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문화/예술교육은 사회적 결핍을 보상하는 체계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공공재를 사용하면서 부터 더욱 무게가 실렸다. 어떤 공공기관의 예술교육포럼에서 들은 이야기는 동의가 되지도 않고 오히려 충격적이었다. 소득수준과 학력은 문화향유능력과 비례곡선을 그린다고 말했다. 과연? 문화와 예술의 향유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문화콘텐트 소비 능력"으로 놓고 보면 그렇다. 전시를 관람하고,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는 횟수가 늘어날 수록 미적 탐색능력이 높아지고 문화적인 사람이 된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화교육과 예술교육의 포인트는 1)누구와 공연을 볼 것인가. 즉, 관계방식과 관계의 질에 대한 문제다. 2)전시를 보고 난 후에는 어떤 경로로 집에 오는가. 부모의 손에 이끌려 갔다오는 것과 친구와 다녀오는 것, 또는 단체버스에서 무엇인지도 모르는 작품을 구경하고 다시 그 단체로 내려서 집으로 향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행위를 둘러싼 그라운드의 차이가 전시에 대한 감흥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안내한다. 3)문화와 복지가 뒤섞여 콘텐트 선택의 주체가 누구인지 헷갈리는 경우는 없는가. 복지로 문화와 예술을 바라보게 되면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최소한 남들만큼은 우리도 한다는 시각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때 문화소비의 주체가 모호해 진다. 각종 문화와 예술을 개별 콘텐트로 떼어놓고 상상하는 낡은 사고방식은 단체로 관람을 시켜주면 문화예술의 향유자권리가 지켜지는 것이라고 보는 도식적 사고를 만들어낸다. 극단적으로는 도곡동에 사는 개인으로서 청소년은 문화예술의 적극적인 소비자라고 전제하거나, 농산어촌의 분교에 다니며 농사가 주업인 부모를 둔 청소년은 TV이외의 문화수용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가정해선 안된다는 말이다. 학교에 다니면서 강둑을 걷고, 바람의 냄새로 하루를 점치는 문화적 환경은 도시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며, 문화적 다양성이 허용되는 거리를 걸거나, 표현매체로써 오브제의 예술성을 경험하는 것은 도서산간지역에서 경험할 수 없다는 차이. 즉, 환경의 차이에 가깝다. 촌스러움이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바라볼 때 이질감을 표현하는 말이다. 촌에사는 사람이 촌느낌이 나면 자연스럽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비하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예술교육은 자연스러움을 얼만큼이나 존중하고 있었는가 말이다. 그러니 도시에서 하듯 프로그램을 뿌리기 시작한다. 오히려 결핍은 도시의 밀도를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