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유희로 삼는 것을 반대한다.

ARTICLE 2023-08-06

신앙이나 종교가 이유가 아니라 그저 삶의 방식이나 철학으로써, 생명을 유희로 삼는 것을 반대한다.
타인의 유희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순 없기 때문에 사회운동이라거나 강요적 설파 따위를 하진 않는다.
어려서 바다낚시가는 걸 좋아했었다.
낚시가 즐거운 이유는 배타고 바다로 향하는 그 행위도 있지만 최종 유희는 수확량과 비례한단걸 알았다.
더구나 낚싯대를 쥐고 힘겨루기를 하는 그 순간의 짜릿함이 '너무'좋았다.
물고기를 잡아서 먹겠다는 의지는 거의 없고 그저 그 낚시가 재밌었다.
몇 번의 경험으로 내가 얼마나 낚시를 재미있어 하는지 알았다.
물고기를 죽이는 것으로 내 하루의 즐거움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어려서 꿩사냥을 따라 나섰던 기억도 있다.
사냥철이 되면 허가받은 공기총으로 꿩니아 참새를 잡았다.
낚시보다 재미있는 기억은 아니지만 그 역시 비슷했다.
절뚝이며 도망치고 있는 새를 잡으로 뛰어다니며 정복감을 만낀했다.
20대가 되어서 스키를 타러 다녔다.
한국의 90년대에 스키는 그렇게 많은 인구가 즐기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어느 여름 워크숍에 참여했는데 내가 지난 겨울 갔던 그 스키장이었고, 그 황량함에 너무 충격을 받았다.
한 계절 인간의 유희를 위해 산봉우리가 처참히 깎여 있는 모습.
그 이후 스키와 스노우보드를 타지 않는다.
골프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유희를 위해 생명을 도구로 삼는 것이 왜 문제가 아니겠는가.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연관성을 충분히 찾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손맛이 좋은 낚싯대를 개발하거나, 스키장의 마찰력을 조절하기 위해 인공제설을 한다거나
이 모든 것은 그저 유희에 그친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수 많은 유희에 대한 변명거리를 참 꼼꼼히도 준비해 놓더라.
더구나 생명이라는 말을 꺼내면 그럼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거냐는 극단적인 반응이 돌아오곤 한다.
생명이라고 말하면 그럼 네가 사는 집은 어떻게 건축되었는데? 슈퍼마켓에서 사는 음식재료는? 같은 질문으로 자신의 유희와 생존은 같은 범주에 있다는 걸 강조하더란 말이다.
아마 내가 사회운동으로 연장시키지 못하는 것은 이런 싸움에 지쳐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런것 같다.
내가 가진 기준은 자유의지를 가진 생명을 구속할 권리가 인간에게 없다는 것 정도다.
식물을 화분에 담을 때 미안함을 느끼긴 하지만 사냥과 같은 카테고리에서 죄책감을 지우지는 않게 되는 이유인것 같다.

KTX를 타고 가다보면 디스플레이를 통해 뉴스를 계속 보게 된다.
우연히 본 뉴스에서 두 인물의 사망소식.
레미 루시디라는 사람은 홍콩의 40층 건물을 오르다 추락사했다. 그는 인플루언서이고 수 많은 마천루를 정복한 스파이더맨이란다.
그의 인스타는 전 세계 건물 옥상에서 걷는 모습을 영상으로 가득하다. 건물 관리인을 속이고, 몰래 숨어들어가는 것이 당연한터라 이번 홍콩에서도 관리인이 건물 밖에서 구조요청 전부터 신고하고 따라갔던 모양이다.
잔나 삼소노바라는 사람은 말레이시아에서 아사했다. 생과일만 먹는 것으로 유명한 인플루언서다.
이미 지인들은 그녀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영상 속의 활짝웃는 그녀 모습과는 달리 걷기도 힘들어하거나 림프이상을 진단받았다고 했다.
만약.
이들에게 카메라가 없었다면 이 행동을 계속 했을까 생각해 본다.

복제의 정당성

ARTICLE 2023-05-30

엄격하게 구분하자면 동일한 예술이나 예술 행위는 없다. 디지털 시대에 원본:사본 구분이 의미 없어졌는데 무슨 소리냐고? 예술은 복제 불가능한 현존재성을 취하기 때문이다. 지금 예술행위자, 독립하여 존재하는 작품, 예술을 마주한 향유자 모두가 어느 시간과 공간에서 예술세계에 접근했는가에 따른 비가역적 상황에 가깝다. 근본적으로 예술은 복제에 대한 열망을 숨김없이 드러냈었다. 주조(鑄造)와 인쇄 등의 기술이 공격에 가깝게 예술과 한 쌍이 되었던 숨겨진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이 자본과 만나고 시장에 등장하면서 값으로 매겨지기 시작한 후, 희소와 독자성이 상품 가치화 되었을 것이라는 의심은 극단적(오죽하면 대체 불가능한 디지털 예술이 등장)이지만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예술과 예술 행위 자체의 유일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전제는 크게 변함이 없다. 이런 측면에서 문화예술교육을 바라본다면 어떤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언젠가부터 문화예술교육은 새로운 교육 방법에 목마르다. 새로운 방법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관행의 문제를 발견했거나, 풀리지 않는 사건이 발생할 때 대안이 되는 방법을 찾는 것은 긍정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결이란 겹겹이 쌓아 올린 시간과 비례할 때가 많다는 점을 간과하게 만든다. 늘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 과제는 아니라는 뜻이다. 문화예술교육에 접근을 시도하는 예술가는 우선 어떤 커리큘럼을 만들어(이 역시 창작의 연장으로)낼지 떠올리곤 한다. 커리큘럼은 문화예술교육에서 요소가 아니라 핵심이 되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행위를 한정된 매체로 전환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지면으로 옮겨 적어야 하고, 추상에 가까운 작업방식을 단어와 문장에 가두고 시간별로 배치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커리큘럼이 왜 유일무이한 것인지 강조하려 든다. 지원사업의 경우는 더 심해진다. 창의성 혹은 독창성이라는 심의 규칙 등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관용구가 되어버려서, 실제 어떤 생각을 문화예술교육으로 전환하려는 의지인지 확인하는 장치로는 기능하지 못한다. 결국 문화예술교육이 창의성과 독창성이라는 카테고리 속 어휘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면 ‘지금까지 시도되지 않은’ 혹은 ‘기존의 방식을 뛰어넘어’ 등의 표현으로 새로운 방식이란 것을 드러내려고 애쓴다. ‘늘 하던 대로’라거나 ‘수년간 이어온 작업방식 그대로’라는 문장은 찾기 힘들다. 마치 그것은 노력하지 않고 발전 없는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낙인과 같기 때문일까 싶기도 하다. 예술가가 전문성을 가진다는 것은 늘 하던 방식을 꾸준히 이어오거나, 수십 년간 자기 방식을 실험해온 결실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예술가들이 문화예술교육 장면에서는 전혀 다른 어휘를 사용해야 한다면 어색해 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의식조차 희석되어 버렸다면 절망하여 포기하겠으나, 다행인 것은 끊임없이 문제에 공감하는 예술가와 문화예술교육자가 등장한다. 예술가는 문화예술교육에서 예술행위를 교육으로 복제한다. 예술행위를 복제하고, 예술가의 태도를 복제하고, 감상과 향유의 순간을 복제하려는 욕망을 드러내야 한다. 학습자가 모방하는 과정을 즐기고, 복제의 끝에서야 내재시킨 감각을 통해 창작 동기가 발현되는 것을 기뻐한다. 마찬가지로 문화예술교육자가 되려는 예술가 역시 성장을 위해서는 문화예술교육을 수없이 복제하는 과정을 겪는다. 여전히 전제는 문화예술교육 전문성이 꾸준히 자기 방식을 반복해온 결실에 대한 복제여야 한다는 점이다. 즉, 자기 방식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이 커리큘럼이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과제가 있다. 관행처럼 여겨지는 프레임 안에서는 예술가가 이런 경험을 만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1:집단의 교육환경을 구성하는 것, 교육 시간의 비유동적 배정, 비자발적 참여 배경, 예산 규모에 따른 재료선택과 시간 편성 등등. 이미 정해진 것이 많기 때문에 예술교육을 위한 작업의 융통성은 그만큼 줄어든다. 예술가가 작업하는 방식과 거리가 생기기 시작하면 이 글에서 말하는 복제는 사라진다. 한 뼘만 강하게 표현하자면 ‘처리’하기에 더 가까워진다. 1:다(多)에서 벗어나는 환경을 만들거나, 불특정 학습자의 첫 대면으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 가장 가까운 사람을 학습자로 상정하거나, 자율성에 근거한 작업시간의 협의를 교육 장면에서 풀어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안에서 예술가의 작업을 교육으로 복제하기 시작한다면, 복제 불가능한 현존재성이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캠프여야하는 이유

ARTICLE 2023-05-16

형식_캠프여야 하는 이유

약속 혹은 규칙으로써의 시간을 제외하고 개인에게 허락되는 주관적 시간개념이 있다. 인간의 집중능력 평균시간을 근거로 수업시간을 설계한다. 물론 주의력의 시간은 그보다 훨씬 짧지만 특정 과업에 대한 집중력은 대체로 20여분을 지속시킬 수 있다. 절대 다수의 수업시간이 집중력이 흐려지는 한계 시간을 고려하여 40분에서 50분 사이에 맞추곤 한다. 같은 과업이지만 그 과업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고 있는가에 따라서는 이 시간 개념이 의미가 사라진다. 그 변수가 수 없이 많고 복잡하며 주관적이다. 오늘의 컨디션, 과업에 대한 이해 정도, 재능과의 접점, 함께 하는 사람, 과업수행의 리듬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렵다. 최소한 교육장면으로 국한 시킨다고 해도 배움이 발생하는 경로에 따라 이 주관성은 더 큰 차이가 생긴다. 흔히 문화교육/예술교육의 장면은 어떤가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다. 문화와 예술이 주도적 자기성장을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배움 현장은 형식은 자기시간을 주관화 시키려는 시도 보다 통계적 시간개념이 적용되고 있는 것을 아닐까 의심해 보자. 그렇다고 무형식의 장에 학습자를 초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탈형식성의 시도는 얼마나 진전해 있을까. 예술교육 캠프는 이런 형식에 대한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학교교육이 정해진 교과와 스케줄에 의해 약속처럼 움직여야 하고, 학교안으로 예술교육을 적용하려면 그 형식에서 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이는 관성처럼 학교 밖으로 나서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캠프로 초대되면 모임부터 해산까지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고, 그 안에서 훨씬 자유로운 주관적 시간활용을 할 수 있다.

창의랩 제주 드래프트

ARTICLE 2023-03-16

창의예술교육랩

  1. 균형_Balnacing
  • 문화예술교육이 장르를 뛰어넘기 위한 시도가 자칫 융합예술이라는 또 하나의 장르화된 개척으로 드러나는 것에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 예술과 기술은 이미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현실이라는 것은 굳이 사고를 확장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매체의 변화(또는 진화)는 이미 변수가 아니라 상수에 가깝고, 재료와 도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아티스트의 호기심 자체는 예술과 예술가의 오래된 태도다.
  • 문화예술교육이 현재를 조망 혹은 직시하기 위해서는 유행을 따르거나 매력있는 단어를 개발하는 것이 과제가 아니라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 과제가 되어야 한다.
  • 제주의 창의예술교육랩의 방향은 매끄럽고 효과성을 입증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을 우선할 것인가 거칠지만 원리를 탐구하면서 예술과 기술(+과학)의 융화를 목격하고자 하는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 2022년은 그래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을 설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이테크와 하이터치, 가상현실과 생태, 도구과 작품, 작업과 참여, 지속성과 편리 등의 균형을 기초에 두고 랩을 설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 다섯개의 프로젝트

1) 도시의 야생동물_공생에 대한 탐구생활 야생동물은 넓은 평원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연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것을 우선 떠올린다. 가축으로 우리에 가두지 않은 절대다수의 동물이 야생동물이며 당연히 인공건축과 도시설계에도 배려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도시를 건설하면서 침범한 영역에서 열악한 조건을 견뎌가면서 살아가는 야생동물은 어떻게 존재하며 그 개체와 공존할 방법이 있는 지 탐구한다.

  • 지역과 확장영역_서귀포시를 대상으로 상대적으로 덜 도시화된 곳에서 시작하여 도시 속 야생동물의 존재를 확인한다. 이후 이 작업은 퍼블릭도메인으로 접근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른 도시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매뉴얼을 공개한다.
  • 참여대상_서귀포시민 최대 10명
  • 프로젝트 공간_서귀포에서 한시적 유휴공간인 선과장을 일정기간 동안 렌트/사용가능한 공공시설의 워크숍공간 활용 병행
  • 프로젝트 내용_도시 속 야생동물을 트래킹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방식에 대한 학습과 작업을 선택한다. 열감지센서를 이용한 광학시스템을 디자인한다. 지역을 직접 탐사하며 스팟을 정한다. 비접촉열화상카메라의 원리를 이해하고 동물의 온도와 움직임에 따라 프로그램밍한 도구를 설치하고 관찰한다. 최소 50대 이상이 설치하는 것을 목표로 최소 4주간의 관찰 및 관리 시간을 두고 유지한 후 지역을 매핑한다. 온라인으로 매핑하고 공유. 야생동물이 있다면 존재를 확인하고 우리와 함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며, 야생동물을 발견하기 어렵다면 생테계의 연결에서 우리의 역할에 대한 리포트를 쓴다. 구현방식은 참여자의 관찰일지와 에세이, 참사도구 설계와 디자인, 온라인 맵.

2) 게임메이킹 온라인게임은 이미 보편적 놀이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온라인게임은 중독의 이슈와 팽팽한 대립 가운데 존재한다. 이런 가운데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끊임 없이 재편되면서 영역을 확대한다. 대중문화와 만나고, 가상공간에 세계를 구현하기 시작했다. 산업사회의 생산이라는 것과 판이하게 다르지만 이미 대한민국의 문화안에는 깊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스토리텔러가 세계관을 제시하는 수 많은 예술의 합집합을 지칭한다면 게임을 말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다.

  • 지역 및 참여대상_제주시 중고생+대학생(연령상으로는 청소년) 15명
  • 프로젝트 공간_미정 및 온라인
  • 프로젝트 내용_마인드스포츠인 게임과 일상탈출로 기능하는 게임 사이에는 사실 경계가 크게 없다. 하지만 이 두가지는 게임 소비의 측면이다. 그래서 게임메이킹이 어떻게 가능한지 분석과 설계로 다양한 게임의 이면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게임메이킹의 기초로 보드게임을 연상하기 쉽지만, 온라인게임을 구동해본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실제 자기가 느끼는 유희요소로써의 게임과 간극을 체감하고 실망하곤 한다. 이 프로젝트는 오히려 현재 기획을 마치고 본격적인 디자인에 나선 인디게임을 선별하여 교육프로그램화하는 워크숍으로 구성한다. 코드의 일부를 읽고 분석하고 구현하면서 UI/UX에 대한 실리적 판단을 하는 과정을 통해서, 게임소비자인 자신의 삶을 리포트로 재구성한다.

3) 순한곶 어린이는 어떤 놀이환경에서 창의적 발상과 행동을 하게 되는가에 대한 연구는 이미 활발하게 있어왔다. 결국 창의성이 발발하고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일상에서 반복되는 놀이경험이 축적되고 있어야 하며, 그 놀이는 프로그램화한 것이 아닌 자연상태에 가까운 자유로움으로 부터 촉발한다는 것은 증명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어린이를 위한 메이커 스페이스는 지금까지 디자인이나 기능을 특정하고 도구를 사용하도록 운영되곤 한다. 하지만 창의력의 시작점을 찾기 위해서는 재료의 무정형상태로 부터 도구를 필요로 하게 기획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콘텐트가 아니라 창의적 환경에 어린이를 노출시키는 시도가 필요하다. 이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면서 발상의 자유로움을 찾아갈 것인가가 실험과제인 셈이다. 창의적 환경에 대한 매뉴얼은 불가능하지만 요소를 찾아내는 것은 가능하다. 무정형성 재료에 대한 탐색을 어린이가 하면서, 창의성에 대한 질문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다.

-지역 및 참여대상제주시 어린이 10명+관찰기록팀 3명 -프로젝트 공간순한곶 -프로젝트 내용_프로그램을 제공하지 않고 재료가 놓여 있는 환경에 어린이를 초대한다. 재료가 무엇이 될 것인지가 이 프로젝트에서 찾고자 하는 핵심이다. 현재 어린이의 대부분 놀이에는 놀잇감과 매뉴얼이 분명하다. 하지만 놀이의 본질은 놀잇감을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주어진 놀잇감은 조립과 운용이라는 두가지 측면으로 끝나기 쉽고, 놀이를 주도하는 사람이 성인일 경우 ‘지시와 이행’이라는 구조를 벗어나기 힘들다. 이 구조를 해체하는 시도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개입을 디자인해야 한다. 이때 교육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고민해야 하며, 탈구조적 형식실험을 하는 주체로서 교육자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 역시 창의성실험에서는 중요하다.

4) 프로토콜_언어와 커뮤니케이션 문화예술교육에서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이 테마인 경우가 많다. 표현이 동반되는 작업은 결국 어떤 수사법을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인공지능, 알고리듬, 로보틱스는 이제 실생활에 밀접하게 사용하게 되는 제품 또는 통신과 날씨예측 따위의 정보와 연관된다. 이 모든 것은 언어규칙과 연산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논리학과 수학이 의사소통규칙으로 정제되는 과정을 거쳤다고도 볼 수 있다. 즉, 언어는 상호작용속에 있지만 프로토콜이 필요하다. 어린이에게는 이 프로토콜을 어떻게 알려 줄 수 있을까 고민하지만 이미 문화예술교육에서 충분히 실험하고 증명해온 결과가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본래 역할과 기능을 예술교육자들과 고민하면서, 논리적 연산에서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결합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은 겉으로 볼 때는 어린이와 흔한 연극놀이나, 의사소통게임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일 수 있다.

  • 지역 및 참여대상_제주시 어린이 20명+연구팀2명+운영팀5명
  • 프로젝트 공간_제주소통센터2층 어린이공간 (공간렌탈 협의 필요)
  • 프로젝트 내용_행동이나 동작은 넌버벌이 효과적이지만 묘사가능한 단어와 문장으로 만들 수 있다. 기호와 상징은 시각정보로 만들어낼 때가 많지만 소리로 전환했을 때 매질의 특성에 따라 전달 할 수 있는 정보가 확장된다. 하지만 이런 랭귀지와 정보는 매개하는 재료의 특징과 인식가능한 체계(다른 의미로 약속)를 기반으로 두어야 한다. 다양한 언어와 정보를 교환하는 유의미한 규칙을 찾아낸다.

5) 해킹_전파사와 철물점 하이테크는 로우테크의 기초위에 있다. 상위와 하위의 개념은 아니다. 폴리텍대학이 초기에 설립되었을 때 하이/로우테크의 균형점을 찾아내려는 시도로 읽혔던 이유다. 기술의 발전에 사람들은 편의성의 증진이라는 기대를 갖곤 하지만, 기술은 편리성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생존과 번영이라는 역할에 충실해 왔다. 산업과 만나면서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고, 자본과 만나면서 필요이상의 증식을 해온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 중심에 도구가 있다. 본격적으로 도구를 탐색하고 만날 수 있는 거점은 메이커스페이스가 아니라 부족과 필요가 만나는 생활 속 도구다. 하지만 그 도구 역시 점차 생활속에서 밀려나면서 타인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생활환경 속에 자신이 소외되었다. 가장 가까운 전파사와 철물점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 있는가.

  • 지역 및 참여대상_제주시 시민 15명
  • 프로젝트 공간_제주시 생활공간에 남아 있는 로컬 전파사와 철물점
  • 프로젝트 내용_제주의 전파사와 철물점을 파악하고 도구를 이해하기 위해 강의를 의뢰하고, 일상생활속에 주어진 것을 해킹하는 과정.

순환랩 2022 기획자의 노트

ARTICLE 2023-01-18

# 순 환 랩_2022 / 기 획 자 의 노 트

[2022년 순환랩 기획과 결과를 정리한다. 총 여섯개 랩을 기획하고 운영했다. 리빙랩+교육프로그램 R&D로 2021년과 마찬가지로 가설과 검증의 프로세스가 적용되었다. 연령과 장르를 다양화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여전히 순환랩 정도의 사업규모로는 문화예술교육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무리다. 다만, 기획의 동기와 시대를 읽어내려는 시도로는 충분히 유의미한 성취가 있다.]

김탕(순환랩 디렉터/PaperCompany_Urban큐레이터)

1. 예술과 (예술)교육을 다시 생각해 보는 시대.

예술은 현대사회에서 장르로 정의할 수 없는 복합성을 쥐고 다양성을 견지하며 다채널을 통해 수용자와 소통한다. 이중에서 디스토피아를 상상하는 예술은 미래를 제시하면서 현재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한다. 이런 면에서 예술가는 어쩌면 현재를 살며 미래를 말하는 직업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동시대의 경험을 기록하고 나누는 것 뿐 아니라, 경종을 울려야 하는 순간을 찾고 매체를 넘나드는 은유로 예술적 사유방식을 스토리화하는 것이 현대사회 예술가의 특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예술은 사실기록을 넘어선 세계에 늘 관심이 있었다. 폭력에 항거하거나 선동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인간정서를 놓치지 않았고,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사회에는 제동을 걸어왔다. 지금의 예술과 예술가 역시 사회적 역할과 기능이라는 기초에 분명 현재의 감각적 사유를 넘어선 세계에 대한 묘사와 주장이 있어야 함을 잊지 않고 활약 중이다. 기후변화와 위기의 시대는 예술과 예술가에게도 큰 영향(또는 영감)을 행사한다. 예술가의 작품세계에 등장하는 위기에 대한 메시지는 때론 공포와 좌절이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좌표를 설정하고 방향을 제시/제안하기도 한다.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이런 예술과 예술가들이 교육씬에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왜 현재를 살아가며 작품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이 교육에 들어서면 관습에 가까운 공교육프레임의 적용을 받아야 하는가. 시대를 읽고 학습하며 작업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축소하고 재료를 능숙히 다루는 기능과 표현기술, 그리고 프리젠테이션에 몰두하는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자의든 타의든 그 결정을 주도한 누군가가 있다면, 이제는 예술가의 예술과 교육에 대한 자율성을 발생시키고 예술 본래의 기능(위기에 대한 사회적 역할을 포함하여)에 대한 믿음을 강조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예술이 이념을 전수하던 시대가 지나고, 국가를 넘어선 인류가 공동체성에 대한 인식을 다시 가져야 하는 때가 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이미 많이 늦어버린지도 모른다.

2. 이슈에 민감하고, 행동에 둔감한 사회

지구위험한계선(planetary boundaries)은 2009년 스웨덴 환경학자 요한 록스트룀과 미국의 윌 스테판을 중심으로 제시, 정리한 개념이다. 기후변화, 생물권 손실, 토지사용의 변화, 담수 사용량, 생물-지구화학적 순환, 해양 산성화, 대기 중 에어로졸 농도, 성층권의 오존층 파괴, 신생물질. 이 아홉가지로 측정한다. 그런데 이미 이중 절반은 그 한계선을 넘어섰고, 연쇄반응은 말할 것도 없이 가속이 붙었다. 특히 기후와 종다양성이 가장 중요하며 모든 것의 기초에 놓여있다. 순환랩은 기후위기와 생태순환의 문제에 예술과 예술교육이 어떤 태도로 대응하고 있어야 하는지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위기를 미디어에서 제시하는 요약한 해법이나, 관찰자의 시점에서 묘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경험을 기초에 두는 연구와 실행을 중심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절대다수의 한국인은 이 위기를 인간이 발생시켰다는데 동의한다는 리서치 결과를 자주 접한다. 이는 우리나라가 기후위기나 생물권에 대한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보자. 쓰레기 발생과 처리, 자원순환에 대한 실천에도 꽤나 적극적인 것 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분리배출을 열심히 하고, 일회용품을 쓰지 말자 말한다.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의견을 보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쓰레기나 쓰레기 문제가 줄지 않는다. 생활쓰레기는 눈에 보이지만 산업쓰레기가 더 큰 문제라는 것까지는 인지 못하거나, 일회용품을 줄이는 것에 동의하지만 택배와 배달음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시말해 더 근원적인 문제에는 닿으려 굳이 노력하는 것 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자기 실천으로 충분하다는 인식을 깨기 어렵다. 연장선상에서 문화예술교육은 어떠한가. (전수조사를 한 것은 아니었기에 한계는 분명히 있지만)공개된 교육프로그램에서 기후위기나 환경문제를 다루는 예술교육의 다수가 ‘버려진’이라는 태그를 달고 등장하는 재활용품을 재료로 만들어진 작품제작이거나, 생태체험장을 중심으로 다분히 인위적인 환경에 의존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운영, 실행한 프로그램이 무가치 하다는 주장은 아니다. 문제는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의식으로 부터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학습이 병행되어야 하고, 그 실천영역에서는 더 능동성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생활쓰레기를 줄이는 실천 만큼이나 산업쓰레기를 줄여야 하는 실천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과 실천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과 같다. ‘버려진’ 꼬리표를 단 재료로 만들어진, 흔히 말하는 ‘예쁜 쓰레기’를 끝없이 생산하면서 환경문제를 말하기 어렵다. 문화예술교육의 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기후위기와 종다양성등의 문제를 학습하고 실천으로써 예술이 될 수 있도록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3. 순환랩의 기초

인간의 감각은 자연과 사회를 인지하는 방식이지만, 오히려 감각에 의존하는 것은 현상을 오해하거나 유기적 관계를 이해하는데 제한적이다. 기후변화 또는 위기의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개인의 경험으로 취한 감각정보는 지극히 한정된 인식을 만든다. 다만 그 보완으로써 미디어가 기능하며 간접경험이 정보로 처리되지만 현상에 대한 총체를 인지하는 것으로 부터 더 멀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개인이 정보와 지식을 소화해 내기 버거운 것이라면 국가 또는 정부에게 일임하는 것이 현재 우리가 사는 방식이 아닐까 한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공적 영역에서 다루는 정보에 대한 태도는 이해득실로 부터 자유로와야 하며, 교육은 그 정보와 지식의 토대위에 세워져야 한다. 문화/예술교육이 시험문제를 잘 풀고 특정한 지위 혹은 신분획득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설명할 이유는 없다. 연일 리포트되는 기후변화와 위기는 우리의 삶을 뒤바꾸고 있다. 절망을 말하기 이전에 지금 해야 하는 행동은 무엇인지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먼저다. 예술가는 이 위기에 대한 경고를 작품으로 만들어 사회에 말을 건다. 하지만 문화예술교육은 위기의 시대를 교육을 매개로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말을 걸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순환랩이다. 위기는 소재나 교보재가 아니라 주제어가 되어야 하는 시기를 살아내면서 여전히 피상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문화예술교육이 갇혀 있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틀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필요하다. WMO는 2022년 5월 업데이트 보고서를 냈다. 기후위기를 말하기 시작하면서 1.5도를 기준으로 세운 후 수 많은 석학이 참여해 분석한 결과다. ( https://hadleyserver.metoffice.gov.uk/wmolc/WMOGADCU2022-2026.pdf ) 각국 정부와 언론이 주목한 것은 여전히 다양한 가능성이었다. 상징과도 같은 ‘1.5도’는 2022년에서 2026년사이 즉, 5년내에 1.5도 상승을 절대적으로 예측하진 않았다. 하지만 냉정한 경고는 48%의 가능성이었다. 5년내에 1.5도 상승의 가능성을 48%로 예측했다. 이전 5년에 1.5도 상승의 가능성은 10%의 예측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무서운 결과가 아니라 말하기 힘들다. 식량 또는 식품의 위기는 코 앞에 다가왔다. 브라질은 가뭄으로, 콜롬비아는 폭우로 커피생산량이 급감했다. 전세계 감자생산량 2위인 인도는 폭염으로 인해 수출길이 막혔고, 온실가스와 기후변화에 따른 곡물생산은 인류의 생존문제에 대한 본격 경고가 시작되었다. (그린피스의 기후위기 식량보고서 https://www.greenpeace.org/static/planet4-korea-stateless/2022/02/5acb70fc-기후위기-식량-보고서-—-사라지는-것들의-초상-—-식량편.pdf ) 초연결시대라는 말은 디지털이나 온라인 기반의 관계망을 먼저 떠올리지만, 식량 위기의 도미노를 보면 지구인의 분업이 얼마나 촘촘한지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지금 우리는 지구 반대편 기후의 변화로 무너진 한개의 조각으로 인해 생존문제를 거론해야 한다. 식량자급률을 높이는 따위의 문제로 해결가능하지 않다. 기후는 지구전체의 초연결성이라는 대 전제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막연히 ‘인간은 기술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기대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안일한 대응을 펴고 있는 이유는 거대자본과 산업종사자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극단적인 가정을 해본다. 만약 수질오염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세탁기가 개발되어 세제를 전혀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사회가 그 기술을 쉽게 선택할 수 있을까. 전세계 수천만명의 일자리가 사라져야 하고, 그와 연관된 생산관계망이 사라질 것이 예상된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말이다. 전환의 순간이 각인되고 감각으로 위기를 이미 마주했다 해도 촘촘한 사회구조 안에서 선택은 바로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말이다. 흔히 말하는 다음세대는 앞으로 인류를 위한 생산수단을 관리 또는 분배하면서 생산력을 획득하여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 다음세대에게 생산력을 주도 할 수 있게 건네주어야 가능한 것이 생존이라는 것에 이견이 없다면 실천의 범례를 제시하거나, 객관화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방법 중 하나가 교육이라는 것은 너무 당연해서 다시 강조할 이유가 없다. 최근들어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전 세대를 통틀어 정보의 선별 능력과 해독력 저하를 사회문제라고 지적한다. 문맹이 사라진 한국에서 이른바 리터러시가 문제가 된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사회는 더욱 세분화되고 복잡해 졌기에 학습가능한 정보와 해석을 더욱 요구한다. 기후위기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싶지만, 수 없이 많은 현상과 지표를 해석하는 능력이 없다면, 누군가의 요약에 의존해야 한다. 요약은 본질을 흐리기 쉽기 때문에 위험하다. 소셜미디어와 뉴스의 헤드라인에 등장하는 기후위기에 대한 경고는 그저 막연한 공포 이상의 것이 되지 않는다. 막연하다는 것은 무엇을 할것인지 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상태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행동으로 연장하려는 개인의 시도는 누군가가 ‘이렇게 하라’는 요약본의 지시사항을 맹목적으로 따르며, 강도높은 실천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비닐쓰레기를 줄인다며 사들인 토트백과 장바구니, 1회용컵을 쓰지 말자며 집에 쌓여가는 텀블러의 숫자가 그 예다. 그 결과 비닐쓰레기가 줄지 않았고, 1회용 컵의 생산이 멈추지 못한다. 하지만 그 실천을 하는 개인은 공장을 통과한 토트백과 텀블러가 만들어내는 탄소배출에 대해서는 외면한다기 보다 상상하기 힘들 뿐이다. 이것이 리터리시의 문제다. 문화예술교육에서 기후위기와 생태계의 순환을 다루는 것은 결국 리터러시를 기반에 둔다. 행위는 문화와 예술에 범주에서 일어나지만 순환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철학을 탐구하며 행동원칙을 만들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2022년의 순환랩은 연구주제를 설정한 각 지역의 랩이 참여자(연구자, 실험주체)가 문제의 본질을 탐색하고 행동의 원칙 만들어가기 위한 예술행위와 문화행동이 무엇인지 찾아내려 한다. ### 4. 2022년의 순환랩을 정리하는 네개의 키워드

참여자의 자발적 학습구조를 만들어가는 것은 성공적이었다. 당면한 문제를 직시하고, 자료를 찾고, 토론하고, 행위를 설계하는 방식이다. 교육자가 제시하는 방식은 거의 배제하고 학습자가 스스로 발견한 문제의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순환랩에서 기후위기 리터러시가 가능하다. 순환랩의 기조를 설명하고, 참여한 아티스트가 해법을 가지고 등장하는 전달 방식이 아니라 자발적 학습과 탐구하려는 태도가 생겼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닫힌고리를 실천하는 문화예술교육은 그리 쉽지 않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생산자의 측면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을 교육프로그램으로 전환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기 보다는, 관습에 가까와진 실천방법에서 무리가 생긴다. 예술가의 경험순환이라는 면에서 닫힌고리는 가능하다. 현장에 학습자가 동행하고, 예술가가 바라보는 시점 또는 관점을 나누는 것이 경험순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자원의 측면에서 닫힌고리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내는 것은 시도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이후 순환랩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생산자와 본격적으로 만나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자원을 채취/가공하는 생산자가 아니라 가공품을 재료로 삼는 2차 3차 가공생산자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고 본다. 반면, 위기의 시대를 어떻게 살것인가를 키워드로 두고 기획하던 기호의 전환과 인간 존엄성을 담는 프로젝트는 문화교육에서 꽤 의미있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 생활속에서 과거에 이미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거나, 문화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을 추론하여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 다시쓰기(reuse) * 개인의 실천에서 소비재를 낭비하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은 세대를 이어 전해져 왔다. 반면 산업은 끝없는 소비를 부추기며 지능적인 방법으로 소비심리를 자극한다. 유행을 만드는 것은 특별한 개인이 아니라 자본과 만나야 가능하고, 적지 않는 비용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다. 어떤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소비유행이 생겼다면 그 유행이 끝나는 순간이 문제다. 이것은 취향과 무관하진 않지만, 평판관리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에 이해득실의 관계이거나, 근사한 삶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내면 소비재를 팔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다. 알고 있고 거부하고 싶더라도 그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선택권이란 없어 보이기도 하는 최면과 같다. 이는 마치 ‘당신의 소비는 당신의 선택이었고 그로인해 쿨하고 즐거운 삶이 찾아왔다’고 암시하는 것에 가깝다. 문제는 쓸 수 있는 것을 폐기하고, 그 폐기물은 고스란히 쓰레기가 된다. 이렇게 쌓여가는 폐기물이 제3세계로 일컫는 나라에서 도시를 슬럼화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산업은 쓰고 버리면 더 싸고 쉽게 구매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 고쳐쓰기 보다는 다시사는 비용이 덜 든다는 말은 흔히 시장에서 솔깃한 유혹이 된지 오래다.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며 이 문제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당연히 지적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가장 쉬운 해답은 다시쓰는 방법이다. 풀어야 하는 숙제는 평판관리에 가까운 소비를 어떻게 전환해 낼 것인가에 해당한다. 즉, 다시쓰는 것을 얼마나 멋있는 일인지 경험하는 장이 필요하다. 2022년 순환랩이 의류를 교환하고, 갤러리와 전시장의 부스를 모듈화하는 연구로 다시쓰기(reuse)에 대안을 연구 실행한 이유다.

2) 예술의 재료에 대한 탐구 예술의 재료는 어디에서 왔을까. 지금 우리가 쓰는 모든 것은 지구 어딘가에서 채취한 것이다. 하지만 채취한 후 공장을 거쳐 대량생산한 재료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 질문을 시작했다. 그림을 위해서 화방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 화방의 종이는 나무에서, 물감은 광물에서, 오일은 꽃과 씨앗에서 온다. 한장의 그림을 위해서 우리가 의존하는 각종 유기/무기물을 생각해 보면 어느 것 하나 생명의 시간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화학적 재료가 첨가되고 간소화하고 쓰기 편하게 만들어지면서 대량생산 공정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재료가 자연에서 채취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방어막 같은 것이 만들어진 셈이다. 이 연속성을 알기 시작하면 지금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함부로 사용하던 각종 재료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재료를 찾아 다니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예술가의 태도자체가 이미 예술경험으로 충분하다. 2021년 부들이야기에 이어 왕송못이 찾아내려고 한 것은 예술의 재료에 대한 탐구다. 그림책은 그 탐색과정에 대한 미디엄으로 존재하며 그 작업 역시 예술의 한 영역이지만, 가장 원시적인 방법인 관찰과 탐색, 연구와 실패의 과정을 넘어서면서 범지구적 상상력과 순환력이라는 재료를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또한 비건베이킹을 청소년과 실험하는 과정에서 생산지의 농부를 직접 만나고, 재료의 생장을 감각으로 경험하는 것 역시 재료에 대한 탐구의 영역이다.

*3) 존엄의 가치 * 분명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누군가는 긴장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호기롭게 여유를 부릴 것이 분명하다. 각자의 위치에서 그 이유는 분명히 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후문제는 재난을 목전에 둔다. 재난이 닥쳐올 때는 예고가 없다. 그래서 대처하는 방법을 찾는 것 밖에. 문화교육은 위기의 시대에 어떻게 살것인지 말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재난이란 심각한 상황에서 개인이 겪게 되는 경제적 손실 뿐 아니라 무력감과 패닉, 생존을 위한 비인간적 삶이라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존엄성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 비교적 자연재해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한반도에도 잇달아 지진과 폭우, 홍수, 가뭄등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역시 기후변화로 인한 연쇄작용이다. 재난의 상황이 오면 생존이 일순위로 거론되지만, 우리사회의 시스템은 생존위기를 갓 벗어나면, 생존을 위한 물적지원이 전부다. 정작 가장 중요한 재난앞에 놓인 사람들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패닉과 무너진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거의 없다. 순환랩에서 재난을 중심에 두고 비상배낭을 시민들과 함께 만드는 작업은 기후위기로 재난앞에 놓인 개인과 가족에게 삶의 태도를 어떻게 취하며 이 시대를 살 것인가 생각하게 만드는 것에 해당한다.

4) 소재화 플라스틱은 1907년에 벨기에의 화학자 레오 베이클라이트가 발명했다. 한마디로 가볍고 튼튼하고 변형이 쉬운 놀라운 발명이었다. 수십년 키워서 베어내 사용하는 목재보다 만들기 쉬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가공이 쉽다는 것이 가장 큰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국 왕립통계학회의 2018년 올해의 통계에 우승은 90.5라는 숫자였다. 플라스틱은 90.5%는 재활용되지 않았다는 통계숫자다.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면 분리배출이 소용없냐며 반문하고 심각하다 말 하지만, 재활용한 플라스틱으로 된 제품이 그 공정을 위해 값이 비싼 제품이 된다는 것과 구매할 의사를 표명하는 이는 흔치 않다. 즉,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경제적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전 세계의 플라스틱은 사용 후 90.5%가 폐기처분되는 통계 앞에서 재활용 플라스틱이 매력적인 소재로 전환되지 않으면 단지 비용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다음세대에게 넘겨주는 재앙이다. 순환랩에서 생산자와 결합하여 소재의 적극적인 활용도를 실험하고 디자인에 포함시키며, 그 피드백을 통해 워크숍이나 전시를 구성한 이유다.

5. 리빙랩과 교육랩

리빙랩으로써 순환랩은 조금 가벼운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참여를 지향하고, 비전문가가 탐구를 결정하는 순간으로 안내하는 집단행동이기 때문이다. 연구소나 실험실을 상상한다면 흰 가운을 입거나, 학자들이 모여서 긴 시간 집중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반면 리빙랩은 그보다는 훨씬 가볍지만 문턱없이 드나들며 현재 나의 삶과 직접 결합한 과제를 설정하기 때문에 자율성에 기반을 둔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종의 학습방법론에 가깝다. 여기에 예술가가 이 랩을 주도하지만, 연구원으로 참여한 사람들로 부터 연구방법론과 실행이 정해진다. 하지만 교육랩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즉, 문화예술교육연구다. 어디서 부터 학습의 동기를 설정할 것인지는 연구자의 몫으로 남겨두기 때문에 예술가는 이 과정에서 방향타를 쥐지만 함부로 꺾을 수 없다. 연구소 또는 실험실의 기능을 간결히 설명하자면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고, 실패를 기록하는 과정”이다. 검증한 결과를 중심에 두기 위해서는 실행과정에서 성공가능성을 타진하는 것 만큼이나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해 진다.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가설을 세우고 가능성을 향해간다. 과학이나 공학에서 운영하거나 아카데미안에 존재하는 랩을 지향하는 것이라기 보다 순환의 주제를 예술교육으로 해석하고/연구하고/실행하는 조금 다른 개념이 적용된다. 하지만 여전히 랩은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가설을 세우고 가능성을 향해가는 의미는 같다. 그래서 순환랩은 기존의 예술교육에서 교육자:학습자의 관계방식을 빗겨가며 교육행위가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도록 구조화하는 것을 제안한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교육자의 커리큘럼을 학습자에게 적용하기 보다는 학습자인 참여자는 랩의 연구원으로 결합한다. 연구원 개인 또는 소규모의 집단은 연구주제를 설정하고 순환랩안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연구결과를 내놓는 방식이다.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관계로 설정하기 보다 랩에서 공동연구원으로 참여하는 모양새를 유지하면서 문화/예술/교육이 발생하는 과정을 설계한다.

6. 2023년의 순환랩에게 넘기는 주제 또는 과제

2022년 스스로 선택한 학습방법과 리터러시, 열린고리와 닫힌고리,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문화적 태도, 쓰레기와 자원순환의 예술, 생태감수성과 생활문화를 다뤘다. 실패와 성공의 순간이 교차한다. 여전히 다룰 수 없었던 핵심적인 문제들 역시 존재하고, 교육으로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 어려운 것도 있다. 2023년 이후 순환랩은 무엇을 더 다룰 수 있을 것인가 몇 개의 제안을 한다.

1) 자원 채취 당사자의 참여 다양한 예술의 재료 혹은 마땅히 재활용, 리유즈할 수 있는 자원을 어떻게 만들어내고 있는지 정작 당사자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은 한계임에 분명하다.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자, 병뚜껑을 모아서 배낭을 만들자, 패스트패션을 리메이킹하여 입자. 이런 이야기들의 원인 속에는 산업의 경제논리가 항상 숨어있다. 쓰레기를 만드는 비용이 쓰레기를 해결하는 비용보다 더 적게 드는 이유는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자원 채취자와 생산자가 이 사업에 참여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해 보인다.

*2) 퍼포먼스 * 순환랩에서 자원이 가진 중요성이 강조되다 보니 주로 물성이 있는 랩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메시지 생산에 주력하는 퍼포먼스를 기획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고 본다. 순환이 주제어가 아니라 퍼포먼스의 구성요소를 친환경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획.

3) 에너지 대체에너지를 개발하는 것은 문화예술교육에서 다루기 힘든 것이기도 하고, 기획과 연구의 범위가 너무 넓어져서 종사자의 규모나 전문성을 확보하기 힘들다. 대체에너지 연구와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오토마타와 로보틱스의 기술이 어느정도까지 적용될 수 있고,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 사례를 연구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4) 재생공간 수년전부터 도시재생이 이슈로 떠올랐다. 하지만 도시재생지역은 재생이 되었다기 보다는 상업적 이용시설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생활공간이 재생을 거치면서 용도가 완전히 전환되었다. 잘못된 사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일상을 빼앗긴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재생의 철학이 무엇인지 되물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나 하는 아쉬움이다. 공공성을 가진 폐기 직전의 공간이나 시설을 재생하는 사업이 있다. 하지만, 재생공간이란 껍데기는 낡고 내부는 초 현대시설을 갖추어야 한다는 공식이 적용되고 있다. 어느 곳을 가봐도 마찬가지인데, 이런 의미의 재생은 그저 리모델링에 지나지 않는다. 내 외부가 자원순환의 관점을 지향하는 공간을 기획해 보는 것을 상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7. 불공평한 세계를 살아가며

우리나라의 스포츠 시설 중 골프장의 갯수는 1%라고 한다. 하지만 스포츠 시설 면적의 89%는 골프장이라는 통계를 봤을 때 깜짝 놀랐다. 골프장이나 스키장을 건설할 때 인간이 빼앗은 생태계의 불균형도 스트레스를 받는데, 소수가 차지하고 있는 토지사용에 대해서 기분이 나빴던 것 같다. 올해 프랑스의 환경단체는 골프장에 있는 홀을 시멘트로 메꿨다. 극심한 가뭄과 열돔현상을 경험하면서 세차를 제한하고, 광장의 분수를 멈추고, 수영장 사용제한을 권고했다. 하지만 골프장 잔디의 스프링클러는 제한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그 기사를 보고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막혀버린 시멘트를 깨는 사람은 저 골프장을 마음껏 이용하면서 사는 사람이 아닐텐데’ 저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는 그냥 시키고,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결국 말단 직원일 것 같았다. 어림없이 틀린 추측은 아닐 것이다. 기후위기는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며, 예술가와 문화예술교육자들이 적극 나서서 이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이 위기를 초래한 사람들이 나서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을 때 무기력이 찾아오곤 한다. 이런 이야기를 더 많은 예술가와 교육종사자와 나누고 싶다. 있는 그대로 말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ARTICLE 2022-12-28

조세희작가는 나와 육촌이다. 그리 멀지 않은 친인척인데 전혀 왕래없이 살았다.
어머니께서 전화하셔서 "세희가 죽었다는 걸 뉴스에서 봤다"고 하신다.
모든 친척이 다 가까이 지내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워낙 유명인인지라 서운했을 법 하다.
어려서 친필사인이 담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한권이 집에 꽂혀 있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으면 좋았을 테지만, 이사다니며 자연스레 사라졌다.
대학가서야 그 책을 사서 읽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려서 부터 보아왔던 책인데 그런 내용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조세희아저씨의 부고를 듣고나니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후위기시대의 예술교육/순환랩2022

ARTICLE 2022-09-11

순환랩_2022

  1. Overview_문해력(literacy)과 순환랩
  • 인간의 감각은 자연과 사회를 인지하는 방식이지만, 오히려 감각에 의존하는 것은 현상을 오해하거나 유기적 관계를 이해하는데 제한적이다. 기후변화 또는 위기의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개인의 경험으로 취한 감각정보는 지극히 한정된 인식을 만든다. 다만 그 보완으로써 미디어가 기능하며 간접경험이 정보로 처리되지만 현상에 대한 총체를 인지하는 것으로 부터 더 멀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개인이 정보와 지식을 소화해 내기 버거운 것이라면 국가 또는 정부에게 일임하는 것이 현재 우리가 사는 방식이 아닐까 한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공적 영역에서 다루는 정보에 대한 태도는 이해득실로 부터 자유로와야 하며, 교육은 그 정보와 지식의 토대위에 세워져야 한다. 문화/예술교육이 시험문제를 잘 풀고 특정한 지위 혹은 신분획득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설명할 이유는 없다. 연일 리포트되는 기후변화와 위기는 우리의 삶을 뒤바꾸고 있다. 절망을 말하기 이전에 지금 해야 하는 행동은 무엇인지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먼저다. 예술가는 이 위기에 대한 경고를 작품으로 만들어 사회에 말을 건다. 하지만 문화예술교육은 위기의 시대를 교육을 매개로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말을 걸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순환랩이다. 위기는 소재나 교보재가 아니라 주제어가 되어야 하는 시기를 살아내면서 여전히 피상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문화예술교육이 갇혀 있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틀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필요하다.
  • WMO는 2022년 5월 업데이트 보고서를 냈다. 기후위기를 말하기 시작하면서 1.5도를 기준으로 세운 후 수 많은 석학이 참여해 분석한 결과다. (https://hadleyserver.metoffice.gov.uk/wmolc/WMOGADCU2022-2026.pdf)
  • 각국 정부와 언론이 주목한 것은 여전히 다양한 가능성이었다. 상징과도 같은 ‘1.5도’는 2022년에서 2026년사이 즉, 5년내에 1.5도 상승을 절대적으로 예측하진 않았다. 하지만 냉정한 경고는 48%의 가능성이었다. 5년내에 1.5도 상승의 가능성을 48%로 예측했다. 이전 5년에 1.5도 상승의 가능성은 10%의 예측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무서운 결과가 아니라 말하기 힘들다.
  • 식량 또는 식품의 위기는 코 앞에 다가왔다. 브라질은 가뭄으로, 콜롬비아는 폭우로 커피생산량이 급감했다. 전세계 감자생산량 2위인 인도는 폭염으로 인해 수출길이 막혔고, 온실가스와 기후변화에 따른 곡물생산은 인류의 생존문제에 대한 본격 경고가 시작되었다. (그린피스의 기후위기 식량보고서 https://www.greenpeace.org/static/planet4-korea-stateless/2022/02/5acb70fc-기후위기-식량-보고서-—-사라지는-것들의-초상-—-식량편.pdf) 초연결시대라는 말은 디지털이나 온라인 기반의 관계망을 먼저 떠올리지만, 식량 위기의 도미노를 보면 지구인의 분업이 얼마나 촘촘한지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지금 우리는 지구 반대편 기후의 변화로 무너진 한개의 조각으로 인해 생존문제를 거론해야 한다. 식량자급률을 높이는 따위의 문제로 해결가능하지 않다. 기후는 지구전체의 초연결성이라는 대 전제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 막연히 ‘인간은 기술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기대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안일한 대응을 펴고 있는 이유는 거대자본과 산업종사자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극단적인 가정을 해본다. 만약 수질오염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세탁기가 개발되어 세제를 전혀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사회가 그 기술을 쉽게 선택할 수 있을까. 전세계 수천만명의 일자리가 사라져야 하고, 그와 연관된 생산관계망이 사라질 것이 예상된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말이다. 전환의 순간이 각인되고 감각으로 위기를 이미 마주했다 해도 촘촘한 사회구조 안에서 선택은 바로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말이다.
  • 흔히 말하는 다음세대는 앞으로 인류를 위한 생산수단을 관리 또는 분배하면서 생산력을 획득하여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 다음세대에게 생산력을 주도 할 수 있게 건네주어야 가능한 것이 생존이라는 것에 이견이 없다면 실천의 범례를 제시하거나, 객관화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방법 중 하나가 교육이라는 것은 너무 당연해서 다시 강조할 이유가 없다.
  • 최근들어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전 세대를 통틀어 정보의 선별 능력과 해독력 저하를 사회문제라고 지적한다. 문맹이 사라진 한국에서 이른바 리터러시가 문제가 된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사회는 더욱 세분화되고 복잡해 졌기에 학습가능한 정보와 해석을 더욱 요구한다. 기후위기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싶지만, 수 없이 많은 현상과 지표를 해석하는 능력이 없다면, 누군가의 요약에 의존해야 한다. 요약은 본질을 흐리기 쉽기 때문에 위험하다. 소셜미디어와 뉴스의 헤드라인에 등장하는 기후위기에 대한 경고는 그저 막연한 공포 이상의 것이 되지 않는다. 막연하다는 것은 무엇을 할것인지 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상태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행동으로 연장하려는 개인의 시도는 누군가가 ‘이렇게 하라’는 요약본의 지시사항을 맹목적으로 따르며, 강도높은 실천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비닐쓰레기를 줄인다며 사들인 토트백과 장바구니, 1회용컵을 쓰지 말자며 집에 쌓여가는 텀블러의 숫자가 그 예다. 그 결과 비닐쓰레기가 줄지 않았고, 1회용 컵의 생산이 멈추지 못한다. 하지만 그 실천을 하는 개인은 공장을 통과한 토트백과 텀블러가 만들어내는 탄소배출에 대해서는 외면한다기 보다 상상하기 힘들 뿐이다. 이것이 리터리시의 문제다.
  • 문화예술교육에서 기후위기와 생태계의 순환을 다루는 것은 결국 리터러시를 기반에 둔다. 행위는 문화와 예술에 범주에서 일어나지만 순환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철학을 탐구하며 행동원칙을 만들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2022년의 순환랩은 연구주제를 설정한 각 지역의 랩이 참여자(연구자, 실험주체)가 문제의 본질을 탐색하고 행동의 원칙 만들어가기 위한 예술행위와 문화행동이 무엇인지 찾아내려 한다.
  1. 순환_닫힌고리와 존엄성
  • 2021년 순환랩의 키워드는 자원/경험/지속성(회복력)이었다. 하지만 주제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사각(死角/blind spot)이 존재한다. 세가지 키워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2022년은 사각에 대한 탐색을 병행한다.
  • 19세기와 20세기는 무한할 것이라 여겼던 자원을 취하며 문명을 건설했다. 하지만 자원은 생산-소비-폐기의 선형성에 대한 위험은 이미 20세기 말에 지적되었다. 닫힌 고리는 배리 커머너의 1971년 저서 the closing cicle(국내에는 ‘원을 닫혀야 한다’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순환에도 원리와 원칙이 필요하다. 예술교육에서 닫힌고리는 거의 실천되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생산과 폐기에 집중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술가의 작품활동은 생산과 소비의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해도 예술교육은 그 소비를 폐기로 아낌없이 보내면서 에술을 설명하려한다. 예술과 예술행위, 예술교육이 이 닫힌고리 안에서 해야 하는 역할이 무엇일까가 순환랩에서 탐색해야 하는 과제다.
  • 두번째는 경험이다. 경험은 (리빙)랩이라는 형식이 주는 특성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문화작업자나 예술가가 주도하지만 그 랩에 참여하면서 스스로 연구주제를 설정하고, 현장의 경험을 나눈다. 기존 예술교육의 방법론이 마치 학교교육의 커리큘럼을 모방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연구방식과 실천과정을 랩으로 가지고 들어온다는 것은 공동경험을 디자인하는 방법으로 최선에 가깝다. 그로인해 경험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형식실험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열어두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연령의 경험과 탈형식에 대해 충분히 열려 있어야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문화작업자나 예술가의 경험을 순환하면서 동시에 처음 경험하는 참여자의 신선한 시각(또는 초심자의 실수와 오류)이 경험으로 남는 것이 과제다.
  • 마지막으로 존엄성에 대한 키워드다. 순환랩에서 등장하는 존엄의 키워드란 무엇일까 연상하기 힘들다.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면,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지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인간 개인은 모두가 존엄성을 인정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은 관념이다.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반면 위기의 순간이 오면 우리는 그 존엄에 대한 모든 것을 집단의 이익을 위해 희생해야 마땅한 것이라고 태도를 바꾼다. 그리고 경중(輕重)이나 우위(優位)를 중심에 두고 행동한다.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집단이 내려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도 전 집단 무의식이나 본능이라고 포장된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 전쟁이나 재난의 상황에서 이 존엄의 문제는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기후위기의 시대는 인간이 유발한 자연의 대답이다. 우리가 예측가능한 위기상황에서 존엄성에 대한 탐색이야 말로 가장 현실적이고 절실하게 받아들여 생각해야 할 과제다.
  1. Lab/랩
  • 랩은 연구소 또는 실험실이다. 본격 연구나 실험을 하는 랩을 지향하는 것이라기 보다 순환의 주제를 예술교육으로 해석하고/연구하고/실행하는 조금 다른 개념이 적용된다. 하지만 랩은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가설을 세우고 가능성을 향해가는 의미는 같다. 그래서 순환랩은 기존의 예술교육에서 교육자:학습자의 관계방식을 빗겨가며 교육행위가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도록 구조화하는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교육’이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상호관계에서만 ‘배움’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경험의 영역으로 확대하려는 형식실험을 병행한다. 교육자의 커리큘럼을 학습자에게 적용하기 보다는 학습자인 참여자는 랩의 연구원으로 결합한다. 연구원 개인 또는 소규모의 집단은 연구주제를 설정하고 순환랩안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연구결과를 내놓는 방식이다.
  • 순환랩은 총 6개의 랩으로 운영한다. 주제와 형식과 참여방식, 최종 퍼포먼스 형태가 모두 상이하기 때문에 같은 프레임으로 적용할 이유가 사라진다. 각 랩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인원수와 미팅방식등이 따로 정해지면 된다.
  1. 6개의 순환랩(순서는 랜덤)_섭외중

  2. 다시입다

  • 개요 : 생산은 이미 진행되었다. 옷장에는 옷이 가득하지만 내 몸은 하나다. 미니멀리스트를 꿈꾸라는 뜻이 아니라 필요이상의 소비는 이미 만연하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의미다.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이상이거나 마케팅의 대상이어서 거둬들인 수 많은 옷은 이미 쓰임을 다하지 못한채로 수명이 다해간다. 해법은 재활용이라기 보다는 교환으로 언어를 치환한다면 어떨까. 그 교환이 문화적 태도에서 오는 파티라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면 어떤 메시지를 사회에 던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서 시작한다.
  • 작가 : 다시입다.
  • 지역 : 서울
  • 참여대상 : 시민, 청년

2) 에이팟 코리아

  • 개요 : 재난은 가까이 있다. 건조한 기후와 가뭄은 산불을 막을 수 없이 번지게 한다. 지진과 해일은 먼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람들에 구호의 손길이 이어진다. 구호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여전히 누구도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기후위기의 시대, 자연재앙으로 부터 자유롭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문화와 예술은 이 재난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연구할 시기가 되었다.
  • 작가 : 에이팟 코리아
  • 지역 : 경주
  • 참여대상 : 전 연령대의 참여자 대상

3) 스튜디오 에어(Studio aier)

  • 개요 :
  • 스튜디오 에어의 랩1. 예술을 프리젠테이션하는 수 십만 가지의 방법이 존재한다. 하지만 가장 익숙한 것은 여전히 전시, 상연(上演)등이다. 어쩌면 익숙한 것이라기 보다 효율성에 근거를 두고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는 작품에 최적화된 전시장과 공연장등을 새로 만들고 폐기한다. 이곳에서 순환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가능한 버전은 무엇인지 찾아보자.
  • 스튜디오 에어의 랩2. 가구를 디자인하고 판매하는 사람들이 소재로서 자연물을 다루는 방식과 태도가 있다. 오랜 시간동안 인류의 역사에서 대화를 여는 장, 휴식의 시작, 편의성의 상징이 된 것이 가구다. 인간활동의 공간에 가구가 빠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더구나 나무는 매우 친밀한 소재다. 그런데 생산자 혹은 창작자의 입장에서 제로웨이스트를 결정하는 것은 경제적 측면에서는 그리 이롭지 않다. 누구나 한번쯤은 상상해 봄직하지만 그 실천행위의 맵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스튜디오 에어의 창작에서 자투리가 된 나무폐기물이 어떻게 사용될 소재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연구와 실천으로 시작한다.
  • 작가 : 김용현(스튜디오 에어)
  • 지역 : 파주/서울
  • 참여대상 : 예술가, 기획자, 시민, 청년

4) 저스트 프로젝트

  • 개요 : 업사이클링으로 대표되는 대안 역시 소비는 소비다. 소비를 나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필요를 넘어서는 소비에서 세인의 관심은 지출가능한 자금이 전부라면 문제가 된다. 가진자의 과소비는 우리사회 뿐 아니라 많은 문화권에서도 지탄의 대상이 되곤 한다. 어느순간 업사이클링 제품은 현명하고 건강한 소비라는 꼬리표를 달고 등장했고, 필요이상의 과소비에도 품목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작업하면서 소재연구에 관심을 가져왔던 저스트 프로젝트는 순환랩에서 소재와 재료의 치환과정을 통해서 지금의 소비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할 기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지금 소비하고 있는 것이 건강하고 현명한 소비인가. 친환경 재료라는 것이 환경에 도움이 되는가 인간의 소비에 도움이 되는가. 이런 질문을 기초로 물질의 세계에 대한 탐구와 실험으로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 작가 : 열매
  • 지역 : 서울
  • 참여대상 : 시민과 생산자

5) 왕송못

  • 개요 : 2021년 순환랩을 통해서 왕송못에 모였던 시민과 예술가 그룹이 있다. 왕송못의 생태연구와 예술이라는 큰 그림에서 작업을 시작했고 완료란 없는 연속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각 참여자들이 ‘순환’을 주제로 하는 연구와 작업을 개별 프로젝트로 나눠서 운영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시민 또는 지역의 예술가가 자신의 네트워크로 새롭게 구성해서 지역사회내에 어떤 영향력을 가진 사람인지 스스로 검증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작업방식을 새로 제안해서 지역안에 자리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 작가 : 박찬응 외 10명
  • 지역 : 의왕시, 안산시, 안양시, 군포시 등
  • 참여대상 : 시민

6) 홀썸

  • 개요 : 인간의 기호(嗜好)는 다양하다. 현대사회에서 기호 또는 선호 등은 자신감과 연결되어 있으며 문화코드로 인식한다. 하지만 통제된 사회에서 기호는 다양성을 잃는다. 이런 전제로 볼 때 채식은 선택적 기호인가. 어떤 의미에서 이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 가까와 진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직면한 기후위기와 환경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아동과 청소년은 부모 혹은 보호자의 선택에 의해 식문화가 결정되지만 성장하면서 기호를 확장한다. 확장의 근거는 역시 최초의 선택에서 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 시작점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선택이 아닐 수 있는 식문화에 대한 긍적적 경험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 지 연구하고 시도하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과제라 할 수 있다.
  • 작가 : 켈리
  • 지역 : 서울
  • 참여대상 : 청소년
  1. 사업시기
  • 7월-8월 / 랩의 주제 설정 및 형식 결정. 랩구성원 모집
  • 8월말에서 9월 / 런칭
  • 런칭 시기에 따라 시작 후 11월 종료.
  • 12월 / 각 랩별 리포트 작성 및 제출(리포트 방식이나 형식은 개별화할 예정)
  • 운영사무국(달토끼 프로젝트)이 결합하고 있으며, 랩별로 달토끼 프로젝트와 개별계약 및 예산 집행 협의.
  1. 참고
  • 2021년 순환랩 https://www.artecirculab.net

리더십과 연기

ARTICLE 2022-08-11

식물을 키우면서 그 동안 알고 있다고 착각한 '자연스러움'에 대해 한 수 배운다. 50년을 넘게 살면서 식물을 제대로 키워 본 적이 없었다. 선물 받은 화분은 항상 테라스 한켠에서 말라갔다. 너무 삭막한 집안 환경을 조금이라도 좋게 만들기 위해서 식물을 장식했을 뿐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식물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집에서는 휴식을 취하고 싶을 뿐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던 시기에 식물은 구경의 대상이었을 뿐이지 생명으로 대하지 않았다. 재택의 시간이 많아지자 식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한 생명력을 확인하는 순간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화분 밖으로 나온 잎이 식물의 전체가 아니라 뿌리가 있다는 그 당연한 이치를 그 동안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흙을 손으로 만지는 것이 자연스러워 졌을 때 부터는 식물의 크기가 뿌리를 포함한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했다. 결국 식물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은 흙과 미생물, 물과 바람, 빛과 온도. 써놓고 나면 복잡하지만, 실제로 인간이 가장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생각해 보면 비슷하다. 볕이 잘드는 집에 환기를 자주 하면서 쾌적한 습도를 조절하는 것은 내 컨디션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였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만약 자연환경에서 지금 키우는 식물들이 산다면 어떤 조건일까 생각하면서 조건을 만들면 성장과 번식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화분이라는 공간 제약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적잖은 폭력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생명윤리에 대한 나의 기준과 원칙에서 타협이 크게 힘들진 않았다. 온실을 만들어 열대식물을 가두지 않는다거나, 내가 보기 좋은 수형을 잡기 위해 철사를 동원하여 인위적인 모습으로 만들어간다거나 하는 그런 행위는 하지 않기로 한다. 시들어 가지만 생명의 순환을 볼 수 있다면 수 개월에서 수 년을 기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자연스러움은 없다. 수 많은 미생물과 섞여서 살아가고, 공생의 조건을 만들어 뿌리를 내리고 잎을 퍼뜨리고, 꽃과 열매로 번식을 하지 못한다. 결국은 내 타협점에 셀 수 없이 많은 오류와 모순이 생기는 것.

자연스럽다는 것은 나에겐 매우 중요한 삶의 원칙임에 분명하다. 자기존중감을 갖기 위해 연기를 하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 특히 좋은 리더 연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역겹다. 그냥 표현이 아니라 정말 토하기 직접까지의 감각이 느껴진다. 이 역한 느낌이 무엇일까 고민의 결론은 부자연스러움이다. 꽤 많은 곳에서 보이지만 적절한 선에서 무시하거나 피한다. 아마도 스스로가 가장 부끄러워야 마땅하겠지만 간혹 메소드연기를 하는 사람들은 거침없다. 맞서지 않고 피하는 이유다. 좋은 리더는 흔하디 흔한 언행일치를 기준으로 삼아야 가능하다. 리더 연기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 뱉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말에 대한 책임감을 어필 또는 주장한다. 행동이 아니라 말로 때우는 것. 그게 리더 연기자의 가장 역겨운 모습인데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바로 드러난다. 자기만 모르는 천박한 인식은 동화속 벌거벗은 임금과 같다. 연기로 해결할 수 없다면 자연스럽게 무식함이 들통나거나, 술수가 드러나 거짓해명을 하는 경우가 생기게 마련이다. 늘 조심하곤 있지만 가끔 피하다가도 만나면 참 기분이 더럽다.

기회

ARTICLE 2022-04-29

자연농법을 말하는 사람은 농작물에서 잎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을 그냥 두라고 말한다. 흙에서 돌을 골라내면 땅 속의 습기를 만들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섞여 있어야 한다. 농작물의 잎이 누렇게 변하면 잎을 따서 다른 잎과 농작물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결국 땅에서 미생물은 살아남지 못한다. 결과는 뻔하다. 땅이 죽는다. 그래서 사람이 만든 비료를 섞어 미생물을 주입한다. 하지만 그건 한계가 있다. 자연스러운 순환은 자신이 떨굴 잎이 쌓여서 습기가 보존되고, 바람이 말리고, 비에 젖고 썩는 과정이 반복하길 기다린다. 그래서 땅이 살아 있다. 그 모든 순환의 고리를 인간이 끊고, 원하는 것만 취하면서 얻는 건 눈앞의 수확물이다.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두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소수의 인간과 소수의 집단이 그런 선택을 했다. 그래서 얻은 결과는 참혹하다. 대량생산이 불가능해져서 배고픔을 견디는 것 보다는 나았을 상황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지금이야 풍성한 농작물과 그에 따른 가축의 살을 먹을 수 있으니 배부른 소리라는 의견 역시 일리가 있다. 하지만 21세기 인간이 만들어낸 기후위기와 식량난을 마주하고서는 생각이 달라질 수 밖에. 균형을 깨고, 적당함을 무시한 결과다. 충분함을 모르던 인간의 물욕과 얼켜버린 생태계의 불균형을 초래하고도 아직 그 과잉생산과 대륙간 비대칭소비에 대한 철저한 후회는 재화와 권력을 독점한 자본가와 그 주변에서 기생하는 자들에겐 들리지 않는다. 과연 기회는 있을까?

Telegram

ARTICLE 2022-03-31

카카오톡이 보안에 취약 할 뿐더러, 검열가능하고 검사의 종이 한장이면 프라이버시를 탈탈 털어간다는 기사가 나오자 사람들은 우수수 카카오톡에서 텔레그램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이때 내 텔레그램은 엄청 정신 없었다. 내 주소록에 있는 사람들이 계속 가입했다는 정보가 알려왔다. 피곤해서 알람을 해제해야 했다. 그러면 메시지가 텔레그램으로 왔는가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그냥 카카오톡이 싫다며 잠시 사용을 접어둔 것 같다. 두 세달 지나자 시들해진다. 그러다 한동안 뉴스에 도배되었던 박사방이 텔레그램 메신저를 이용해서 벌였던 참기힘들 정도의 범죄가 있었다. 그때 내 텔레그램은 또 난리였다. 알람을 없애야 했다. 이번에 텔레그램 탈퇴 메시지가 계속 떴다. 참 피곤했다. 사람들 왜 이러나 싶기도 했고.
VK(브콘닥테)는 러시아의 소셜미디어다. 2012년 VK는 러시아의 정보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하자, 개발자(둘이 형제다)들은 텔레그램을 만들며 정보검열과 프라이버시 침해로 부터 프리할 것을 약속하며 새로 시작했다. 비영리로 운영되기에 창업자의 철학과 의지가 꺾이지 않는 한에서는 가장 믿음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난 박사방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이러니 하게도 오히려 텔레그램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웃지못할 일이 생겼다. 우리가 얻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반드시 잃는 것이 있다는 그 단순한 원리 같은 걸 다시 느꼈다고나 할까.
2022년 우크라이나 국민은 텔레그램으로 소통하며 정보를 교류한다. 가장 안전하고 범용적이며 대중적으로도 사용가능한 소통창구이기 때문이다. 팔랑귀 국민들이 텔레그램 욕하는 사이, 가장 안전한 의사소통을 기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테크는 진화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무엇을 응원하고, 어떤 의사소통을 희망하고 있는지 문득 의문이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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