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며칠전 갑자기 눈이 내렸다. 집 밖에 나가서 현관문 근처를 쓸었다. 누군가는 이곳을 쓸어야 사람들이 미끄러지지 않고 다닐 수 있다. 아이들의 눈싸움과 썰매놀이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길이 오픈되어야 한다. 그래서 눈이 오면 입구를 빗자루질 하곤 했다. 그런데 올해 처음으로 느꼈다. 혼자 쓸고 있었다. 눈이 이렇게 쌓이고 있는데 나와서 빗자루질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걸 여태 몰랐다. 단독주택에 살 때는 너무도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공동주택인 아파트로 이사와서도 나는 내려가서 눈을 쓸었다. 누군가는 이곳을 쓸어야 한다. 그래서 나간다. 경비아저씨들과 관리소 사람들에게 관리비를 냈으니 그들이 쓸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관리비를 더 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많은 눈길을 그들 몇명이 혹독한 노동을 해야 하는 쓸쓸한 공간으로 놔두고 싶지 않다.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청소를 누군가가 할 것이라고 위탁하는 그 순간을 목격한다면 그곳에서 공동체성을 말하긴 쉽지 않다. 공동체성은 누구네집 숟가락 숫자나 사생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닥치고 일하는 것에 가깝다. 제발 좀 떠들기 앞서 휴지를 줍고, 공유마당을 청소하라고 얘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2. 공동체는 배려를 통해 공생하며 산다. 그 당연한 배려를 다른 이름으로는 희생이라 부르기도 했고, 어떤 관점으로는 협업이라 부르기도 한다. 수십년 전만 해도 마을 노인의 죽음은 공동체를 움직이곤 했다. 자기 집에 있는 식기를 꺼내와 팔을 걷어붙이고 모여들던 아주머니들을 상상할 수 있었고, 손님맞을 준비는 가족과 더불어 이웃사람이 함께 힘써 해내는 모습이 그려진다. 현재 이런 풍경은 특별한 것이어서 다큐멘터리에 등장하거나 영화속에 등장한다. 낡은 것이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사적영역에 침범을 두려워하는 현대인의 생활상이라고 접어두자면 중대한 가치를 놓치게 된다. 현대인에게 이런 관계의 문제는 이웃을 경계하고, 공동체의 성원을 의심하고,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에 과하게 이입하여 사회를 두렵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은 사라진 공동체의 든든한 지원은 인간의 삶에서 필수조건에 해당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시스템으로써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재화의 교환이나 지불로 대체된다. 돈을 주고 사거나 그와 유사한 거래로 변해왔다는 뜻이다. 다시말해 관계방식으로 자연스럽게 해결되던 문제가 재화와 사회적 권위를 갖지 못하면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이전되었다. 이때 재화와 힘을 갖지 못한 공동체 성원이 느끼는 것이 분노와 상실감이다. 문화와 예술은 한 인간의 태생적 배경이 되어버린 습속에 근거하는 경험영역에 있다. 문화는 환경이며 예술은 경험재다. 생성조건이 온전하여 자연발생하며 이전의 경험속에 추론한 행위라는 뜻이다. 한 개인은 물리적 독립조건을 충족시키면 정의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농축된 문화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예술교육은 개인의 문화/예술적 성장을 중심에 두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게 된다. 하지만 사회적 분노와 상실감이 배경으로 존재하는 한, 개인의 성장에 교육이 역할을 할 수 없다.
    모두들 자신이 우리사회를 가장 잘 들여다 보고 해석하고 있다고 강하게 믿고 있더라. 넘쳐나는 자칭 전문가 그룹의 등장을 보면 실감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병리현상이나 사회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내가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고 내세우기 급급하다. 하지만 사회적 항상성이 어느 시점에 정상작동할 것인지 기다리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또 어떤이는 사회가 자정능력을 가진 유기체라며 스스로 구경꾼을 자처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힘을 보탠적이 없으면서 정작 자신에게 고통과 사회적 소외가 가해지기 전까지는 무감각하게 반응한다. 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해 낼 수 없다. 단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하고 있는 개인과 사회의 모습을 성찰해야 할 때는 분명히 찾아왔다.

  3. 흔해빠진 예술교육 포럼에서 발표자의 이야기가 충격적인 기억이 있다. 소득수준과 학력은 문화향유능력과 비례곡선을 그린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문화와 예술의 향유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문화콘텐트를 소비하는 능력으로 놓고 보면 그 이야기는 타당성이 있다. 전시를 관람하고,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는 횟수가 늘어날 수록 미적 탐색능력이 높아지고 문화적인 사람이 된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포인트는 누구와 공연을 볼 것인가 (-> 즉 관계방식과 관계의 질에 대한 문제다), 전시를 보고 난 후에는 어떤 경로로 집에 오는가(-> 문화와 예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한 이슈다), 내가 원한 콘텐트를 소비하는 주체인가(-> 복지의 시각에서 문화와 예술을 바라보게 되면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최소한 남들만큼은 우리도 한다는 시각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때 문화소비의 주체 각종 문화와 예술을 개별 콘텐트로 떼어놓고 상상하는 낡은 사고방식은 단체로 관람을 시켜주면 문화예술의 향유자권리가 지켜지는 것이라고 보는 도식적 사고를 만들어낸다)를 우선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극단적으로는 타워팰리스에 사는 개인으로서 10대 청소년은 문화예술의 적극적인 소비자라고 전제하거나, 농산어촌의 분교에 다니며 농사가 주업인 부모를 둔 10대 청소년은 TV이외의 문화수용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가정해선 안된다는 말이다. 학교에 다니면서 강둑을 걷고, 바람의 냄새로 하루를 점치는 문화적 환경은 도시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며, 문화적 다양성이 허용되는 거리를 걸으며 오브제의 예술성을 경험하는 것은 도서산간지역에서 경험할 수 없다. 즉, 무엇은 예술이고 무엇은 예술이 아니다로 선을 그어선 곤란하다. 소비가능한 예술경험을 중심에 두고 우리는 예술과 예술교육을 말할 순 없다. 촌스러움이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바라볼 때 이질감을 표현하는 말이다. 촌에사는 사람이 촌스럽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움을 말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비하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예술교육은 어떤가. 촌스럽다는 자연스러움을 얼만큼이나 존중할 수 있는가 질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