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에 대한 대화에 참여하는 참신한 방법_데뷰작과 최신작으로 읽기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과 도망친 여자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의 한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 인간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는 디스토피아. 번식과 재생이 불가능한 사회를 그린 영화는 넘치지만 칠드런 오브 맨의 묘사 방식에는 남다른 감동코드가 있다.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들리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사람들은 행동을 멈추고 경이로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경건하게 퍼지며 폐허를 지나는 씬에서 뭉클한 감동이 전해진다. 생각해보면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그러하며, 내일도 당연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연속이 무너지는 순간이 온다면 다름아닌 그것이 종말이다. 즉, 종말과 일상은 그렇게 마주하고 있다.

홍상수 감독의 이야기를 하면서 일상에 대한 관찰을 뺀다면 의미가 퇴색한다. “강원도의 힘”과 “생활의 발견”등의 영화를 필두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나 “하하하” 그리고 최신작 “도망친 여자”까지 가까이 있을 법한 사람들의 이상한(?)행동을 추적하듯 영화를 만들었다. 잘 알고 있을 것 같지만 도저히 알 수 없는 타인의 일상. 나와 교감을 나누고 있을 때 일상을 공유한다는 착각이 사랑이라는 감정과 유사할것이라는 기대 등등. 지금까지 홍상수표 영화의 특징을 굳이 꼽자면 그렇다. 반면 그의 데뷰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은 깔끔하게 구조화한 스릴러에 가깝다. 무능해 보이는 소설가와 위태로운 부부, 극장 매표원으로 일하는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면서 치정과 살인이 벌어진다. 단어를 조합하다 보면 영화는 매우 뻔한 장르영화처럼 묘사되지만, 정작 영화는 담담하며 감정은 극도로 메말라 있다. 관객이 이입하기에는 틈이 부족할 만큼 멀리서 지켜보게 한다. 2020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 감독상을 수상한 최신작 도망친 여자에서 느껴지는 홍상수는 여전하다. 스타일이나 화법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무능함을 감추는 무기인 생존을 위한 자존감이나 인간감정의 변덕스러움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방식과 태도는 여전하다는 말이다. 도망친 여자의 주인공 감희는 세명의 친구를 만난다. 당연히 다른 사람을 만나지만 감희는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한다. 적당히 예쁜 척하고, 적당히 친분을 확인하며, 적당히 정보를 건넨다. 듣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에 시작하는 의사소통은 불편하고 어색하다. 여기서 가장 큰 딜레마는 감희가 찾고 싶었던 “적당함”에 있다. 총 세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지만, 지인의 전형성(친구란 이해야해라거나, 마음을 터놓는 대상일 것이라는 기대감등)을 중심에 두고 부유하는 의사소통을 묘사한다. 그 묘사 방식이 드라마틱한 전개도, 치밀한 계산도 없기 때문에 관객은 일상에 닿아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사람이 감희로 매개되면서 영화는 마치 그들이 모두 이 이야기를 동시에 전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전환된다. 주인공 감희는 남편의 출장을 이유로 집을 나섰다며 말을 꺼내지만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그 남편과의 사이가 진짜 좋은게 맞는지 의심이 생긴다. 화자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오히려 어딘가 가렵운듯한 찜찜함을 전하는 스토리텔링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대부분의 홍상수 영화는 코믹하다. 박장대소하는 웃음은 없더라도 생각하면 할 수록 웃기다. 친구들과 쓸데없이 소비하는 농담과 다른 이유는, 그가 제시하는 상황이 코믹했기 때문이다. 결국 홍상수 코드는 관찰력에 있다. 별것아니어서 한켠에 던져 두었던 지긋지긋한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자세히 보니 그 안에 한심한 변덕도 들어있고, 철없는 아집도 들어있지만 관조하는 삶과 철학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종말과 일상이 마주하고 있는 것과 묘하게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