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또는 인문학 학습은 어떤 특정 시기에 유행처럼 번지기도 한다. 학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이 어째서 유행인가 싶기도 할것이라고 생각 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사회에서 교양과 상식이 근사한 장식품으로 여겨지는 때가 있(었)다.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무크가 생산되고 소비되었던 시기를 생각해 보면, 수 많은 독자가 그 내용보다 형식에 더 끌렸던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디지털기반의 다양한 디바이스가 생겨나면서 형식은 더욱 내용을 압도했다. 그리고 정보는 겉잡을 수 없을 만큼 여러방향으로 교환되기도 하고 부유하기도 하면서 2000년대를 열었다. 2020년 현재 인문학과 인문학 학습은 “학습”자체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에 다다랐다. 그 배경에 오지선다의 답안지에 적혀 있지 않을 법한 책과 글은 청소년에게 더 이상 읽혀지지 않았고, 대학의 기능은 고용에 초점이 된 커리큘럼을 생산해 냈다. 독서는 통독의 경험을 강조하기 보다는, 과제를 위한 핵심정리 요약본과 누군가가 권한 챕터별 읽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어떻게 살것인가 또는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의 삶과 지향에 대한 근본적 물음은 그저 종교활동 정도로 대체되었다. 누군가는 이것이 위기라고 말하겠지만, 또 다른이는 자연스러운 변화이며 정보와 지식의 발전단계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수천년간 인류가 쌓아온 지식과 지혜의 깊이를 전달할 수 있는 매개는 여전히 고민거리여야 한다. 무엇을 매개하는가도 중요하지만, 매개자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은 사회적 과제다. 그렇다고 해서 공공사업이 그 기능을 수행해 낼 것이라는 기대는 그리 많지 않다. 여전히 매개자의 역할은 지식공급과 근사한 언어배달에 그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학습자체에 집중하는 매개자의 탄생은 지적욕망이 필요해지는 사회로 진입할 때 가능한건 아닐까? 그렇다면 최소한 한국사회는 예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