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

ARTICLE 2022-04-29

자연농법을 말하는 사람은 농작물에서 잎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을 그냥 두라고 말한다. 흙에서 돌을 골라내면 땅 속의 습기를 만들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섞여 있어야 한다. 농작물의 잎이 누렇게 변하면 잎을 따서 다른 잎과 농작물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결국 땅에서 미생물은 살아남지 못한다. 결과는 뻔하다. 땅이 죽는다. 그래서 사람이 만든 비료를 섞어 미생물을 주입한다. 하지만 그건 한계가 있다. 자연스러운 순환은 자신이 떨굴 잎이 쌓여서 습기가 보존되고, 바람이 말리고, 비에 젖고 썩는 과정이 반복하길 기다린다. 그래서 땅이 살아 있다. 그 모든 순환의 고리를 인간이 끊고, 원하는 것만 취하면서 얻는 건 눈앞의 수확물이다.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두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소수의 인간과 소수의 집단이 그런 선택을 했다. 그래서 얻은 결과는 참혹하다. 대량생산이 불가능해져서 배고픔을 견디는 것 보다는 나았을 상황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지금이야 풍성한 농작물과 그에 따른 가축의 살을 먹을 수 있으니 배부른 소리라는 의견 역시 일리가 있다. 하지만 21세기 인간이 만들어낸 기후위기와 식량난을 마주하고서는 생각이 달라질 수 밖에. 균형을 깨고, 적당함을 무시한 결과다. 충분함을 모르던 인간의 물욕과 얼켜버린 생태계의 불균형을 초래하고도 아직 그 과잉생산과 대륙간 비대칭소비에 대한 철저한 후회는 재화와 권력을 독점한 자본가와 그 주변에서 기생하는 자들에겐 들리지 않는다. 과연 기회는 있을까?

Telegram

ARTICLE 2022-03-31

카카오톡이 보안에 취약 할 뿐더러, 검열가능하고 검사의 종이 한장이면 프라이버시를 탈탈 털어간다는 기사가 나오자 사람들은 우수수 카카오톡에서 텔레그램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이때 내 텔레그램은 엄청 정신 없었다. 내 주소록에 있는 사람들이 계속 가입했다는 정보가 알려왔다. 피곤해서 알람을 해제해야 했다. 그러면 메시지가 텔레그램으로 왔는가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그냥 카카오톡이 싫다며 잠시 사용을 접어둔 것 같다. 두 세달 지나자 시들해진다. 그러다 한동안 뉴스에 도배되었던 박사방이 텔레그램 메신저를 이용해서 벌였던 참기힘들 정도의 범죄가 있었다. 그때 내 텔레그램은 또 난리였다. 알람을 없애야 했다. 이번에 텔레그램 탈퇴 메시지가 계속 떴다. 참 피곤했다. 사람들 왜 이러나 싶기도 했고.
VK(브콘닥테)는 러시아의 소셜미디어다. 2012년 VK는 러시아의 정보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하자, 개발자(둘이 형제다)들은 텔레그램을 만들며 정보검열과 프라이버시 침해로 부터 프리할 것을 약속하며 새로 시작했다. 비영리로 운영되기에 창업자의 철학과 의지가 꺾이지 않는 한에서는 가장 믿음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난 박사방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이러니 하게도 오히려 텔레그램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웃지못할 일이 생겼다. 우리가 얻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반드시 잃는 것이 있다는 그 단순한 원리 같은 걸 다시 느꼈다고나 할까.
2022년 우크라이나 국민은 텔레그램으로 소통하며 정보를 교류한다. 가장 안전하고 범용적이며 대중적으로도 사용가능한 소통창구이기 때문이다. 팔랑귀 국민들이 텔레그램 욕하는 사이, 가장 안전한 의사소통을 기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테크는 진화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무엇을 응원하고, 어떤 의사소통을 희망하고 있는지 문득 의문이 들곤 한다.

핵발전소

ARTICLE 2022-03-14

퍼스널트레이닝을 받은 적이 있는가. 나는 크리넥스 티슈에 가까운 얇다란 팔랑귀인 탓에 건강상식은 끝없이 이리 저리 기울고, 몸 움직이는건 싫으니 영양제 몇 알 복용해서 건강해지겠다는 얄팍함을 잘 알고 있는지라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자율이 멈추는 자리에는 신뢰할 만한 타자의 강제가 간혹 필요하다. 그런데 트레이닝 센터를 찾는 사람 중 거의 절반은 체중감량을 목표로 삼는다. 트레이너와 대화하다보면 답이 분명하지만 지켜지지 않는 사례도 있고, 의지와 노력으로 감량에 성공한 사례도 있단다. 감량은 건강 때문일 때도 있지만 꽤 많은 사람은 원하는 몸의 모양새가 있다. 이런 대화속에 트레이너의 잊지 못할 한마디가 있었다. 감량을 말하는 사람들이 계획을 세우면서 무엇을 안먹을까에 대한 생각보다, 무엇을 먹을까에 대한 고민이 더 꽉차있다는 것. 지금까지의 식생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대부분은 과식/정크푸드/단순당섭취다. 더구나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과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 욕구를 잠재우는 것은 진짜 힘든 일이지만 감량을 위해서는 필수다. 감량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면 즐겨먹는 음식을 포기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탄수화물과 단순당을 포함하는 각종 간식의 유혹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먹겠다는 의지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시작이 틀렸다는 트레이너의 지적은 매우 직설적이지만 옳은 말이다. 뭘 먹지라는 생각이 먼저가 아니다. 무엇을 포기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것인가에 대표적인 사례가 체중조절(다이어트)에서 감량하는 방법이다.

언론사의 보도 건수도 별로 없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6공화국 문재인대통령 재임기간 탈원전정책에 대한 비난이 쏟아진다. 특히 핵물리학 또는 공학 관련 학계와 학생들은 자신들의 돈벌이 수단이니 말할 것도 없다. 1970년대말에 핵발전소가 가동되었으니, 지금 이들은 원자력 일손으로는 2세대에 해당한다. 1세대가 기술력을 들여와 실험과 시행가능성을 보았다면 2세대는 생계와 직결되어 있다. 이 모든 주장에서 논쟁의 끝에는 "현재" 필요한 에너지 생산에서 "현재" 기후위기와 직결되지 않는 청정성은 핵이 가지고 있다는 것 두가지로 요약된다. 이것이 위기를 대하는 태도다. 위기는 생존문제다. 더구나 지금 세대가 아니라 다음세대의 생존문제를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 현재 필요한 에너지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가 논쟁의 쟁점이 되지 않는다. 첫째로 불편을 감수하는 것은 위기에 대한 댓가(cost)다. 무엇을 먹을것인가의 다이어트가 아니라 지금까지 무엇을 먹었지만 어떻게 안먹어야 하는지 생각해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둘째로 다음세대에게 남겨주는 짐이 너무 큰 위험을 포함하고 있다. 즉, 안전문제다. 대한해협 건너 사는 이웃나라는 안전하다고 자신했다. 과연 우리는 그들만큼이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는가. 최소한 나는 의심한다. 강남에 지은 백화점이 무너지고 대형선박은 수학여행가는 학생들과 함께 가라앉았다. 안전을 약속하며 공식 사용허가를 낸 가습기 살균제는 아기의 폐로 들어가 후천적 장애를 일으켰다. 무딘 안전의식을 가진 몇 명의 문제라고? 개인인 자본가의 욕심이 불러온 화였다고 잘라 말할 수 있을까? 이리(지금의 익산)역 폭발이며 성수대교는 어떻게 무너졌나. 한 세기에 한번씩 핵발전소의 핵폐기물을 교체관리해야 하고, 10만년간 위험이 잠재하는 위협적 쓰레기를 관리할 능력은 있는가. 지금 세대에서는 가장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라고 말하는 것이 백번 양보해서 옳은 이야기라 해도, 우리는 다음세대에게 이 위협을 유산이랍시고 남겨주는 것에 동의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고준위핵폐기물

ARTICLE 2022-03-11

원자력.더 정확하게는 핵인데 공포스러우니 원자력이란 말을 쓰는 듯 하다.
탈핵은 물건너가고 원전은 고치고 새로 지어 쓰게 되었다.
노심용융의 무서움을 우리는 수 많은 사고에서 경험했고, 지금도 후쿠시마의 방사능물질을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고준위핵폐기물은 100,000년간 안전하게 가두어야한다.
그런데 안전하게 가두는 기술은 아직 인간에게 없다. 임시저장소는 100년정도 쓸 수 있다. 언제 인간이 핵연료를 가둘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쓰고 다음세대의 기술발전을 믿지고 하는거다.
진화의 관점으로도 우리는 핵발전소를 중단하는게 옳다.
번식(?)을 가로막는 중요한 위험요소이니 말이다.
후쿠시마의 핵 오염수는 일본 정부의 공식발표가 일일 1200톤으로 발표했다.
믿을 순 없지만 최소 오염수가 나오는 양.
아직도 무엇이 중요한가. 생존을 위협 받는 것 보다 더 위급한 것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를 낳아 키우라니.

배꼽시계

ARTICLE 2022-02-24

싱겁다. 뜨겁다. 시원하다. 화끈하다. 맵다. 마렵다. 이 표현은 살면서 매 순간 떠오르는 단어이자 경험이다. 이런 경험은 감정과 연결된다. 결국 감정보다 앞선 물리적 경험인 셈이다. ‘감 잡았다’는 표현을 들어본 적 있지 않나? 이 감은 한자로 感. 영어로는 sense. 우리말로는 느낀다는 의미다. 느끼고 깨닫는 다는 뜻의 감각은 생각보다 인간에게는 외부세계와의 연결에서 거의 절대기능이다. 감각은 경험으로 쌓여 자기에게 득이 되는 감정을 만들어야 한다. 왜곡될 경우 감각을 통해 트라우마가 되기도 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 않은가. 그럼 생각해 보자. 우리는 감각경험을 어떻게, 무엇으로, 누구와 함께 쌓아가고 있는가에 따라 외부세계를 인식하고 자기화하는 시도를 통해 성장한다. 감각경험이 좁아질 수록 보다 강렬한 자극에 민감해지고, 극적인 경험만을 추구하게 되는 경향이 생긴다. 강한 자극은 경험의 민감도를 떨어뜨리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게 만든다. 다른 말로 왠만해서는 무감각하다고 받아들이게 되면서 일상의 경험이 소외된다. 방법은 감각을 깨우는 능동성을 찾아가는 것.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사회의 청소년이 살아가면서 자기의 자유로운 시도로 감각경험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예술이 청소년에게 필요한 이유는 역시 감각의 영역을 넓혀가는 긍정적 경험이다. 결국 창작을 시도하거나 창작경험에 참여하는 것은 다양한 재료를 감각하고, 타인의 세계를 을 배우며 또 다른 세계와 연결을 시도하는 사건을 만드는 것. 이런 일련의 사건을 축적시키면서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인지의 영역이 확장되고, 미래의 삶을 성찰 할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은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인간은 정오가 되면 배가 고파야 하나? 집단에 속해 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각이 무뎌진다. 정작 자기의 감각과 패턴을 무시한다. 배꼽시계라는 표현. 개인마다 에너지를 사용한 정도가 다르니 감각하는 허기는 제각기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본인에게 가장 정확한 시계는 배꼽시계다. 감각에 대한 얘기다. 가장 정확한 시계는 무시하고 집단이 정해놓은 시계에 따라 행동할 수 밖엔 없는 것이 큰 문제라고 보진 않는다. 다만 배꼽시계의 감각경험을 휩쓸려 살며 무시하는 동안 우리가 잃게 될 ‘감_感’에 대해 한번은 생각해 보자.

예술교육의 커리큘럼

ARTICLE 2022-01-20

예술교육의 대량생산 공정
근대 이전의 교육은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를 중심에 두는 비공식 교육이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특별한 기준이 있기 보다는 삶의 지혜나 생존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전하는 것이 주된 목적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하다. 공동체에서 교육의 기능은 다음세대로 이어지기 위한 생존법칙에 대한 전수다. 체계를 갖춘 교육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자를 읽고 쓰는 것 부터, 철학서와 경전을 통해 지식을 배우는 순서와 지향을 담은 교육이 있었다. 다만 모두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고 계층의 한계가 존재했다. 이후 가정과 지역공동체는 교육을 학교 또는 공공의 제도에게 넘겼다. 한정된 정보와 지식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작은 공동체와는 다르게 보편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그래서 교육은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수라는 판단이 공교육 또는 근대 이후 학교교육으로 옮겨 온다. 다시 생각해 보면 학교의 위상과 권위가 높아진 정서에 한 몫을 한 것은, 먹고 사는 기술을 가르치던 가정과 지역사회의 교육기능이 옮겨 가면서 학교가 한 개인을 먹고살게 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정리하자면 결국 교육내용의 대량생산을 향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래서 최대의 효율을 뿜어내기 위해서 학교는 건물이 되고, 교육내용을 체계화한 커리큘럼과 그 내용을 전달하는 교사가 필요해졌다. 이 구조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예술과 예술교육이 대입되었기 때문에 생긴다. (이 글에서 공교육 안에 존재하는 예술교육을 거론하진 않는다. 자칫 이 문제의 본질을 흐리기도 하거니와, 다양한 대안이 학교에서도 나오고 있기 때문) 물론, 예술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것인지 보다 우리사회에서 예술과 예술교육이 적용범위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대량생산을 위해서는 기준을 정하고 달성할 목표를 산정한다. 그리고 목표를 달성했는지 여부에 따라 수치화된다. 공교육은 시험문제를 잘 푸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유다. 이 과정을 통과했다는 증명을 위해서라면 계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흔히 말하는 성적이다. 여기에 예술을 대입해 보자. 예술은 예술가의 행위라고 좁혀서 설명할 수 있다. 더구나 예술가는 창작과정에서 배운다. 창작과 창작품의 완성도는 정의하기 어렵고 기준을 말하기 쉽지 않다. 당연히 운필(運筆)등의 기능에 대한 설명은 아니다. 즉, 학교교육 또는 공교육에서 행하는 달성가능한 목표에 대응하는 방법이 주관에 의존한다.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의 안목이 작용한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아니다. 사회교육으로써 예술교육이 공공성을 기초로 공공기관 중심으로 실행되다 보니 학교교육의 형식을 차용(이라고 쓰고 흉내라고 읽고 싶다)했다. 마치 당연한 것 처럼 예술가가 교육으로 작업범위를 확장하려할 때 공공연히 요구되는 것이 예술교육의 커리큘럼이다. 그리고 또 당연한 것처럼 이 커리큘럼에는 예술가의 작업보다 무엇을 배울 수 있으며, 어디까지 달성 하려는 것인지 목표를 기술한다. 자연스럽게(?) 공적 영역의 예술교육 장면에서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예술교육을 바라보게 한다. 창작과정에서 일어나는 예술의 영감과 동기는 계량화하기 힘들고 여간해서는 단어와 문장이 담긴 문서로 정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공공성을 가진 예술교육은 예술가의 작업에서 확장하는 것이 아닌 대량생산 안에서 시들어간다.

예술교육 커리큘럼은 예술가의 창작이어야 한다
경험재인 예술은 오랜 시간을 통해 전수되고 계승되어 왔다. 이는 예술가의 경험 순환을 의미한다. 우리사회에는 수 많은 예술가가 살고 있고, 작품활동을 이어간다. 때로는 개인이기도 하고, 협업을 강조하는 집단이기도 하다. 이런 이합집산의 이유는 작품을 창작하는 데 수단으로 작동한다. 작품 또는 작업방식을 경험한 개인과 집단은 그 과정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생긴다. 이 욕구에 부응 하려는 의지를 가진 예술가가 있다면 예술교육이 시작된다. 이때 시간을 써야 하고 비용이 발생한다. 예술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넘어서야 하는 허들이다. 필요하다면 도구를 구비해야 하고, 예술가를 찾아야 하고, 요구가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예술교육이 공공의 영역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은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안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여러가지 방법 중 하나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제도와 사업을 만드는 것. 그것이 한 나라가 해야하는 일이며 풀어내는 방식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정한다. 여기까지는 매우 합리적 선택이며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그러나 본격 사업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위에서 언급한 방법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예술가 개인 혹은 단체에게 예술교육을 실행할 수 있는 지원 또는 보조를 위해서는 배분과 배포의 공정성이 화두가 되고, 그 기준이 되는 것이 예술교육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 실효성을 증명해 내는 일이다. 지난 수 십년간 예술교육을 지향하며 사는 예술가가 꾸준히 늘어났다. 이들은 예술가의 경험을 자기 예술세계와 창작과정을 통해 전수 하려 노력한다. 예술가로서 알게 되었던 탐미성을 작품으로 설득하고 싶기도 하고, 완성과 실패에서 느끼게 되는 통쾌한 감정을 나누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지원사업등에 접속하는 순간 모든 언어가 평평해 진다. 1차시…2차시…로 묘사하고, 도입과 전개를 거론하며, 매 시간별 계획과 기대효과를 쓴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단어의 조합으로는 지원사업 심의에 통과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극 가능한 코드를 설정하거나 번듯한 결과를 예측하게 써내려가야 한다. 커리큘럼 자체가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따르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절대다수의 공공기관은 hwp에 채워넣아야 하는 기획서 양식을 준다. 예술가가 아니라 행정가의 편의 맞춰야 한다. 교육기획. 특히 예술교육의 기획은 예술성 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예술가에게 자신의 포트폴리오나 작품을 설명해 달라고 할 때 볼 수 있는 재현방식과 태도는 사라진다. 이미 이 형식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다른 상상을 하기 힘들 정도다. 간혹 기획서 양식이나 RFP(제안요청서)가 없이 사업이 실행되는 자율성이 강조되는 사업을 하다보면 예술가와 예술교육자들은 정해진 틀이 왜 없는지 묻거나, 진짜 없는 것인지 재차 확인한다. 예술교육의 커리큘럼은 창의성이란 찾아보기 힘들다면 우리가 예술교육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할 시간이 되었다.

순환랩_기획자의 노트

ARTICLE 2022-01-03

[2021년 순환랩 기획과 결과를 정리한다. 사업시작이 9월이니 2021년이라는 표현이 다소 민망하다. 총 일곱개의 지역과 단체가 랩을 기획하고 운영했다. 성과나 가능성은 각 팀의 리포트로 정리되지만 기획을 총괄한 입장에서 이 리포트를 남기는 것은 필요해 보여서 몇자 적는다.]

김탕(순환랩 디렉터/PaperCompany_Urban큐레이터)

1. 위기에 대한 태도와 대응.

문화교육이나 예술교육이 무엇으로 정의되고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위기의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어떤 각성이 있어야 하는지,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지 지도(地圖) 또는 항로(航路)를 그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순환랩은 독도법 또는 항법이다. 위기를 정의하고 전방위 대응책을 만들고 완벽한 그림을 그리려는 시도를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뭐라도 하자는 식의 대책없이 덤벼드는 것은 무모한 시도다. 즉, 그 어떤 극단의 선택이 지금의 기후위기와 환경문제등을 해결하는데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부질 없다는 뜻이다. 순환랩을 기획하면서 가장 섬세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 있었다. 필요이상의 것을 소비하면서 생산성(특히 부가가치)을 말하던 시대의 종말을 선언해야 하는데 산업과 자본의 메카니즘에서 크게 벗어나야 한다거나, 쓰레기가 쌓여가는 것을 강조하면서 재활용아이디어가 마치 결정적 대안인 것 처럼 포장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막상 순환랩의 시작을 위해 학습하는 과정에서는 비난 받아 마땅한 시스템 투성이에다, 각국 정부는 서로 책임을 미루거나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국제사회의 정치질(!)이 난무했다. 원인이 분명하고 대책을 마련하기에도 부족한 시간과 자원은 수십년간 미루고 방치하다 현재에 다다른다. 자원고갈과 기후위기가 체감할 만큼 앞에 다가오자 친환경 정책은 국제사회 정치, 사회, 산업등의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과잉소비를 부추기는 산업과 자본의 태생적 한계를 가지면서도, 환경/사회/거버넌스라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지표를 드러내는데 급급하다. 또한 각종 비영리 캠페인과 교육은 이 위기시대의 구체적인 정보와 지식을 전하고 삶의 대안을 만들기 보다, 이른바 ‘소소한 실천’을 강조하는 것은 실수에 가까운 판단이라 생각되기 시작했다. 문화예술교육 역시 이 위기의 시대와 철학이 담긴 행위로써 예술과 교육을 제안할 것인가에 관심이 생기는 것은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된다.

2. 다음세대에게 환경문제와 위기는

2019년 UN기후행동정상회의에서 스웨덴의 16세 청소년 그레타 툰베리의 연설은 과감하다. “당신들은 빈말로 내 꿈과 어린시절을 빼앗았다.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나”라고 소리쳤다. 각국 정상이 지속가능한 경제에 대해서 떠들고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우위를 선점하려고 싸우는 동안 다음세대에게 전한 재앙에 대한 질타였다. 지금의 위기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감을 포함한다. 이 공포는 다음세대 뿐 아니라 당장 우리 눈 앞에 놓여진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인 기존 질서와 맞서야 하는 행동으로 치환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사회의 아동/청소년은 행동주체로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힘들다. 제도교육의 관성이 그러하고, 산업에 가까운 사교육시스템이 강고하다. 여전히 초유의 관심사가 입시의 관문을 통과해야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는 강력한 힘이 작동한다. 그래서 바로 앞에 놓인 재편되는 세계에 대응할 능력과 기술로 부터 동떨어져 있다. 지금 시작해도 늑장대응이 될 생태와 환경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실험의 장에 청소년은 항상 뒷전에 있다. 온실가스 배출. 화석연료의 사용. 에너지전환시나리오. 탈탄소화관점. 이런 키워드를 이 위기를 만든 세대들의 손에 맡겨 놓기에는 불안해야 마땅하고 행동으로 전환해야 하는 때다. 청소년은 내일의 주인공이라는 언어는 이제 낡았다. 내일은 관념이지만 오늘은 현실이며 ‘나’를 직시하게 만든다. 청소년정책과 사업은 마치 청소년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던 시대가 전환되는 이유도 그와 유사하다.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앞에 놓인 해결과제 또는 현재의 삶에 대해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시기가 이미 찾아왔다. 1992년 UNFCCC(UN기후변화기본협약)은 지구온난화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각국 정부의 행동을 촉구하며 시작했다. 선행연구가 밝혀낸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심각성은 세계적으로 이미 30년전부터 발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구온도는 이미 상승이 가속화되고 있는 현재를 만난다. 정치/경제적으로 얽혀 있는 세계의 무역과 시장은 더 많은 생산량을 선점하려고 했을 뿐 실효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감각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생태계의 깨져버린 링크와 인류의 생존문제가 그 어떤 위기보다 최상위가 되었다. 불특정다수의 대중에게 전하는 미디어는 여과한 정보로 위기를 순화시켜 왔다. 대중적 공포를 조장하며 패닉이 만들어지는 것이 옳지 않다는 판단이었지만, 2021년 현재를 살아가면서 더는 숨길 수 없어질 만큼 기후-환경-생태계의 순환고리가 회복사이클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정보로 노출된다.

3. 순환(circulation) 또는 회복(resilience)

‘00의 시대’라는 말은 때론 거창하게 들린다. 전환이 화두로 등장하면서 이념과 구조가 바뀌는 변화의 시대를 말했고, 기술과 과학이 산업의 키워드로 등장하면서 빅데이터가 구조적 변화를 가져올 때는 데이터 테크놀로지 시대가 도래한다고 들떠서 말한다. 다행히도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등장하는 단어의 조합은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인류문명이 산업자본과 결합하면서 환경은 급격히 황폐화의 가속이 붙었다. 우리는 또 다른 시대를 맞이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어감의 시대다. 기후위기시대나 에너지고갈시대가 그렇다. 변화가 아니라 위기이며, 부족이 아니라 고갈이다. 분명 누군가는 이런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은 정치적 도구로 사용 중이라 말할 것이며, 인간의 기술은 여전히 대안을 찾아낼테니 기다리라 말할 것이다. 하지만 다수의 과학자가 건조하고 냉소적으로 이 상황을 전하고 있으며 체감할 정도의 변화를 목격하는 이 시대에 예술과 예술교육은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해야 한다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예술일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역사에서 때론 강렬한 영감을 주기도 했지만, 영적 소통이나 신앙의 증거로 종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통찰의 시선으로 사회에 말을 걸며 날카로운 비판을 상징과 은유의 코드로 풀어냈다. 지금 우리시대의 예술은 그래서 지구의 재앙에 대한 경고를 담기도 하고 인식의 프레임을 전환하려 노력한다. 생태와 환경에 대한 주제의식이 예술의 한 영역이나 장르로 파고들기 보다, 이 시대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예술가의 작업은 선언이 되기도 하고 액티비즘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한다. 예술교육은 이 시대에 무엇을 할 것인가. 순환랩에서 지칭하는 순환은 크게 세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1) 자원의 순환. 남김없이 사용하기 보다 필요에 대응하며, 자원은 어떻게 순환하는지 살펴보면서 이 시대의 예술교육 지향점을 찾는다. 2) 예술가의 경험순환. 인간은 문화를 전수한다. 경험이 순환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특정한 기술의 노하우등을 말하기 보다 예술가는 어떤 경험을 공동체에 전하고 있으며, 그 메시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구성원에게 공유할 가치를 탐색한다. 3) 회복(탄력)가능한 순환. 흔히 지속가능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이때 누가 지속할 것인가에 대한 주체를 모호하게 설정하면 곤란하다. 예술교육이 지구력과 회복력을 가지기 위해서 어떤 태도로 작업할 것인지 실천 연구와 실행을 병행해야 하는 시기다.

4. 순환랩을 정리하는 세개의 주제_재료/이치/과잉생산

1) 재료 또는 도구

예술에서 재료는 필수요소에 가깝다. 물론 개념미술이나 도구사용 없이 행위나 관념으로 구성하는 예술과 예술행위가 있다. 모든 예술에서 재료와 도구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재료는 예술행위를 시작하게 하는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재료의 선택과정에서 예술가의 작품자체가 변화하기도 한다. 재료를 구성/조합/배열/재구조하는 사람이 예술가다. 다시말해 재료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예술가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성격을 만들어내기 힘들어진다. 재료는 예술의 본질을 찾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원석의 가치는 그리 높지 않지만 세공을 거치면 가치가 올라간다. 사람의 손을 거쳐 가치를 만들어간다. 예술가에게 재료는 세공과정과 같다. 하지만 재료의 본질을 탐구하기 보다는 주어진 재료를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특히 문화예술교육은 그러하다. 재료는 이미 주어진 것이며, 공장에서 만들어졌고, 유통망을 타고 언제든 손에 넣는다. 이 재료가 무엇이었기에 내 손에 있는 것인지 역사를 생각해 볼 겨를 없이 창작에 바로 돌입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말한다. 창작을 하기 위한 준비 혹은 창작 자체에 흥미를 가지기 바론 전 단계는 재료에 대한 탐색을 하는 예술가의 행위를 교육과정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더구나 문화예술교육의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학습자에게 재료 탐색은 커녕 선택의 권한을 주는 사례를 찾아보기도 힘들다. 교육자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교육이 이미 관성처럼 준비된 재료에다 도구사용을 통해 재단되고 조립 또는 조절 가능한 것이 있을 때 창작에 몰입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라는 공식이 마련되어서 그렇다. 순환랩에서는 재료란 무엇인지 추적하는 과정을 경험한다. 이미 재료를 탐색하는 것 자체로도 만물은 연결되고 순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적하고 창작을 위한 재료를 생산해 낸다면 그 안에서 창작할 때 낭비하기란 쉽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재료를 만든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창작과정이며, 대량생산을 통한 무분별한 소비로 만들어진 예술과 예술교육에 대한 회의감이 들게 된다. 순환랩의 거스르는 예술과 부들이야기는 재료에 대한 본격 탐구로 부터 모든 작업을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재료는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이해하는 것과 채취하는 모든 과정을 경험해야 한다. 어떤 관점으로는 문화예술교육이 이 시대의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일종의 솔루션이기도 하다.

2)이치(理致)의 경험

이치(理致)나 인과(因果)는 단지 관념으로 끝낼 경우 실천으로 연결하기 어렵다. 사고방식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 어떤 논리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의사소통의 방식이 달라지고, 인간관계의 질이 결정된다. 이치는 우리의 사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바로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지구상의 모든 물질이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고 연결되어 있다는 이치를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으나 실천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것은 행동이 매개해야 가능하다. 그래서 경험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순환 가능한 것은 이치와 인과를 말이미지등으로 배우고 알아채는 것 만으로는 행동하기 쉽지 않다. 가장 쉬운 예로 사람이 만들어내고 있는 쓰레기다. 쓰레기의 절대다수는 인간의 편의를 위한 수단이다. 불편을 각오하면 쓰레기란 절대다수가 순환하는 자원이 된다. 필요이상의 소유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낭비다. 하지만 우리는 필요이상을 뛰어넘는 소유로 권위나 인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알고 있지만 행동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그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다. 그 이유는 이치와 인과를 감각할 수 있는 경험의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예술교육에서 경험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행위중심, 현장중심, 과정중심이라는 표현이 심심찮게 들리는 것을 보면 예술가의 경험으로 부터 교육프로그램이 탄생했다. 그런데 예술이 경험하게 하는 창의적 발상이나 미학적 탐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을 뿐, 그 원리와 배경에 대한 호기심은 부족하다. 이 역시 편의성이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타인의 기술과 작업방식 위에 자신의 발상을 얹어 놓는 것을 창작이라고 강조했기 때문일것이다. 순환랩에서 운영한 불로 움직이는 체스나 세종수목원의 폴리네이터 가든의 작업은 이런 이치와 인과의 경험이다. 불로 움직이는 체스에서 제작한 스털링엔진(stirling engine)은 열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꾸는 동력기관이다. 원리를 글과 그림으로 보았을 때, 그리고 열역학법칙을 수식으로 계산해 내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하지만 실제 피스톤의 동작을 보는데 까지 수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듭한다. 이것은 만들어본 경험이 없는 이에게는 단순한 원리지만, 작동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물리법칙을 체감하면서 인간 문명 전반을 다시 보게 되는 순간을 맞는다. 기술의 역사에 관심이 생기고, 그저 스쳐지나가던 세상의 모든 장치에 대한 관점이 바뀐다. 키네틱 아트를 교육 프로그램으로 만든다면 패키지로 만든 키트로 창작품에 초점이 되는 것에 대한 성찰을 하게 만든다. 폴리네이터 가드닝 역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순환의 관점을 포착할 수 있다. 식물이 꽃을 피우고 씨를 뿌리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수정(受精)은 알고 있다. 이 수정은 곤충의 역할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떤 곤충이 언제 어떻게 움직이고 있으며 우리가 서식지를 파괴한 덕분에 충분한 개체수를 만들지 못한다. 자연환경에서 벌이 사라지고 있는 기이한 현상을 인간이 설명하려고 아직도 노력중이지만, 눈앞에서 줄어들고 있는 결정적 이유는 식물의 수정매개가 되는 곤충이 충분히 먹고 살 땅이 줄어든 결과다. 인과는 이미 파악했다. 그렇게 손 놓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절멸을 지켜보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폴리네이터 가드닝은 그 실천행위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경험한 자는 정확히 해낼 수 있고, 효과적이다. 순환고리를 경험하면서 그 생태계를 이해하고 행동으로 실천한다.

3) 여전히 과제로 남는 과잉생산물

순환랩을 기획하면서 피하고 싶었던 것이 몇 가지 있다. 정크아트가 맨 앞줄에 놓이는 것을 경계했다. 환경과 생태문제, 기후위기등을 이야기 하면서 쓰레기와 재활용에 대한 이슈를 피할 순 없다. 더구나 정크아트는 그 행위주체인 예술가에게는 매우 중요한 재료를 의미있게 사용하고 사회에 문제의식을 제안한다. 그래서 예술가의 행위 자체에는 적극 찬성하고, 멋지고 감동적인 메시지를 응원하곤 했다. 다만, 정크아트를 교육프로그램으로 차용한 절대다수의 내용이 순환가능한 자원을 쓸 수 없는 자원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충분히 재활용가능한 쓰레기에 접착제를 이용해 붙여서 만든 소품이나, 재활용 직전의 쓰레기를 쓸고 오려서 잉여쓰레기를 생산해 낸다. 쓰레기를 매력있는 소재와 재료로 탐구하는 작업은 거의 없고 오직 쓰레기가 사용되는 것이 절대다수의 프로그램이었다. 쓸 수 있는 자원을 쓸 수 없는 폐기물로 만드는 과정에서 교육자와 학습자가 순환을 이야기하긴 매우 어렵다. 소비를 최소화 하는 것이나, 효율적 생산공정을 개발해야 하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지만 편의성 앞에서 멈추고 만다. 결국 시스템을 전환하는 것에 기대를 걸어야 하는 것은 분명해졌다. 이런 복합문제를 끊임없이 수면위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체감하는 문제를 어떻게 문화예술교육이 건강하게 해석하고 구현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과잉생산물에 대한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기에 유쾌한 실천행위를 디자인하고 있는 피스 오브 피스의 서울아까워캠프와 제주의 재주도 좋아팀이 운영한 물살이 구조대, 남김없이는 이에 대응하고 있는 기획이다. 서울아까워캠프는 분명 쓸 수 있는 버린 물건의 쓸모를 발견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한국의 모습은 고쳐쓰기 보다는 새로 사는 것이 비용면에서 더 이득으로 느껴진다. 수명을 다했다기 보다는 지겨워서 버리고, 고치는 비용에 조금 더 보태면 새것을 쓸 수 있다는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고치는 행위는 적극적인 삶의 행보에 해당하는데 그러기에 우리사회 현대인의 삶은 그만한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운 사회환경과 문화에서 살아간다. 무엇을 하며 살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 어떤 소비를 하며 사는것이 쾌적한가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피스 오브 피스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실천을 하는 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프로젝트를 가볍고 유쾌하게 푼다. 노래를 만들고 단체율동을 하며 거리 퍼포먼스에 나선다. 참여자는 퍼포먼스에서 버려진 각종 쓰레기를 생활 속 오브제로 재해석하고, 디자인을 생각하고, 가구나 도구의 쓰임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캠페인을 벌인다. 그 행동이 마치 축제 같기도 하고, 놀이 같기도 하지만 여운의 깊이는 만만치 않다. 물살이 구조대는 제주의 바다에서 다양한 생태와 환경교육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참여자가 어린이라는 이유로 문제의식을 우회적으로 순화시킬 필요가 없다. 직면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비건이 되는 것을 목표로 두기보다 어린이에게 비건음식을 소개하고 함께 나눠 먹는다. 바다의 쓰레기를 직접 확인하는 시간이 충분하기에 모든 행동에서 쓰레기를 만드는 것에 민감성이 높아진다. 자연스럽게 행동에 동기를 스스로 찾아낸다. 재주도 좋아 팀의 여러가지 작업 방식 중에 바다 쓰레기가 작품이 되는 과정이 있듯, 어린이의 표현방식을 찾는다. 연마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쓰레기를 만들지 않기 위한 노력의 결과는 작품이 최소화되고, 쓰임이 가능하도록 전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는것이 이번 프로젝트에서 드러나는 강점이자 결과였다. 남김없이는 한정된 패브릭으로 한 벌의 옷을 만든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새로운 방법론을 개발하려고 힘쓰기 보다 이미 연구되고 있는 패턴으로 가능성을 찾는다. 초기 기획 당시는 옷을 만드는 사람들이 남김없이 모든 것을 쓰는 도전의 느낌이었다. 하지만 도전은 딜레마가 있다. 자투리천을 만들지 않기 위해 수 많은 자투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런데 이미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제로웨이스트 패턴을 개발중이었다면, 공유된 지식과 자원을 최대한 끌어오는 것이 훨씬 상식적인 실천이다. 그리고 옷을 만들어낸다. 패턴은 가구조립이나 전자제품의 매뉴얼과는 큰 차이가 있다. 패브릭은 나라마다 상이하고, 두께나 직조형태에 따라 동일한 구조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개발되고 있는 제로웨이스트 패턴을 적용했을 때 갖는 한계와 범용성을 찾아보는 과정에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작업경험에 대한 대화가 오고간다. 복식문화에 대한 교육이나 워크숍을 이 팀의 방식으로 풀어가는 것은 꽤 멋진 범례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된다.

5. Lab/랩

순환랩은 하나의 랩을 론칭하고 이 사업의 연속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2021년의 순환랩에서 2022년으로 이어진다면 숙제가 남은 팀이어야 한다. 즉, 프로젝트다. 프로젝트는 시작과 끝이 있다. 프로젝트는 그래서 가능한 것을 실험하는 일종의 도전의식을 포함한다. 순환랩이 다양한 작업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학습과 연구, 실험을 병행하면서 프로젝트의 종료와 새로운 프로젝트의 시작이 유연하게 교차하는 것이 필요하다. 연구소 또는 실험실의 기능을 간결히 설명하자면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고, 실패를 기록하는 과정”이다. 검증한 결과를 중심에 두기 위해서는 실행과정에서 성공가능성을 타진하는 것 만큼이나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해 진다.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가설을 세우고 가능성을 향해간다. 과학이나 공학에서 운영하거나 아카데미안에 존재하는 랩을 지향하는 것이라기 보다 순환의 주제를 예술교육으로 해석하고/연구하고/실행하는 조금 다른 개념이 적용된다. 하지만 여전히 랩은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가설을 세우고 가능성을 향해가는 의미는 같다. 그래서 순환랩은 기존의 예술교육에서 교육자:학습자의 관계방식을 빗겨가며 교육행위가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도록 구조화하는 것을 제안한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교육자의 커리큘럼을 학습자에게 적용하기 보다는 학습자인 참여자는 랩의 연구원으로 결합한다. 연구원 개인 또는 소규모의 집단은 연구주제를 설정하고 순환랩안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연구결과를 내놓는 방식이다.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관계로 설정하기 보다 랩에서 공동연구원으로 참여하는 모양새를 유지하면서 문화/예술/교육이 발생하는 과정을 설계한다.

6. 2022년의 순환랩에게 넘기는 주제 또는 과제

자원의 순환과 복원, 예술가의 경험 순환, 지속가능성에 대한 탐구는 순환랩을 운영하는 철학이자 태도다. 입체로 구상하지만 여전히 평면이고, 다양성을 포함하지만 대세를 따른다. 역설과 모순이 반복되는 느낌이다. 그렇다 해도 이 시도는 유효와 시대의 필요를 포함한다. 2022년의 순환랩은 그래서 자율랩의 형식이 유지되는 것을 전제로 다음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 자연재해
생존방법은 어느 관점으로 생각하는가에 따라 매우 다르게 해석한다. 시간을 일년단위로 놓았을 때와 만년단위로 놓았을 때는 확실히 다른 것 처럼. 우리에게 선명하게 각인되는 것은 자연재해의 목격이다. 인류 또는 문명이 만든 재해가 아니더라도 환경의 변화에 의해 생존가능성 생각해 보면서 환경문제와 기후위기등의 재해를 해석하며 학습할 수 있다. 경주와 포항의 지진으로 인해 지역 활동가들은 재난대비 매뉴얼을 제작 배포했다. 문화예술교육이 재난대비 매뉴얼에 접근해 보는 것도 그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2) 산업폐기물
아무리 꼭 필요한 생산을 하려해도 그 공정에서 탈락하는 폐기물 또는 부산물은 반드시 존재한다. 이윤을 만들어가야 하는 기업에게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방법이 있을지 연구와 실험이 필요하다. 이 대응으로 구조화된 놀이감을 비구조화하는 실험을 하는 팀이 있다. ZA_ONE이라는 팀이고, 현재 비영리스타트업으로 등록해서 활동을 시작하려는 중. 공장에서 발생하는 산업폐기물을 또 다른 제작과정을 최소화하여 구조화된 매뉴얼놀이에서 어린이를 해방(?)시키려는 시도다.

3) 에너지생산
대체에너지를 개발하는 것은 문화예술교육에서 다루기 힘든 것이기도 하고, 기획과 연구의 범위가 너무 넓어져서 종사자의 규모나 전문성을 확보하기 힘들다. 간혹 적정기술로 소개하긴 하지만 적정기술에 접근하려다 오히려 자원과 인력낭비를 만드는 사례나 자본획득의 미끼로 삼는 일이 늘어나다 보니 윤리문제로 비화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는 모잠비크등의 나라에 설치했던 플레이펌프가 있다. 결국 이슈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자본을 끌어다 쓰고는 버려지는 결과가 되었고, 빛 좋은 개살구라는 평가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아이디어가 수용력을 발휘하기 까지 생각하기 보다 실행을 앞세우다 보니 생긴 결과다. 그래서 이런 전철을 밟는 것 보다 대체에너지 연구와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솔라셀(태양열집열판)을 생산하고 운영하는 기업의 연구소와 협업하는 것을 제안하고 싶다. 한국기업으로는 한화의 큐셀이 있다.

4) 식/의/주
문화예술교육에서 식/의/주를 공격적으로 다루는 것은 순환랩의 철학과 닮아 있다. 공격적으로 다룬다는 의미는 그 본질을 탐구하겠다는 의지를 말한다. 쓸 수 있는 자원이 한계가 있을 때는 부족함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쓸 수 있는 자원 탕진(?)을 목전에 둔 지금은 차원이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 즉, 생존의 방법에 대한 것이다. 생존을 위해 먹고,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고, 안전을 위해 집이 필요하다. 채취, 보관, 가공, 적응등이 키워드가 될 것이다.

7. 인류는 당분간 지구에서…

칼 세이건은 저서인 <창백한 푸른 점 The Pale blue dot>에서 이런 표현을 썼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지구는 생명을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우리 인류가 이주를 할 수 있는 행성은 없습니다. 잠깐 방문을 할 수 있는 행성은 있겠지만,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아직 없습니다. 좋든 싫든 인류는 당분간 지구에서 버텨야 합니다. 천문학을 공부하면 겸손해지고, 인격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인류가 느끼는 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멀리서 보여주는 이 사진입니다. 제게 이 사진은 우리가 서로를 더 배려해야 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삶의 터전인 저 창백한 푸른 점을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대한 강조입니다.”
가장 와 닿는 표현은 당분간 지구에서 버텨야 한다는 것. 1990년 보이저1호가 보내온 지구의 모습은 창백한 푸른 점이었고,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버텨야 하는 땅과 물과 하늘을 아주 빠른 속도로 ‘버틸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문화/예술/교육은 풍요 또는 여분 위에 자리를 만드는 것에 익숙해 있다. 이 리포트에도 반복하며 강조했지만 안다고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관점이 생겼다고 해서 그 실천을 하는 것 역시 아니다. 문화예술교육이 어째서 풍요로운가 반문한다면 지금 이 위기의 시대를 위기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라는 의문은 가져 볼 만하지 않을까. 그래서 뻔한 강조라고 해도 다시 할 수 밖에 없는 것. 풍요와 여분이 아니라 부족과 한계 위에서 이 시대의 문화예술교육을 위치시키는 도발(挑發)에 가까운 시도가 필요해졌다.

링키

ARTICLE 2021-12-28

현대 제로원의 요청으로 기고한 글. 링키라는 키네틱 토이인데 상당히 흥미롭다. 단순한데 충분하다. 대부분 교육용으로 만들어진 패키지는 과잉친절로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링키는 그런 점에서 좀 좋았다. 대박났으면 좋겠는데...하는 생각이 반, 한국에 부모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과잉을 선택해야 팔리나 하는 생각이 반이었다. 아무튼 응원.


LINKKI, a kinetic toy

김탕(PaperCompany_Urban 큐레이터)

귀신이 무서운가. 만약 무섭다면 그 감각의 실체는 무엇일까. 깜짝놀라는 것이나 패닉이 아니라면 무서움은 일종의 심상이다. 그럼 질문을 바꿀 수 있다. 귀신을 봤기 때문에 무서운 것일까 귀신이 나올까봐 무서운 것일까? 절대다수에 가까운 사람들의 이유는 후자에 해당한다. 인간은 ‘모르는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물론 알게되었을 때 더 무서워지는 경우도 있겠으나, 그 공포의 질감은 확연히 구별 할 수 있다. 대상을 인지하는 것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고, 이는 내가 알고 있다는 것에 의해 안전 또는 안정감을 얻는다. 그래서 대상을 예측 가능한 범위에 두고 내가 직접 취급(handling)하려는 욕구 안에는 ‘알고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이 자리한다.

LINKKI는 모듈로 구성된 창작도구다. 도구는 어떤 시기에 특별히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표준을 따른다. 수동 또는 전동 드라이버는 판매하는 거의 모든 나사에 들어 맞아야 한다. 효율적이어야 하기 때문이고, 자원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함이다. 이런 표준은 온라인에서도 그러하며 도시계획도 적용된다. 누구나 접근 가능하도록 디자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반면 창작도구는 성격이 다르다. 기초가 되는 도구 적용은 표준을 따르지만 오히려 결핍과 부족을 디자인하는 것이 상상력을 더 자극하는 법이다. 필요가 생산해 내는 상상력에 가깝다. 더구나 교육을 위한 창작도구를 구상한다면 가용자원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거나,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확장해 나갈 것인지 몰입하는 경험 영역을 디자인하는 것이 관건이라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링키에 주목하자. 영,유아기를 벗어난 어린이는 크다/작다에 대한 인지로 부터 통제가능성을 찾는다. 오브제와 도구의 활용이 손안에서 시작하고 팔 둘레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능한 범위안에 위치하면서 통제의 안정감을 찾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단지 어린이 만에 해당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노작(hands on)은 작업 및 교육의 시작단계에서 스케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작동한다. LINKKI의 구성을 보면서 노작과 움직임이 어떻게 결합하는지 살펴보게 된다. LINKKI는 크게 조립/해체/움직임의 순서로 창작과정에 개입한다. 첫째는 조립이다. 기준이 되는 프레임이 있기 때문에 조립가능하다. 매뉴얼에 따라 기초 디자인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다. 조립은 창작의 기준점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조립을 통해서 획득한 결과가 완벽하거나 근사한 작업이어서는 안된다. 디자이너의 의도 역시 그에 주목한다. 그래서 키트Kit라는 표현이 조심스럽고 꺼려진다. 하나의 키트는 최종 목적지가 정해져 있다. 그 과정은 키트의 제작자에게는 의미 있는 학습이 가능하지만 키트 사용자는 완성한 제품을 가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LINKKI가 키트가 아닌 이유는 조립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작업의 ‘방향’을 가리킨다. 어떤 움직임이 가능할 것인지, 오브제가 수직운동으로 전환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이며 원리가 무엇인지 찾아가야 한다. 두번째로 선택적 해체다.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이 노작과 결합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으라면 단연 해체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LINKKI는 복잡한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해체가 어느정도 생략될 수 있다. 굳이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재조립 정도로 대체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균일 크기로 배열한 펀칭보드에 다른 오브제와 부속물(parts)이 결합될 수 있도록 탈착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유효하다. 셋째로 움직임이다. 어떤 의미에서 LINKKI의 목표와도 같다. 하지만 움직임은 스토리를 동반한다. 왜 움직여야 하는지 이유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움직이기 때문에 생성되는 스토리가 보드위에 전개되어야 한다. 이는 LINKKI가 워크숍을 통과하면서 교육도구로써 즐거운 접점이 된다. 스토리는 동일한 재료와 도구에 의미를 덧입힌다. 그리고 단 하나 밖에 없는 작품이 된다. 자기표현을 위한 도구라고 과하게 포장할 필요까지는 없다. 이미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개인의 경험이며 표현이다. 단지 무엇을 매개로 하는가에 따라 전달하는 메시지가 풍부해 진다.

LINKKI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스토리의 능동협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워크숍에서 개별창작품이 개별 스토리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하나의 스토리로 구성을 하거나 동시에 작동하는 연결된 구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장 큰 강점은 역시 가볍고 간단하지만 움직임의 원리만 이해하면 얼마든지 결합가능한 구조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자동화를 시도하는 것 역시 매력있는 요소 중 하나다. 블럭코딩으로 마이크로비트를 이용하거나, 학교 앞 문방구에서 구입가능한 모터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LINKKI를 사용하게 될 대상이 아동/청소년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들에게 가장 익숙하나 응용력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던 도구를 배우며 적용해 가는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단계로 호기심의 방향이 정해지면 더 복잡한 방법과 도구를 탐색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키네틱이나 로보틱스등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자연현상과 물리법칙을 알게된 인간이 문명과 문화에 어떤 영향을 주고 받고 있는지 아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노작과 STE(A)M이 갑자기 화두가 된 것은 아닌 것과 흡사하다. 이미 우리는 문명과 예술이 어떤 경로로 지금 현재 이 자리에 놓여지고 있는지 성찰하는 가운데 이런 작업을 소개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현재 우리사회는 교육 방법론이 넘치고 재료와 키트, 매뉴얼이 흔하다. 아동/청소년이 무엇을 배우고 알게 되는지 보다 그들의 보호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광고카피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다시 귀신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아는 것은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이다. 우리는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면 모르기 때문에 궁금하고 두렵기 때문에 알아내려는 의지가 생긴다. 결정적 포인트는 결국 완성가능한 경험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불완전한 요소를 어떻게 노출 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창작을 위한 호기심과 모르는 것을 알게되는 과정에서 오는 몰입과 희열의 경험, 표현을 위한 매체 선택의 경험이 열리고 있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OK, Computed

ARTICLE 2021-12-27

드림아트랩의 2021년을 마치며 기고한 글


서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발견된 돌멩이는 규칙을 품고 있었다. 셈을 위해 돌멩이를 이리 저리 옮겨가며 효율적으로 표시하려 했다. 그 셈을 위한 규칙은 장치가 되고 표준을 정하며 훗날 주판이 되었고, 그 주판은 계산을 위한 보다 정교한 기계장치로 만들어져갔다. 지금이야 너무도 자연스럽게 만나는 현대의 컴퓨터는 그렇게 태어났다. 컴퓨터의 어원은 익히 알려진대로 계산원을 가리키는 일종의 직업이었다. 물론 컴퓨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가/감산 정도의 일이 아니라 꽤나 복잡한 연산과 기하를 포함하는 계산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 능력은 재능과 더불어 오랜 수련의 결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자리를 기계장치인 컴퓨터에게 내 주는데 그리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치 이미 정해진 일인 양 받아들여졌다. 컴퓨터와 사람의 인연(?)을 극단적으로 짧게 정리하자면 그렇다. 마치 운명처럼 사람이 그 역할을 내 주는 것을 비관이나 염세로 몰아갈 필요까지는 없다. 역사와 문명은 근력과 능력의 비운곳을 채우고, 효율을 찾으며 달려왔으니 말이다.

2021년 드림아트랩이 끝나간다. 복합과 유기적이어야 완성되는 목표를 제시하다보면 반드시 빈 구석이 보이게 마련이고, 대립하는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오류가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유효한 키워드는 기술/예술/정보/배움/작동 등이 아니었을까 한다.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따라 상이한 목표를 포괄한다 해도 드림아트랩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어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새로 등장한 정보나 언어가 표현의 매개를 변화시키고, 적극적으로 기술과 매체를 받아들인 예술가에 의해 표현의 다양성과 시대의 특징을 드러냈다. 이에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함께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대응하는 것은 지극히 다양하다. 특정하기 힘든 모두를 대상으로 두기 보다는 기준을 만드는 것이 과제라고 생각했기에 랩이 형식으로 차용되었다. 이미 이 글의 시작에서 바빌로니아인이 배열한 돌멩이는 선명한 필요를 느낄 수 있다. 필요가 불러온 도구와 매체는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속력을 만들고 시스템을 변화시킨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필요로 선별할 것에 대한 안목이다. 2019년과 2020년에 드림아트랩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개념과 매체가 언어로 가장하고 나타나기도 한다. Metaverse나 NFT가 그렇다. 80년대 초반 루카스필름 게임즈가 만든 하비타트는 게이머가 사이버 카페에 모여서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린든랩의 세컨드라이프가 등장했을 때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할 수 있지만 단지 훔치거나 베낀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다. 어떤 아이디어가 있다 하더라도 그 시기의 필요와 만나지 못하거나, 물리적 한계와 정보처리를 위한 환경과 도구가 없다면 구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분산컴퓨팅이 블록체인을 본격화 하면서 만나게 된 화폐는 사회가 무엇을 기준으로 가치를 정할 것인가에 대한 과학과 기술이 응답한 대안이거나 제안이다. 여기에 희소성이나 저작의 권리등이 결합하면서 복제불가능한 예술가의 본질적 표현이 티지타이징(digitizing)된다. 이 두가지 예에서 ‘돌멩이의 필요’는 무엇일까. 소통과 가치교환에 대한 의지다. 이때 교육의 혼란은 것은 돌멩이 사용법인가, 돌멩이를 놓기 위한 규칙을 디자인하거나 선택하는 것인가에 놓인다. 하지만 생각보다 명료하다. 필요는 배움의 동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드림아트랩에서 우리가 만난 대상은 아동과 청소년이다. 그래서 간혹 새로운 매체와 놀이를 충분히 즐기는 것을 통해서 배움이 가능하다는 주장 역시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경험을 통한 호기심과 동기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작용이 있다. 그렇다 보니 놀이에 경도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다. 인과관계의 딜레마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예술교육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다. 놀이를 디자인하고 놀이의 장에 아동/청소년을 위치시키는 것은 현재를 사는 아동과 청소년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고 구조를 만드는 것은 기획자의 일이고, 실행하는 것이 아티스트와 교육자의 일이다. 하지만 다시 컴퓨터를 떠올려 보자. 사람의 자리를 어떤 장치에게 넘겨주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을 때 사람에겐 새로운 역할이 생기지 않는가. 사용자의 위치에서 즐거운 문화경험 역시 중요한 한 축이라고 볼 수 있지만, 드림아트랩이 지향하고 있는 가치는 컴퓨터에게 내줄 것이 무엇인지 결정할 수 있는 안목을 갖는 힘이 아닐까 한다. 결국 기술의 본질과 원리를 탐구하는 능동적 의지를 찾아 가는 것이 가능한지 시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OK, Computed.

위생의 패러독스, 일회용.

ARTICLE 2021-12-15

호텔에서 스위트나 콘도, 팬션을 빌리면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사람들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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