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세는 타인과 관계하며 살아가는 것을 지칭하니 결론적으로는 관계방식에 대한 표현이다. 긍정적으로는 적응력이나 융통성이 발휘되는 것이지만, 얇은 귀 또는 철학의 부재와 임기응변으로 구현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처세+술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라기 보다 사회관계의 기술이라는 뜻이다. 처세술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느낌이 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심지 없이 휘둘리고 사익만 취하는 방식을 지칭하니까 그렇다.

우리사회, 절대다수의 교육현장은 어떤가. 우리는 정해진 답을 요구하는 현실에 살고 있다. 교육장면에서 교육자는 답을 잘 알려주는 사람이어야 생존하게 된다. 전인교육이고 나발이고 당장 교육자가 먹고 살기 위한 생존법 또는 처세술이 발동한다. 내용은 말뿐이고, 형식이 주도하면 우리는 어떤 해법에 다가가는 길을 잃는다. 다수의 문화가 내놓은 정답 강요. 이 역설적 상황에 놓여 있다면 교육자는 그저 피교육자와 그 이해당사자의 욕구에 순응하며 밥벌이를 하는 것 이외에 시도할 방법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답을 요구하는 피교육자의 요청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난감할 필요가 직업적으로는 없어진다는 뜻이다. 일단, 가르치는 것은 전문성이 그리 많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의 역할인지가 끝나고 나면 바로 커리큘럼이 요구된다. 교육내용을 확정하고 성취정도를 결정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가르치는 것은 성취를 위한 학습계획에 따라 구조화되고, 학습성취가 부족할 경우 보충하며 최종 목표에 다다르는 것에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예상하는 범위의 성취와는 차이가 있다. 그 예측이 때로는 부작용이 되기도 한다. 교사의 성취정도와 학생의 성취정도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며, 개인의 능력과 교육장면의 환경이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교육 커리큘럼을 생산하는 교육자가 아무리 성찰적 개인이라도 교육과정을 통해 성장하게 되는 피교육자를 "이윤의 수단"으로 여기거나, "개인의 목표를 위한 제물"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시스템안에서 무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