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나 종교가 이유가 아니라 그저 삶의 방식이나 철학으로써, 생명을 유희로 삼는 것을 반대한다.
타인의 유희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순 없기 때문에 사회운동이라거나 강요적 설파 따위를 하진 않는다.
어려서 바다낚시가는 걸 좋아했었다.
낚시가 즐거운 이유는 배타고 바다로 향하는 그 행위도 있지만 최종 유희는 수확량과 비례한단걸 알았다.
더구나 낚싯대를 쥐고 힘겨루기를 하는 그 순간의 짜릿함이 '너무'좋았다.
물고기를 잡아서 먹겠다는 의지는 거의 없고 그저 그 낚시가 재밌었다.
몇 번의 경험으로 내가 얼마나 낚시를 재미있어 하는지 알았다.
물고기를 죽이는 것으로 내 하루의 즐거움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어려서 꿩사냥을 따라 나섰던 기억도 있다.
사냥철이 되면 허가받은 공기총으로 꿩니아 참새를 잡았다.
낚시보다 재미있는 기억은 아니지만 그 역시 비슷했다.
절뚝이며 도망치고 있는 새를 잡으로 뛰어다니며 정복감을 만낀했다.
20대가 되어서 스키를 타러 다녔다.
한국의 90년대에 스키는 그렇게 많은 인구가 즐기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어느 여름 워크숍에 참여했는데 내가 지난 겨울 갔던 그 스키장이었고, 그 황량함에 너무 충격을 받았다.
한 계절 인간의 유희를 위해 산봉우리가 처참히 깎여 있는 모습.
그 이후 스키와 스노우보드를 타지 않는다.
골프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유희를 위해 생명을 도구로 삼는 것이 왜 문제가 아니겠는가.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연관성을 충분히 찾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손맛이 좋은 낚싯대를 개발하거나, 스키장의 마찰력을 조절하기 위해 인공제설을 한다거나
이 모든 것은 그저 유희에 그친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수 많은 유희에 대한 변명거리를 참 꼼꼼히도 준비해 놓더라.
더구나 생명이라는 말을 꺼내면 그럼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거냐는 극단적인 반응이 돌아오곤 한다.
생명이라고 말하면 그럼 네가 사는 집은 어떻게 건축되었는데? 슈퍼마켓에서 사는 음식재료는? 같은 질문으로 자신의 유희와 생존은 같은 범주에 있다는 걸 강조하더란 말이다.
아마 내가 사회운동으로 연장시키지 못하는 것은 이런 싸움에 지쳐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런것 같다.
내가 가진 기준은 자유의지를 가진 생명을 구속할 권리가 인간에게 없다는 것 정도다.
식물을 화분에 담을 때 미안함을 느끼긴 하지만 사냥과 같은 카테고리에서 죄책감을 지우지는 않게 되는 이유인것 같다.

KTX를 타고 가다보면 디스플레이를 통해 뉴스를 계속 보게 된다.
우연히 본 뉴스에서 두 인물의 사망소식.
레미 루시디라는 사람은 홍콩의 40층 건물을 오르다 추락사했다. 그는 인플루언서이고 수 많은 마천루를 정복한 스파이더맨이란다.
그의 인스타는 전 세계 건물 옥상에서 걷는 모습을 영상으로 가득하다. 건물 관리인을 속이고, 몰래 숨어들어가는 것이 당연한터라 이번 홍콩에서도 관리인이 건물 밖에서 구조요청 전부터 신고하고 따라갔던 모양이다.
잔나 삼소노바라는 사람은 말레이시아에서 아사했다. 생과일만 먹는 것으로 유명한 인플루언서다.
이미 지인들은 그녀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영상 속의 활짝웃는 그녀 모습과는 달리 걷기도 힘들어하거나 림프이상을 진단받았다고 했다.
만약.
이들에게 카메라가 없었다면 이 행동을 계속 했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