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권리로 바라보는 보편적인 시선은 한국사회에서 그리 오랜 역사가 아니다. 그러니 이른바 전인교육을 학교에서 지향한다는 것에도 의심을 보탤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지식이라도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는 기회마저 경쟁으로 희석되었다. 급격한 도시화나 전쟁등의 요인은 한국사회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매우 특수한 요인은 아니다. 반면 우리사회의 특징은 가난을 후대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경쟁을 강화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인간의 삶에서 노동의 가치를 교육으로 구성하기 어렵지만, 시험지의 문제를 누가 더 빨리 풀 수 있는가는 능력의 척도로 포장하는 것은 쉬운일이었다. 전인교육은 인간 답게 사는 방식 또는 선택을 향하고 있지만, 경쟁적 입시교육은 누락할 대상은 누구인지 골라낼 수 있게 설계한다. 베이비부머는 원하지 않는 경쟁으로 들어섰지만 산업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직업선택의 기회가 열려있었다. 그들의 경험으로 볼 때 생존 자체를 위한 고용은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지만, 경쟁구조 안으로 스스로 편입되는 것은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청년은 베이비부머의 바로 다음 세대(에코세대라고 정의하기도 한다)에 해당한다. 즉, 학력 또는 학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고용의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모세대와 사회적 이미지 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19세가 되면 성인이 되지만 그들 과반수의 신분은 학생이다. 사회인이 아니라 학업에 연장선에 있었다. 개인의 선택이라기 보다는 20대에게 노동시장이 열리지 않았고, 부모세대의 강렬한 믿음인 학력이 그들을 먹여살릴 것이라는 막연함이 동시에 작동한다. 이런 이유로 다수의 청년은 선택의 여유 없이 사교육을 통과하여 공교육에서 성과를 내는 아이러니한 사회를 경험한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다. 부모세대의 믿음대로라면 경쟁을 뚫고 고학력을 획득했으니 사회적 기회가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부모세대의 믿음은 막연하고 안일한 태도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들의 경험영역 이상을 상상하고 행동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 결과 지금의 청년세대는 그 막연한 믿음으로 경쟁하며 문제풀이에 매진해왔지만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학습해본 경험이 부족해졌다. 교육은 국민의 권리라는 것은 결국 교육(공교육과 사회교육)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런 청년세대는 청소년기에 겪었어야 할 다양한 경험의 결핍이 생겼으며, 정보와 지식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 받을 수 있는 기존 교육체계와 다른 요소와 형식등을 찾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배움이 강의를 소비함으로써 충족할 수 있다는 태도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청년세대의 허탈함을 패치하는 교육상품이 이미 비즈니스 모델로 개발된지 오래다.

청년이 되기 전 청소년기에 스스로 선택한 경험이 턱없이 부족한데 기인한다. 교육의 장에서는 인간관계를 경험하고 실패하며, 재능과 만나기 위한 시도를 반복해야한다. 하지만 실패가 곧 성과지표화되면 시도를 통제한다. 다시말해 통제된 시도는 자발성을 제한한다. 자발성이 없는 선택에서 동기는 당연히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에 행동의 이유를 타자에게서 찾아야 해낼 수 있다. 자발적 동기 없이 행동하는 경험이 쌓이면서 교육을 통해 얻는 것은 교육시스템(학교 등)과 교육에 대한 불신이다. 청소년기에 반드시 경험했어야 가능한 자발적 선택과 세계관에 대한 탐구를 유보하면서 생기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보상이 없이는 행동하지 않는다. 경험의 다양성이란 즉석에서 보상체계화 되지 않는다. 학점과 교환하지 않는 한 지식에 접근하려 하지 않는 태도라거나, 요약된 정보를 입수하여 유용성을 확인하려 한다. 둘째, 교육을 소비재로 접근한다. 입시를 위한 학원을 필두로 수 많은 교육상품을 경험한 결과 쓰임새가 분명한 콘텐트가 아니라면 관심을 가질 수 없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세째, 협업이 무의미해졌다. 협업은 혼자해낼 수 없는 과제를 팀워크로 이뤄내야 하는 것이었음에도 강제적 팀작업이 과제로 주어지는 경험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결과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청년교육에서 필요한 것은 청소년기에 겪었어야 하는 다양한 경험의 장을 시도하고, 실패가 용인되고, 평가목표를 의도적으로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 필요해 진다. 이러한 의도는 자칫 나태해보이거나, 목표의식이 불분명해 보이는 단점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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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현장에서 피교육자의 문화를 보면 사회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피교육자의 수동적 태도는 사회구성원들의 모습이 투영된 경우가 대다수다. 하나의 예로 교실에서 질문이 사라졌다. 언제는 질문이 활발했는가라고 반문이 생기기도 한다. 교육에서 질문이 많은 것이 문제가 될 리 없다. 최근 대학 강의실에서 드러나는 풍경은 “질문”이 줄어들고 교수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확인”받는 것이 절대적으로 많아졌다. 교육자의 의도대로 되는 것인지를 확인받고 행동했을 때 자신의 결과가 곧 자기 선택이며 책임이라는 것으로 부터 회피할 수 있는 기제가 된다. 교육자가 시키는대로 했는데 왜 학점을 받을 수 없는가에 대한 관심만이 교실에 남아 있을 때 그 교육은 실패한 것 아닐까 한다. 우리사회에서 서로 책임을 떠 넘기면서 살아남는 사람들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아온 슬픈 결말이다. 교육과 교육과정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것은 사람이며 사회다. 교육이 사회적 영향력으로 부터 절대 뗄레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건강한 사회가 없이는 교육은 독립적으로 건강할 수 없다는 다소 무책임한 결론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상호작용과 영향력을 서로 행사하고 있지만 건강한 개인의 성장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단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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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개의 청년학교 연구자료의 일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