고 말하면서 살아가다 미술관의 그림 아래에서 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당시 어린이들에게는 가난과 소외, 비극이나 죽음등에 노출되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수많은 묘한 감정이 교차됨을 느꼈다. 2000년 작품이니 그 당시 주요관객의 연령대를 고려했을 때 아마 많은 사람들이 비슷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어린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면서도 어느 한구석에 석연찮을 것 같은 불길함 같은 이미지 말이다. 정작 영화는 동화와 애니메이션 무엇과도 상관없다.
영화 플란다스의 개는 한국의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국의 아파트는 효율을 위해 만들어졌다. 집(또는 home)이라기 보다는 집단 거주시설에 가깝다. 1000세대가 같은 주소를 공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이 지켜야 하는 매너가 있다. 부족한 주차장의 관리, 쓰레기 처리, 공공안전등이다. 자기의 집이라면 직접 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아파트에서는 그 모든 일을 고용한 누군가에게 시키고 감춘다. 마치 원래 없던 것처럼. 숨기고 감춘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파트의 문을 닫고 들어가는 순간 충분히 외면할 수 있다. 영화 플란다스의 개는 우리가 사는 사회에 분명 존재하지만 특별히 관심을 가져본적 없는 외면과 분리된 삶에 대한 성찰이다. 단, 어둡지 않다. 흔히 말하는 블랙코미디인 셈이다. 웃는 이유의 뒷맛이 쓰다. 등장인물은 정의감에 불타지만 목표가 유명인인 여자와, 자력으로 메인스트림으로 진입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현실에 좌절하고 심성이 꼬인 남자다. 캐릭터의 설정이나 연기가 아무리 훌륭해도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한정적 공간인 아파트와 지하실이 가장 인상적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주거지에서 대부분이 알고 싶어하지 않거나, 알지 못하는 곳. 경비원과 정체불명의 어떤 인물이 등장하는 곳. 그 지하공간은 숨어들어간 사람이 숨기고 싶은 일을 벌이는 곳이다. 영화속에서는 지하에서 개를 잡아먹는다. 물론 이건 영화의 설정이다. 한국, 특히 서울에서 길잃은 개를 몰래 데려다 먹이로 삼는 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만큼 극단적으로 감추거나 비밀스럽기에 숨어해야 하는 행위다. 영화속 서사는 지하공간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뭔가 부정한 것을 들킨것 같은 민망함과 약간의 소름끼치는 공포가 흐른다. 그리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속시원히 해결된 것 없는 찜찜함이 지속된다. 우리가 외면하려는 현실을 마주했기 때문에 생기는 부끄러움이라고나 해야할까. 플란다스의 개는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독창적인 내용과 표현이었다. 마치 다소 엉뚱하고 비약이 심한 단편영화에서 나올 것 같은 플롯에다 코믹스 같은 연출이 그랬다. 당연히 흥행하지 못했다.
이후 여러편의 영화를 거쳐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을 만들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영화제에서 수상소감을 했다. 소셜미디어에 그 수상소감이 담긴 영상클립이 돌았고 ‘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라는 심정으로 영화관을 찾은 관객도 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단도 관객도 영화제도 그의 영화를 칭송한다. 사회에 존재하지만 가려놓고, 감추고, 비밀에 부치고, 부정하게 되는 무엇인가를 세련된 스타일과 화법에 멋진 연출로 독보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 생기는 그 찜찜하고 부끄러운 감정과 더불어 어두운 유머코드로 이 영화는 흥행했다. 20년 동안 균형을 잃지 않고 일관성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 참 멋있는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