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교육의 대량생산 공정
근대 이전의 교육은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를 중심에 두는 비공식 교육이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특별한 기준이 있기 보다는 삶의 지혜나 생존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전하는 것이 주된 목적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하다. 공동체에서 교육의 기능은 다음세대로 이어지기 위한 생존법칙에 대한 전수다. 체계를 갖춘 교육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자를 읽고 쓰는 것 부터, 철학서와 경전을 통해 지식을 배우는 순서와 지향을 담은 교육이 있었다. 다만 모두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고 계층의 한계가 존재했다. 이후 가정과 지역공동체는 교육을 학교 또는 공공의 제도에게 넘겼다. 한정된 정보와 지식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작은 공동체와는 다르게 보편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그래서 교육은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수라는 판단이 공교육 또는 근대 이후 학교교육으로 옮겨 온다. 다시 생각해 보면 학교의 위상과 권위가 높아진 정서에 한 몫을 한 것은, 먹고 사는 기술을 가르치던 가정과 지역사회의 교육기능이 옮겨 가면서 학교가 한 개인을 먹고살게 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정리하자면 결국 교육내용의 대량생산을 향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래서 최대의 효율을 뿜어내기 위해서 학교는 건물이 되고, 교육내용을 체계화한 커리큘럼과 그 내용을 전달하는 교사가 필요해졌다. 이 구조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예술과 예술교육이 대입되었기 때문에 생긴다. (이 글에서 공교육 안에 존재하는 예술교육을 거론하진 않는다. 자칫 이 문제의 본질을 흐리기도 하거니와, 다양한 대안이 학교에서도 나오고 있기 때문) 물론, 예술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것인지 보다 우리사회에서 예술과 예술교육이 적용범위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대량생산을 위해서는 기준을 정하고 달성할 목표를 산정한다. 그리고 목표를 달성했는지 여부에 따라 수치화된다. 공교육은 시험문제를 잘 푸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유다. 이 과정을 통과했다는 증명을 위해서라면 계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흔히 말하는 성적이다. 여기에 예술을 대입해 보자. 예술은 예술가의 행위라고 좁혀서 설명할 수 있다. 더구나 예술가는 창작과정에서 배운다. 창작과 창작품의 완성도는 정의하기 어렵고 기준을 말하기 쉽지 않다. 당연히 운필(運筆)등의 기능에 대한 설명은 아니다. 즉, 학교교육 또는 공교육에서 행하는 달성가능한 목표에 대응하는 방법이 주관에 의존한다.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의 안목이 작용한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아니다. 사회교육으로써 예술교육이 공공성을 기초로 공공기관 중심으로 실행되다 보니 학교교육의 형식을 차용(이라고 쓰고 흉내라고 읽고 싶다)했다. 마치 당연한 것 처럼 예술가가 교육으로 작업범위를 확장하려할 때 공공연히 요구되는 것이 예술교육의 커리큘럼이다. 그리고 또 당연한 것처럼 이 커리큘럼에는 예술가의 작업보다 무엇을 배울 수 있으며, 어디까지 달성 하려는 것인지 목표를 기술한다. 자연스럽게(?) 공적 영역의 예술교육 장면에서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예술교육을 바라보게 한다. 창작과정에서 일어나는 예술의 영감과 동기는 계량화하기 힘들고 여간해서는 단어와 문장이 담긴 문서로 정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공공성을 가진 예술교육은 예술가의 작업에서 확장하는 것이 아닌 대량생산 안에서 시들어간다.

예술교육 커리큘럼은 예술가의 창작이어야 한다
경험재인 예술은 오랜 시간을 통해 전수되고 계승되어 왔다. 이는 예술가의 경험 순환을 의미한다. 우리사회에는 수 많은 예술가가 살고 있고, 작품활동을 이어간다. 때로는 개인이기도 하고, 협업을 강조하는 집단이기도 하다. 이런 이합집산의 이유는 작품을 창작하는 데 수단으로 작동한다. 작품 또는 작업방식을 경험한 개인과 집단은 그 과정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생긴다. 이 욕구에 부응 하려는 의지를 가진 예술가가 있다면 예술교육이 시작된다. 이때 시간을 써야 하고 비용이 발생한다. 예술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넘어서야 하는 허들이다. 필요하다면 도구를 구비해야 하고, 예술가를 찾아야 하고, 요구가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예술교육이 공공의 영역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은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안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여러가지 방법 중 하나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제도와 사업을 만드는 것. 그것이 한 나라가 해야하는 일이며 풀어내는 방식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정한다. 여기까지는 매우 합리적 선택이며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그러나 본격 사업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위에서 언급한 방법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예술가 개인 혹은 단체에게 예술교육을 실행할 수 있는 지원 또는 보조를 위해서는 배분과 배포의 공정성이 화두가 되고, 그 기준이 되는 것이 예술교육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 실효성을 증명해 내는 일이다. 지난 수 십년간 예술교육을 지향하며 사는 예술가가 꾸준히 늘어났다. 이들은 예술가의 경험을 자기 예술세계와 창작과정을 통해 전수 하려 노력한다. 예술가로서 알게 되었던 탐미성을 작품으로 설득하고 싶기도 하고, 완성과 실패에서 느끼게 되는 통쾌한 감정을 나누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지원사업등에 접속하는 순간 모든 언어가 평평해 진다. 1차시…2차시…로 묘사하고, 도입과 전개를 거론하며, 매 시간별 계획과 기대효과를 쓴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단어의 조합으로는 지원사업 심의에 통과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극 가능한 코드를 설정하거나 번듯한 결과를 예측하게 써내려가야 한다. 커리큘럼 자체가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따르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절대다수의 공공기관은 hwp에 채워넣아야 하는 기획서 양식을 준다. 예술가가 아니라 행정가의 편의 맞춰야 한다. 교육기획. 특히 예술교육의 기획은 예술성 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예술가에게 자신의 포트폴리오나 작품을 설명해 달라고 할 때 볼 수 있는 재현방식과 태도는 사라진다. 이미 이 형식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다른 상상을 하기 힘들 정도다. 간혹 기획서 양식이나 RFP(제안요청서)가 없이 사업이 실행되는 자율성이 강조되는 사업을 하다보면 예술가와 예술교육자들은 정해진 틀이 왜 없는지 묻거나, 진짜 없는 것인지 재차 확인한다. 예술교육의 커리큘럼은 창의성이란 찾아보기 힘들다면 우리가 예술교육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할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