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교는 참 미스터리한 시스템이다. 학교는 언제부터 기능하기 시작했을까. 사적 영역이어야 할 교육기능이 공적 영역으로 흘러 들어가는 순간 부모는 더 이상 전문적인 교육자가 아니어야 된다. 그래야 학교의 전문성을 믿고 아이들을 맡길 수 있었을테니까 말이다. 한국사회의 근대교육은 국가의 이념을 전수하기 위한 조금 더 특수한 시스템으로 짜여 졌고 사람들은 학교의 위상을 전체주의 문화에 근접하게 세워나갔다. 필요 이상으로 개인이 무시되자 교육개혁을 말하는 몇 명의 사람들이 크게 다르지 않은 공교육 시스템을 제안하고 실패하고를 반복했다. 불신이 거듭될 수록 교육전문가에게 우리 아이들을 맡기는 것이 '불안해진 부모'(개별 가정의 부모를 말하는 것이 아닌 특정 임무를 갖게 된 일종의 역할군)는 다시 사적 영역인 가정으로 교육을 가져오고 싶어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그 역할을 빼앗긴 부모는 더 이상 사회로 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교육전문가가 될 수 없었다. 결국 불안과 불신의 토대위에서 세워진 것이 대안학교란 말이다. 좀 극단적인가? 그래도 할 수 없다. 그 불안과 불신을 누구 보다 체감하는 사람이 쓰는 글이기 때문에 그렇다. 가벼운 기고를 부탁 받아놓고 너무 큰 이야기로 부터 시작했지만, 수업하는 강사의 한 명으로 생각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내가 보는 대안학교로써 로드 스콜라는 이렇다. 여행의 계획과 실행은 교육의 테마일테고, 길위에 교실이 세워져야 한다. 떠나는 길위에서 만난 사람이 스승이고, 돌아오는 길 모퉁이에서 오래된 자기 낙서를 만났을 때 학생들의 자기성찰 순간이 찾아왔으면 한다. 길위에서 누굴 만날지 모르니 불안하고, 돌아올 길목에서 다른 길로 들어서서 긴 시간을 허비할까 두렵다. 삶이 예상한 대로 될리 없고 내일을 앞당겨 살 수 없듯 자연스런 흐름에 몸을 맡길 밖에 없다. 세명이 길을 떠나면 그 중 한명이 스승이 된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스승과 제자는 길위의 사람과 오브제로 학습을 시작하면 된다. 여행자의 불안은 동전의 앞과 뒤처럼 학습욕구와 호기심을 불러오는 동기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앞서 말한 불안과 불신은 결국 교육의 당사자인 학생이 느끼는 것이라기 보다는 불안한 부모가 만들어 놓은 것에 가깝다.

  2. 한 학기 내내 즐거웠다. 이기적인 수업방식(나 좋으려는 강의)을 선호하기 때문에 학습자인 학습자가 좋은 것 보다는 내가 재밌고 즐거운 작업을 선택했다. 난 아마추어의 사진과 드로잉에 끌린다. 전형적이고, 정제되고, 특정한 평가도구에 딱 떨어진 예술은 애초부터 관심 밖이다. 어색하고, 경직되고, 부담스럽고, 애써 해도 그 모냥(표준어로는 모양이지만 모냥이란 어감이 확실한 표현이기에 걍 씀)이고, 거칠고, 투박한 것이 좋다. 아티스트가 끊임없이 지향하고 기억하려고 하는 것이 제일 처음 자기 작업을 시작할 때 느낀 설렘이다. 무엇이 될까 실험하고 좌절하는 동안 찾아낸 것이 현재의 모습이라면, 관성처럼 몸이 움직였을 때 느끼는 그 지루함을 스스로 견디기 어려워 한다. 떠별들은 부담없이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를 보여줬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아마 여기서 어떤 극적 반전을 기대할 것이다. 독자의 기대를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옮겨 적는다면 다음과 같다.
    1) 상상할 수 있는 드라마틱한 시나리오 : 강사는 큰 목표를 제시하지 않았다. 수업이 시작되자 학습자들은 어색해 하면서도 차츰 내재한 가능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진과 드로잉 속에는 잠재된 능력과 놀라운 자아상이 투여되었다. 베트남 여행은 사진과 드로잉으로 기록되고 그 스토리를 따라 가다 보면 베트남에서 얼마나 의미 있는 시간들을 각자가 보냈는지 상상가능하다. 여행이 주는 긴장감과 이방인의 시선으로 보는 타인과 타인의 환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2) 한 학기를 마친 현실 : 처음에 수업을 시작할 때 처럼 거칠고 여전히 정제되지 않았다.
    이중에 나의 기대는 무엇에 더 가까운가 생각해 보게 된다. 두번째가 아니었던가. 좋은 수업을 설계하는 능력있는 선생은 단 한 학기만에 사람의 습관과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설마 아니길 바란다는 뜻이며, 수업을 열심히 듣는다고 하여 관점과 행동이 원하는 방향으로 선회된다고 생각하는 "좋은 교육에 대한 망상"이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이 수업이 끝난 학기말이 아니라 5년, 10년, 30년 후의 삶의 변화를 측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교육의 성과는 인스턴트화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3. 사진수업은 매일 30장이상의 사진을 찍는 약속으로 시작했다. 30장의 사진은 하루에 한번 모든 사진을 리뷰하며서 1장을 남기고 모두 버린다. 그렇게 일주일을 기록하고 수업시간에는 7장의 사진으로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다. 이 수업은 카메라를 손에 드는 습관, 이미지로 기록을 남길 때 첫번째 선택의 조건을 스스로 패턴화하기, 스토리를 발견하고 말하기가 포함된다. 매일 30장에서 29장을 버리면서 컴퓨터의 휴지통까지 모두 비우고 남기지 않는 것을 강조했다. 문자로 남기는 기록에서 어떤 어휘를 선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어떤 어휘를 쓰지 않을 것인가와 방법적으로 동일하다. 마찬가지로 이미지의 기록인 사진은 일상을 관찰하면서 하루 24시간에서 어떤 의미를 남길것인가를 결정하는 방법이다. 이미지 생산자의 작업은 마치 최종선택에 대한 변명에 해당되기도 한다. 카메라에 대한 습관, 내 일상의 관찰, 매일의 가치에 대한 탐색이 동시에 가능한 것이다.

  4. 드로잉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스타일을 배우는 것이 가능한가요? 사실 그 답은 분명히 있다. 개인의 만족 정도야 다르겠지만 가장 가능성 높은 답은 매일 그리는 것이다. 그것도 조금씩 변화하는 자기 스타일을 보는 것. 드로잉 수업은 매일 5분에서 10분의 드로잉을 제안했다. 공들여 그려 놓고 나면 또 공들일 내일을 상상하면서 질려버리곤 한다. 작업의 양이 많다고 해서 단지 좋은 것은 아니고, 작업의 완성도가 높은 것을 매일 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그렇다고 본다면 낙서에 가까운 드로잉이 매일 지속될 수 있다면 펜이나 붓의 움직임에 대한 감각도 찾을 수 있고, 내가 바라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관점도 서서히 만날 수 있다.

  5. 학습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글쎄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다 못할 것 같다. 대안교육을 주장(?)하는 로드 스콜라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어떤 학습을 하면 좋은까 하는 제안은 잔소리가 될 것 같다. 그냥 감각적으로 느끼고 있을것 같다. 알면서 못하는 일이 어디 한 두가지로 끝나겠는가. 끝도 없이 게으로고 싶거나 알면서 괜히 저항하고 싶은 시기가 10대 아닌가 말이다. 허망한 꿈과 미래 설계보다는 오늘 나에게 의미 있는 것에 집중하는 시간을 누리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