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을 키우면서 그 동안 알고 있다고 착각한 '자연스러움'에 대해 한 수 배운다. 50년을 넘게 살면서 식물을 제대로 키워 본 적이 없었다. 선물 받은 화분은 항상 테라스 한켠에서 말라갔다. 너무 삭막한 집안 환경을 조금이라도 좋게 만들기 위해서 식물을 장식했을 뿐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식물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집에서는 휴식을 취하고 싶을 뿐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던 시기에 식물은 구경의 대상이었을 뿐이지 생명으로 대하지 않았다. 재택의 시간이 많아지자 식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한 생명력을 확인하는 순간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화분 밖으로 나온 잎이 식물의 전체가 아니라 뿌리가 있다는 그 당연한 이치를 그 동안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흙을 손으로 만지는 것이 자연스러워 졌을 때 부터는 식물의 크기가 뿌리를 포함한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했다. 결국 식물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은 흙과 미생물, 물과 바람, 빛과 온도. 써놓고 나면 복잡하지만, 실제로 인간이 가장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생각해 보면 비슷하다. 볕이 잘드는 집에 환기를 자주 하면서 쾌적한 습도를 조절하는 것은 내 컨디션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였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만약 자연환경에서 지금 키우는 식물들이 산다면 어떤 조건일까 생각하면서 조건을 만들면 성장과 번식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화분이라는 공간 제약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적잖은 폭력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생명윤리에 대한 나의 기준과 원칙에서 타협이 크게 힘들진 않았다. 온실을 만들어 열대식물을 가두지 않는다거나, 내가 보기 좋은 수형을 잡기 위해 철사를 동원하여 인위적인 모습으로 만들어간다거나 하는 그런 행위는 하지 않기로 한다. 시들어 가지만 생명의 순환을 볼 수 있다면 수 개월에서 수 년을 기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자연스러움은 없다. 수 많은 미생물과 섞여서 살아가고, 공생의 조건을 만들어 뿌리를 내리고 잎을 퍼뜨리고, 꽃과 열매로 번식을 하지 못한다. 결국은 내 타협점에 셀 수 없이 많은 오류와 모순이 생기는 것.

자연스럽다는 것은 나에겐 매우 중요한 삶의 원칙임에 분명하다. 자기존중감을 갖기 위해 연기를 하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 특히 좋은 리더 연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역겹다. 그냥 표현이 아니라 정말 토하기 직접까지의 감각이 느껴진다. 이 역한 느낌이 무엇일까 고민의 결론은 부자연스러움이다. 꽤 많은 곳에서 보이지만 적절한 선에서 무시하거나 피한다. 아마도 스스로가 가장 부끄러워야 마땅하겠지만 간혹 메소드연기를 하는 사람들은 거침없다. 맞서지 않고 피하는 이유다. 좋은 리더는 흔하디 흔한 언행일치를 기준으로 삼아야 가능하다. 리더 연기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 뱉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말에 대한 책임감을 어필 또는 주장한다. 행동이 아니라 말로 때우는 것. 그게 리더 연기자의 가장 역겨운 모습인데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바로 드러난다. 자기만 모르는 천박한 인식은 동화속 벌거벗은 임금과 같다. 연기로 해결할 수 없다면 자연스럽게 무식함이 들통나거나, 술수가 드러나 거짓해명을 하는 경우가 생기게 마련이다. 늘 조심하곤 있지만 가끔 피하다가도 만나면 참 기분이 더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