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성? 모두를 위한다고 자주 떠든다. 참 허망한 말이다. 그럴리 없기 때문이니 빈말은 멈추어야 하는데 그럴싸해 보이고 싶을 때 관용구처럼 쓰더라. 공동체안에서 가족, 동료, 이웃들과 삶을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가 보이지 않는 배려를 통해 공생하며 살아왔다. 공동체는 그 당연한 배려를 다른 이름으로는 희생이라 부르기도 했고, 또 다르게는 협업이라 부르기 한다. 우리사회의 마을공동체에서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자기 집에 있는 식기를 꺼내와 팔을 걷어붙이고 모여들던 아주머니들을 상상할 수 있었고, 손님맞을 준비는 가족과 더불어 이웃사람이 함께 힘써 해결해 내는 모습이 그려졌지다. 물론 이제는 거의 볼 수 없다. 현재 이런 풍경은 특별한 것이어서 다큐멘터리나 영화속에 등장한다. 낡은 것이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사적영역에의 침범을 두려워하는 현대인의 생활상이라고 접어두자면 중대한 가치를 놓치게 됩니다. 현대인에게 이런 관계의 문제는 이웃을 경계하고, 공동체의 성원을 의심하고,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에 감정이입하여 사회를 두렵게 만들게 됩니다. 이 공동체의 든든한 지원은 인간의 삶에서 필수조건에 해당되므로, 사회적 시스템으로써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재화의 교환으로 대체된다. 돈을 주고 사야하거나 그와 유사한 거래로 변해왔다는 뜻이다. 관계방식으로 자연스럽게 해결되던 문제가 재화와 사회적 권위를 갖지 못하면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이전되었다. 이때 재화와 힘을 갖지 못한 공동체 성원이 느끼는 것이 분노와 상실감이다.
문화와 예술은 한 인간의 태생적 배경이 되어버린 계급적 습속에 근거하여 존재하는 이른바 "경험"영역에 있다. 문화는 환경이며 예술은 경험재다. 생성조건이 온전하여 자연발생하는 환경이어야 하며, 이전의 경험속에 추론한 행위라고 설명해야 가장 근사치에 닿는다. 한 개인은 물리적 독립조건을 충족시키면 정의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농축된 문화적 산물이다. 그렇기에 문화와 예술교육은 개인의 문화/예술적 성장을 중심에 두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시작된다. 하지만 사회적 분노와 상실감이 배경으로 존재하는 한, 개인의 성장에 교육이 종사할 순 없다. 안타깝다고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현재 드러나는 모습이 그렇다.

다원성이 용해된 사회를 상상하자. 모두들 자신이 우리사회를 가장 잘 들여다 보고 해석하고 있다고 강하게 믿고 있다. 그 때문인지 병리현상이나 사회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해결책을 가졌다고 내세우기 급급하다. 하지만 사회적 항상성이 어느 시점에 정상작동할 것인지 기다리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전혀 다른 관점으로는 사회는 자정능력을 가진 유기체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구경꾼을 자처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힘을 보탠적이 없으면서 정작 자신에게 고통과 사회적 소외가 가해지기 전까지는 무감각하게 반응하는 건 그리 먼곳에서 찾아야 보이는 풍경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해 낼 자신은 없다. 단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하고 있는 개인과 사회의 모습을 아주 잠깐 멈춰서 반복적 사고를 통해 성찰해야 할 기점을 놓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깝다. 오늘의 문화교육/예술교육이 이해관계에서 우위에 선 집단이 만든 변명의 수단이 되지 않길 바랄 수 밖에.

문화교육 수퍼바이저로 일하면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 지름길을 알려달라는 요구다. 참 싫다. 차곡 차곡 길을 보며 걷는 것의 가치를 설득하는 것이 꽤나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