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 예술이 되다. Life Tracking

Buscant 2023-11-07

컨트리?

Buscant 2023-09-13

미국에서 요즘 컨트리(이게 뭔가 장르인데 입에 안 붙는다)음악이 대세다.
사회가 경직되고 보수적이 되면 어김 없이 기성문화를 부활시키려 한다는 느낌이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트로트가 대세가 되는 것과 느낌이 비슷하다.
그런데 이 문화시그널이 릴나스엑스라는 흑인 뮤지션으로 부터 느껴지는 아이러니.

생명을 유희로 삼는 것을 반대한다.

ARTICLE 2023-08-06

신앙이나 종교가 이유가 아니라 그저 삶의 방식이나 철학으로써, 생명을 유희로 삼는 것을 반대한다.
타인의 유희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순 없기 때문에 사회운동이라거나 강요적 설파 따위를 하진 않는다.
어려서 바다낚시가는 걸 좋아했었다.
낚시가 즐거운 이유는 배타고 바다로 향하는 그 행위도 있지만 최종 유희는 수확량과 비례한단걸 알았다.
더구나 낚싯대를 쥐고 힘겨루기를 하는 그 순간의 짜릿함이 '너무'좋았다.
물고기를 잡아서 먹겠다는 의지는 거의 없고 그저 그 낚시가 재밌었다.
몇 번의 경험으로 내가 얼마나 낚시를 재미있어 하는지 알았다.
물고기를 죽이는 것으로 내 하루의 즐거움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어려서 꿩사냥을 따라 나섰던 기억도 있다.
사냥철이 되면 허가받은 공기총으로 꿩니아 참새를 잡았다.
낚시보다 재미있는 기억은 아니지만 그 역시 비슷했다.
절뚝이며 도망치고 있는 새를 잡으로 뛰어다니며 정복감을 만낀했다.
20대가 되어서 스키를 타러 다녔다.
한국의 90년대에 스키는 그렇게 많은 인구가 즐기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어느 여름 워크숍에 참여했는데 내가 지난 겨울 갔던 그 스키장이었고, 그 황량함에 너무 충격을 받았다.
한 계절 인간의 유희를 위해 산봉우리가 처참히 깎여 있는 모습.
그 이후 스키와 스노우보드를 타지 않는다.
골프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유희를 위해 생명을 도구로 삼는 것이 왜 문제가 아니겠는가.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연관성을 충분히 찾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손맛이 좋은 낚싯대를 개발하거나, 스키장의 마찰력을 조절하기 위해 인공제설을 한다거나
이 모든 것은 그저 유희에 그친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수 많은 유희에 대한 변명거리를 참 꼼꼼히도 준비해 놓더라.
더구나 생명이라는 말을 꺼내면 그럼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거냐는 극단적인 반응이 돌아오곤 한다.
생명이라고 말하면 그럼 네가 사는 집은 어떻게 건축되었는데? 슈퍼마켓에서 사는 음식재료는? 같은 질문으로 자신의 유희와 생존은 같은 범주에 있다는 걸 강조하더란 말이다.
아마 내가 사회운동으로 연장시키지 못하는 것은 이런 싸움에 지쳐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런것 같다.
내가 가진 기준은 자유의지를 가진 생명을 구속할 권리가 인간에게 없다는 것 정도다.
식물을 화분에 담을 때 미안함을 느끼긴 하지만 사냥과 같은 카테고리에서 죄책감을 지우지는 않게 되는 이유인것 같다.

KTX를 타고 가다보면 디스플레이를 통해 뉴스를 계속 보게 된다.
우연히 본 뉴스에서 두 인물의 사망소식.
레미 루시디라는 사람은 홍콩의 40층 건물을 오르다 추락사했다. 그는 인플루언서이고 수 많은 마천루를 정복한 스파이더맨이란다.
그의 인스타는 전 세계 건물 옥상에서 걷는 모습을 영상으로 가득하다. 건물 관리인을 속이고, 몰래 숨어들어가는 것이 당연한터라 이번 홍콩에서도 관리인이 건물 밖에서 구조요청 전부터 신고하고 따라갔던 모양이다.
잔나 삼소노바라는 사람은 말레이시아에서 아사했다. 생과일만 먹는 것으로 유명한 인플루언서다.
이미 지인들은 그녀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영상 속의 활짝웃는 그녀 모습과는 달리 걷기도 힘들어하거나 림프이상을 진단받았다고 했다.
만약.
이들에게 카메라가 없었다면 이 행동을 계속 했을까 생각해 본다.

무인양품의 삐딱함

JOB SOUND 2023-06-20

한때 노재팬운동이 한창일 때 무인양품 대체품이 있는지 찾고 사용했었지만, 적절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
난 무인양품에 대한 충성도 따위가 높은 편에 속한다.
일본 제품이라 옷이나 가구는 내 신체 사이즈와 너무 달라서 아예 구경도 하지 않는다.
주로 생활용품을 쓴다.
그릇을 포함한 주방용품, 욕실, 청소, 가전제품 일부분은 거의 무인양품에 의존하며 살았던 것 같다.
무인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과하지 않은 디자인, 최소화한 포장, 그에 걸맞는 제품가격이다.
과한 스티커가 붙어 있지도 않다. 이름 그대로 상표가 없는 좋은 물건이다.

제품 디자이너의 생활철학이 담겨 있어서 좋아하지만, 정작 무인양품 매장에 가면 그 기준이 사라질 때가 많다.
뭔가 제품과 판매장의 삐딱한 불균형을 느낀다.
키친타올은 최소로 쓰려고 하지만 기름 닦는 종이를 신문지로 쓰려해도 구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키친타올을 사서 쓴다.
합정동 메세나폴리스에 있는 무인양품에 가서 키친타올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 매장에 키친타올은 없습니다"
분명 여기서 사서 썼는데 내 착각인가? 라고 생각하며 이것 저것 보는데 눈에 보였다.
나에게 그렇게 안내한 직원이 옆에 있길래 집어 들면서 여기 있다고 말하자 직원이 말한다.
"아. 키친페이퍼요?"
좀 기가 막혔다. 키친페이퍼라는 무인양품의 정확한 명칭을 말하지 않으면 물건을 찾을 수 없다면 사람직원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악연인지 "키친페이퍼"와는 사연이 또 있다.
신도림 디큐브시티 지하 1층 매장에서 집에 가는 길에 키친타올을 사러 들어가서 정확히 뽑아쓰는 키친페이퍼를 찾는다고 직원에게 물었다. 무인양품에서는 두루마리와 뽑아쓰는 키친타올을 생산하는데, 질이 다르다. 나는 기름 닦아내는 용도로만 사용하기 때문에 뽑아쓰는 제품의 질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에 꼭 그걸 사서 쓴다.
신도림 매장에는 두루마리 밖에 없어서 직원에게 물은 것이다. 그러자 직원이 답했다.
"무인양품에 뽑아쓰는 건 원래 없어요"
또 기가 막혔다. 이 매장에 없다고 무인양품에 원래 없다고 말하다니.
뭐라 말하기 귀찮아서 그냥 나왔다. 직원의 태도도 너무 퉁명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얼마전 종각역과 연결된 영품문고 지하에 있는 무인양품에 갔다.
집들이 선물로 시계를 사주기로 했기 때문에 전부터 내가 쓰던 벽걸이 시계를 사려했다.
소음없고, 가볍고, 있는 듯 없는 듯 한 디자인이 꽤 좋다.
아무튼. 고를 것도 없이 그 시계를 들고 계산대로 갔다.
전자제품은 키오스크계산이 아니라 매장직원을 만나서 보증서를 받는다.
계산대에서 조금 기다리니 직원이 왔다.
보증서를 써주면서 시계를 박스에서 열어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제품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해 주세요"
시계를 꺼내서 손상된 곳이 있는 지 살펴본 후 작동하는지 확인부탁한다고 말했다.
시계의 본질은 시간을 표시해야 한다. 제품이상을 확인하는 것은 겉에 스크래치가 아니라 시계의 기계적 작동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상식상 건전지를 꺼내서 작동을 확인해 주는 것이 맞다. 그런데 직원은 건전지가 없어서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난 또 상식적으로 물었다. 그럼 가져가서 시계가 작동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자 직원이 친절하게 답했다.
"네. 그럴경우 다시 매장으로 가져오시면 됩니다. 호호"
이건 키친타올 처럼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라서 그 직원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말했고 건전지를 가져다 주어서 시계가 작동하는 것을 확인했다.
말하지 않으면 시계는 모양만 보고 사야하는 무인양품이라니.

무인양품의 디자인을 좋아하지만 운영이나 직원들의 제품을 대하는 태도는 그 철학과 정반대에 서있다.
친절하게 웃으면서 불편을 안겨주거나, 매장직원이 제품에 대한 애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무인양품을 좋아하지만 점점 멀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복제의 정당성

ARTICLE 2023-05-30

엄격하게 구분하자면 동일한 예술이나 예술 행위는 없다. 디지털 시대에 원본:사본 구분이 의미 없어졌는데 무슨 소리냐고? 예술은 복제 불가능한 현존재성을 취하기 때문이다. 지금 예술행위자, 독립하여 존재하는 작품, 예술을 마주한 향유자 모두가 어느 시간과 공간에서 예술세계에 접근했는가에 따른 비가역적 상황에 가깝다. 근본적으로 예술은 복제에 대한 열망을 숨김없이 드러냈었다. 주조(鑄造)와 인쇄 등의 기술이 공격에 가깝게 예술과 한 쌍이 되었던 숨겨진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이 자본과 만나고 시장에 등장하면서 값으로 매겨지기 시작한 후, 희소와 독자성이 상품 가치화 되었을 것이라는 의심은 극단적(오죽하면 대체 불가능한 디지털 예술이 등장)이지만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예술과 예술 행위 자체의 유일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전제는 크게 변함이 없다. 이런 측면에서 문화예술교육을 바라본다면 어떤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언젠가부터 문화예술교육은 새로운 교육 방법에 목마르다. 새로운 방법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관행의 문제를 발견했거나, 풀리지 않는 사건이 발생할 때 대안이 되는 방법을 찾는 것은 긍정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결이란 겹겹이 쌓아 올린 시간과 비례할 때가 많다는 점을 간과하게 만든다. 늘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 과제는 아니라는 뜻이다. 문화예술교육에 접근을 시도하는 예술가는 우선 어떤 커리큘럼을 만들어(이 역시 창작의 연장으로)낼지 떠올리곤 한다. 커리큘럼은 문화예술교육에서 요소가 아니라 핵심이 되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행위를 한정된 매체로 전환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지면으로 옮겨 적어야 하고, 추상에 가까운 작업방식을 단어와 문장에 가두고 시간별로 배치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커리큘럼이 왜 유일무이한 것인지 강조하려 든다. 지원사업의 경우는 더 심해진다. 창의성 혹은 독창성이라는 심의 규칙 등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관용구가 되어버려서, 실제 어떤 생각을 문화예술교육으로 전환하려는 의지인지 확인하는 장치로는 기능하지 못한다. 결국 문화예술교육이 창의성과 독창성이라는 카테고리 속 어휘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면 ‘지금까지 시도되지 않은’ 혹은 ‘기존의 방식을 뛰어넘어’ 등의 표현으로 새로운 방식이란 것을 드러내려고 애쓴다. ‘늘 하던 대로’라거나 ‘수년간 이어온 작업방식 그대로’라는 문장은 찾기 힘들다. 마치 그것은 노력하지 않고 발전 없는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낙인과 같기 때문일까 싶기도 하다. 예술가가 전문성을 가진다는 것은 늘 하던 방식을 꾸준히 이어오거나, 수십 년간 자기 방식을 실험해온 결실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예술가들이 문화예술교육 장면에서는 전혀 다른 어휘를 사용해야 한다면 어색해 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의식조차 희석되어 버렸다면 절망하여 포기하겠으나, 다행인 것은 끊임없이 문제에 공감하는 예술가와 문화예술교육자가 등장한다. 예술가는 문화예술교육에서 예술행위를 교육으로 복제한다. 예술행위를 복제하고, 예술가의 태도를 복제하고, 감상과 향유의 순간을 복제하려는 욕망을 드러내야 한다. 학습자가 모방하는 과정을 즐기고, 복제의 끝에서야 내재시킨 감각을 통해 창작 동기가 발현되는 것을 기뻐한다. 마찬가지로 문화예술교육자가 되려는 예술가 역시 성장을 위해서는 문화예술교육을 수없이 복제하는 과정을 겪는다. 여전히 전제는 문화예술교육 전문성이 꾸준히 자기 방식을 반복해온 결실에 대한 복제여야 한다는 점이다. 즉, 자기 방식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이 커리큘럼이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과제가 있다. 관행처럼 여겨지는 프레임 안에서는 예술가가 이런 경험을 만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1:집단의 교육환경을 구성하는 것, 교육 시간의 비유동적 배정, 비자발적 참여 배경, 예산 규모에 따른 재료선택과 시간 편성 등등. 이미 정해진 것이 많기 때문에 예술교육을 위한 작업의 융통성은 그만큼 줄어든다. 예술가가 작업하는 방식과 거리가 생기기 시작하면 이 글에서 말하는 복제는 사라진다. 한 뼘만 강하게 표현하자면 ‘처리’하기에 더 가까워진다. 1:다(多)에서 벗어나는 환경을 만들거나, 불특정 학습자의 첫 대면으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 가장 가까운 사람을 학습자로 상정하거나, 자율성에 근거한 작업시간의 협의를 교육 장면에서 풀어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안에서 예술가의 작업을 교육으로 복제하기 시작한다면, 복제 불가능한 현존재성이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Provate dancer

Buscant 2023-05-25

청소년기에 헤비메탈만 듣다가 어느날 아주 쎈 아줌마(?)를 보고 가슴이 콩닥가렸던 기억. 티나 터너.

이해가 안될때 외워서 하는 행동이 늘어간다.

JOB SOUND 2023-05-21

합리가 아닌 경우는 허다하지. 다만 타인과 함께 살기 위해서 불합리하지만 양보해야 하는 경우도 많고,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아무 말 없이 따르는 것도 이젠 이상하진 않다.
전세라는게 그렇다.
최근들어 깡통전세나 역전세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난 전세가 받아들이기 힘들다. 대단히 위험한 사채시장인데 이걸 한 사회의 시스템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는게 말이다.
그래도 전세는 외우고 남들처럼 그냥 우겨서 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아파트 청약(맞나?)은 외우고도 이해가 안되서 시도할 의향이 없다.
신발은 신어보기 전까진 내 발에 맞는지 알기 어렵다. 핏이라고 부르는 그 미묘한 느낌도 있고. 같은 제품이 오래 나오는 경우 이미 내 핏에 가깝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는 경우는 있지만.
아무튼 마트에서 감자를 고를 때도 이리저리 돌려보고 사면서 하물며 집을 모델하우스 보고 결정하다니.
채광이 어떤지, 풍광이 답답하진 않을지, 드나드는 길목의 불편은 감수할 수준인지 등등 따져볼 것이 너무 많다.
그런데 완성되지 않은 채 집을 사다니???????? 전국민이 부동산 사업을 하는 느낌인데 난 아니어서 굳이.
외울것이 더 많아지고, 이상하지만 입 꾹 다물고 남들이 하니까 따라해야 되는 상황은 삶이 비루해 지곤 한다.

Lewis Capaldi

Buscant 2023-05-17

Tiny Desk Concert_Lewis Capaldi

루이스 카팔디가 타이니데스크콘서트에 나왔다.
얼마전 친구가 몇 개월간 스코틀랜드에 간다고 했는데, 그 나라에 대해 아는게 거의 없다는 걸 알았다.
생각해 보니 거기 출신 루이스 카팔디가 풋풋한 모습으로 노래한다는 것 정도.

그러다 우연히 다큐를 보게되었는데, 깜짝 놀랐다.
글로벌 차트 1위를 하고 투어를 떠나는데 매니저가 짐싸주고 공항에 모셔다 주는 모습이라기 보다는
집에서 배낭싸는 20대 청년의 모습이며,
돈 생기면 좋은 이유로 반스 운동화를 한켤레 더 살수 있다며 멋쩍게 웃는다.
유명인의 인기는 욕망을 자극하는거 아니었어? 진짜 가족들도 투어를 떠나는 아들 또는 동생을 저렇게 대해?
아무튼 기분 좋은 다큐멘터리였다.

가끔 라이브를 보면 그가 뚜렛증후군 경련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게되는데,
영상을 보면서도 응원하게 된다.
2023년 월드투어 일정에 한국이 포함되었다.
나의 공황장애는 콘서트장에 가는 것이 어렵다. 약먹고 메탈리카 콘서트를 무사히 다녀오긴 했었으나 이제 그마저도 자신이 없다.

아무튼 응원하는 가수임.
뚜렛. 까짓것 팬들은 루이스가 아프지 않은 범위 안에서 노래하길 바랄 뿐이라 경련은 아이돌의 댄스보다 보기 좋다.

무동력자동차

Buscant 2023-05-17

차고문화가 있는 나라가 가장 부러운 것 중 하나인 무동력 자동차대회.
비교적 최근에는 차고에서 이런 저런 것을 고치고 만드는 문화가 줄어들고 있다는 얘길 전해 듣는다.
아이들이 엔지니어링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온라인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영국의 솝박스 경기도 예전만큼 이슈가 되진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물론 현지에 사는게 아니니 체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지.
무동력자동차나 무동력비행기 대회들은 대부분 각 가정의 차고에서 나온 창의력 쩌는 작업이다.
심지어 비행기는 2초간 날았다 하면 장내가 흥분의 도가니다. (니들 양덕은 도덕책!)

지난 주 강의에서 주제가 창의성은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주제 이제는 더 강의하기 싫을 만큼 많이 하기도 했고 반복해서 말하곤 있지만, 답이 나와 있는 것이 가장 실현하기 힘든 것일 때가 많다.
바로 이런 무동력자동차 같은 그 행위자체에 신나서 이런 저런 실험을 반복하면서 발생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캠프여야하는 이유

ARTICLE 2023-05-16

형식_캠프여야 하는 이유

약속 혹은 규칙으로써의 시간을 제외하고 개인에게 허락되는 주관적 시간개념이 있다. 인간의 집중능력 평균시간을 근거로 수업시간을 설계한다. 물론 주의력의 시간은 그보다 훨씬 짧지만 특정 과업에 대한 집중력은 대체로 20여분을 지속시킬 수 있다. 절대 다수의 수업시간이 집중력이 흐려지는 한계 시간을 고려하여 40분에서 50분 사이에 맞추곤 한다. 같은 과업이지만 그 과업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고 있는가에 따라서는 이 시간 개념이 의미가 사라진다. 그 변수가 수 없이 많고 복잡하며 주관적이다. 오늘의 컨디션, 과업에 대한 이해 정도, 재능과의 접점, 함께 하는 사람, 과업수행의 리듬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렵다. 최소한 교육장면으로 국한 시킨다고 해도 배움이 발생하는 경로에 따라 이 주관성은 더 큰 차이가 생긴다. 흔히 문화교육/예술교육의 장면은 어떤가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다. 문화와 예술이 주도적 자기성장을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배움 현장은 형식은 자기시간을 주관화 시키려는 시도 보다 통계적 시간개념이 적용되고 있는 것을 아닐까 의심해 보자. 그렇다고 무형식의 장에 학습자를 초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탈형식성의 시도는 얼마나 진전해 있을까. 예술교육 캠프는 이런 형식에 대한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학교교육이 정해진 교과와 스케줄에 의해 약속처럼 움직여야 하고, 학교안으로 예술교육을 적용하려면 그 형식에서 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이는 관성처럼 학교 밖으로 나서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캠프로 초대되면 모임부터 해산까지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고, 그 안에서 훨씬 자유로운 주관적 시간활용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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