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겁다. 뜨겁다. 시원하다. 화끈하다. 맵다. 마렵다. 이 표현은 살면서 매 순간 떠오르는 단어이자 경험이다. 이런 경험은 감정과 연결된다. 결국 감정보다 앞선 물리적 경험인 셈이다. ‘감 잡았다’는 표현을 들어본 적 있지 않나? 이 감은 한자로 感. 영어로는 sense. 우리말로는 느낀다는 의미다. 느끼고 깨닫는 다는 뜻의 감각은 생각보다 인간에게는 외부세계와의 연결에서 거의 절대기능이다. 감각은 경험으로 쌓여 자기에게 득이 되는 감정을 만들어야 한다. 왜곡될 경우 감각을 통해 트라우마가 되기도 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 않은가. 그럼 생각해 보자. 우리는 감각경험을 어떻게, 무엇으로, 누구와 함께 쌓아가고 있는가에 따라 외부세계를 인식하고 자기화하는 시도를 통해 성장한다. 감각경험이 좁아질 수록 보다 강렬한 자극에 민감해지고, 극적인 경험만을 추구하게 되는 경향이 생긴다. 강한 자극은 경험의 민감도를 떨어뜨리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게 만든다. 다른 말로 왠만해서는 무감각하다고 받아들이게 되면서 일상의 경험이 소외된다. 방법은 감각을 깨우는 능동성을 찾아가는 것.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사회의 청소년이 살아가면서 자기의 자유로운 시도로 감각경험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예술이 청소년에게 필요한 이유는 역시 감각의 영역을 넓혀가는 긍정적 경험이다. 결국 창작을 시도하거나 창작경험에 참여하는 것은 다양한 재료를 감각하고, 타인의 세계를 을 배우며 또 다른 세계와 연결을 시도하는 사건을 만드는 것. 이런 일련의 사건을 축적시키면서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인지의 영역이 확장되고, 미래의 삶을 성찰 할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은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인간은 정오가 되면 배가 고파야 하나? 집단에 속해 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각이 무뎌진다. 정작 자기의 감각과 패턴을 무시한다. 배꼽시계라는 표현. 개인마다 에너지를 사용한 정도가 다르니 감각하는 허기는 제각기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본인에게 가장 정확한 시계는 배꼽시계다. 감각에 대한 얘기다. 가장 정확한 시계는 무시하고 집단이 정해놓은 시계에 따라 행동할 수 밖엔 없는 것이 큰 문제라고 보진 않는다. 다만 배꼽시계의 감각경험을 휩쓸려 살며 무시하는 동안 우리가 잃게 될 ‘감_感’에 대해 한번은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