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예술과 표현에서 관찰을 만나게 된다.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매일 매일 일어나는 작은 변화를 감지하려는 노력이 예술로 쌓이게 되는 결과다. 감동은 무엇에 의미부여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속성이 있기에 인간의 보편적 정서와 닿아있다. 즉 공감의 성취물이다. 관찰은 어떤 특정한 대상을 분석하려는 의도로 해석되곤 하지만, 예술행위 또는 예술교육에서 관찰은 분석 이전의 단계를 지칭하게 된다. 바라보는 대상에 대한 침잠으로 부터 시작되는 시간싸움이다. 관찰의 주요 대상은 일상이다. 일상을 관찰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이 단지 특정 사물에 대한 것이 아니다. 감각을 열어두고 대상에 침잠하는 과정은 단지 대상의 외형적 변화를 감지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우선, 시간에 대한 감성이 열린다. 우리가 무감각하게 누리는 광원은 태양으로 부터 온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밝기와 위치가 변화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모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바뀐 것을 보게되는 듯 하지만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식한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왜 모를까 싶지만 통합적 감각을 열어두려 노력하고 보면 시간의 흐름이 신기하거나 낯설게 느껴진다. 사실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대상을 보는 것에서 지각된다. 그 지각에서 그치지 않고 대상체가 빛을 받아들이는 순간의 변화가 감지되고, 그늘이 눕거나 사라지는 경험이다. 여기서 "순간"이 무엇인가. 필연 속 우연의 연속이며/시기는 알 수 없으나 패턴으로 예상되며/수를 셀 수 없는 간섭의 조건을 포함한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속이라 걸 감각으로 느끼면 그제서야 자신의 경험영역으로 수용한다.

관찰과 일상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상의 관찰과 기록은 경험을 타자화 시킨다. 수 많은 예술이 아티스트의 자기표현에서 나왔다는 것에 토를 달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개인의 세계관이며 그 안에 갇혀 있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개인이 보고 듣고 만지는 감각과 대상체의 연결을 시도하면서 개인의 감각과 감정 또는 경험을 내면에서 외부세계로 내보내고 다시 받아들이는 순환을 반복하면서 타자화된 자기 경험을 표현하게 된다. 이것이 가능해질 때야 비로소 진짜 자기의 순수한 내면을 들여다 보게 되거나 보편성이라는 애매한 경계속에서 명제들을 찾아내기도 한다. 단지 그것이 개인과 대상체와의 관계가 아니라 사회적 참여등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더 분명해 진다. 일상은 매일 반복되는 것을 말한다. 반복은 같은 것이 되풀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의 같은 패턴화에 대한 인식이다.

“자신을 소재로 자기 표현이 이루어지고 나면 거기에서 ‘나’는 사라지고 타자화된다” -Nicolai Hartmann

“오브제는 세상을 사는 인간의 기호이다.”–Roland Bart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