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토론회에 갔는데 깊이 없이 함부로 떠드는 사람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예술교육 워크숍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이건 매체 같은걸 가르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이라는 말을 했다. 대체 그는 매체를 뭐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말을 할까 싶었다. 미디어교육의 현장은 테크놀로지와 문화현상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미디어교육이 새로운 매체를 소개한다는 뜻이 아니라 의사소통에 대한 기본적인 인간의 태도가 교육과정안에서 주요한 이슈가 되기 때문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play/놀이로 매체를 받아들인다. 반면 미디어교육자는 학습과제로 배우고 익혀 사용한다. 수용자의 개별 사용성에서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모든 매체가 보편성(universality)을 필수요건으로 적용하고 있지 못하는데 있다. 현재를 사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매체는 복합적이다. 신문은 옮겨서 편집할 수 있고 텍스트와 영상이 동시에 존재하는 매체다. 영상텍스트는 영화관과 TV를 통해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곳으로 이동하며 유통된다. 아이폰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디바이스의 출현은 수 백가지의 조합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미디어를 생산, 유통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단지 어린이와 청소년만의 문화는 아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장치로써 하나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지만, 미디어 소비의 측면에서는 개별 미디어로 존재하지 않는다. 디지털은 무한한 복제와 재구조화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단일양식의 생산과 소비로 설명할 수 없다. 이미 다매체 복합양식은 보편적이다. 예를들어 내가 만든 단편영화가 테스크탑에서 보여지게 할 것인가 휴대가능한 디바이스에서 보여지게 할것인가에 따라 화질, 자막, 앵글에 대한 설정을 다르게 만들게 된다. 미디어의 생산과 소비에서 비평과 분석을 넘어서 문화적 텍스트의 건강한 소비와 유통을 동시에 교육과정에서 다루어야 하는 시대에 들어선지 오래다.
청소년은 미디어의 적극적인 소비자인가-미디어생산자라는 측면은 고려해 볼 수도 없을 만큼 빈도수가 줄어들었다-를 생각해 보면 긍정하긴 힘들다. 그저 수동적인 소비자로만 보인다. 아무리 기준을 낮게 잡으려고 해도 그렇다. 능동적인 소비자는 권리의식과 미디어의 생산방식이나 사회적 기준에 대한 기본인식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사회의 청소년에게는 그 기준으로 볼 때 수동적인 소비자에 그친다. 그 이유가 청소년에게 있지 않고, 청소년이 처해있는 한국사회의 미디어문화 환경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안타깝다. 아쉽게도 이미 창작보다는 소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소비를 부추긴 것은 분명 소셜미디어다. 원치 않아도 노출되는 광고와 7-8초 내로 소비를 결정하게 만드는 자극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모든 재료는 본인이 제공하는 정보로 부터 나온다. 실로 무섭다. 습관을 누군가에게 통제당한다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 질문을 던지면 난 아니라고들 답하며 항변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지금 나의 생각이 진짜 내 생각이 맞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