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ep on Pushin'

Buscant 2020-12-08

참 좋아하는 영상.

밀도 높고, 보도블럭 천지인 서울에서 이런거 보고 따라하지 않았으면.

Samsara

Buscant 2020-12-08

이런게 어린이 교육자료여야 하는거 아닌가 싶다.
현실을 배우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자기가 속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지할 수 없다.
이런 자료를 볼 수 없게 하는건 결국 자본의 논리였는데, 지금은 무슨 인권이 어쩌고까지 갖다 붙였다.

Django Reinhardt festival

Buscant 2020-12-06

2014년.
말그대로 올스타. 장고페스티벌에 온 아티스트에게 모여서 한곡 부탁하자...
놀라운 연주를.
버튼 아코디언 참 소리 좋다.

어정쩡과 황당사이

Buscant 2020-12-02

난 배웅이 어색하다. 특히 버스나 기차에서 인사를 다 마치고 플랫폼에 서 있을 때.
언제 돌아서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상한 몸짓을 계속하거나,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손짓을 하거나,
눈을 마주치는게 지루하거나. 그렇다.

아무튼 저 속에 내가 있다는것

Buscant 2020-12-02

Vivien Roubaud

Buscant 2020-11-30

비비앙 후보의 멋진 작업. 간단한 조작으로 매 순간 달라지는 3D드로잉을 공중에 전시.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과 도망친 여자

Buscant 2020-11-26

한국영화에 대한 대화에 참여하는 참신한 방법_데뷰작과 최신작으로 읽기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과 도망친 여자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의 한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 인간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는 디스토피아. 번식과 재생이 불가능한 사회를 그린 영화는 넘치지만 칠드런 오브 맨의 묘사 방식에는 남다른 감동코드가 있다.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들리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사람들은 행동을 멈추고 경이로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경건하게 퍼지며 폐허를 지나는 씬에서 뭉클한 감동이 전해진다. 생각해보면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그러하며, 내일도 당연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연속이 무너지는 순간이 온다면 다름아닌 그것이 종말이다. 즉, 종말과 일상은 그렇게 마주하고 있다.

홍상수 감독의 이야기를 하면서 일상에 대한 관찰을 뺀다면 의미가 퇴색한다. “강원도의 힘”과 “생활의 발견”등의 영화를 필두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나 “하하하” 그리고 최신작 “도망친 여자”까지 가까이 있을 법한 사람들의 이상한(?)행동을 추적하듯 영화를 만들었다. 잘 알고 있을 것 같지만 도저히 알 수 없는 타인의 일상. 나와 교감을 나누고 있을 때 일상을 공유한다는 착각이 사랑이라는 감정과 유사할것이라는 기대 등등. 지금까지 홍상수표 영화의 특징을 굳이 꼽자면 그렇다. 반면 그의 데뷰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은 깔끔하게 구조화한 스릴러에 가깝다. 무능해 보이는 소설가와 위태로운 부부, 극장 매표원으로 일하는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면서 치정과 살인이 벌어진다. 단어를 조합하다 보면 영화는 매우 뻔한 장르영화처럼 묘사되지만, 정작 영화는 담담하며 감정은 극도로 메말라 있다. 관객이 이입하기에는 틈이 부족할 만큼 멀리서 지켜보게 한다. 2020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 감독상을 수상한 최신작 도망친 여자에서 느껴지는 홍상수는 여전하다. 스타일이나 화법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무능함을 감추는 무기인 생존을 위한 자존감이나 인간감정의 변덕스러움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방식과 태도는 여전하다는 말이다. 도망친 여자의 주인공 감희는 세명의 친구를 만난다. 당연히 다른 사람을 만나지만 감희는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한다. 적당히 예쁜 척하고, 적당히 친분을 확인하며, 적당히 정보를 건넨다. 듣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에 시작하는 의사소통은 불편하고 어색하다. 여기서 가장 큰 딜레마는 감희가 찾고 싶었던 “적당함”에 있다. 총 세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지만, 지인의 전형성(친구란 이해야해라거나, 마음을 터놓는 대상일 것이라는 기대감등)을 중심에 두고 부유하는 의사소통을 묘사한다. 그 묘사 방식이 드라마틱한 전개도, 치밀한 계산도 없기 때문에 관객은 일상에 닿아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사람이 감희로 매개되면서 영화는 마치 그들이 모두 이 이야기를 동시에 전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전환된다. 주인공 감희는 남편의 출장을 이유로 집을 나섰다며 말을 꺼내지만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그 남편과의 사이가 진짜 좋은게 맞는지 의심이 생긴다. 화자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오히려 어딘가 가렵운듯한 찜찜함을 전하는 스토리텔링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대부분의 홍상수 영화는 코믹하다. 박장대소하는 웃음은 없더라도 생각하면 할 수록 웃기다. 친구들과 쓸데없이 소비하는 농담과 다른 이유는, 그가 제시하는 상황이 코믹했기 때문이다. 결국 홍상수 코드는 관찰력에 있다. 별것아니어서 한켠에 던져 두었던 지긋지긋한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자세히 보니 그 안에 한심한 변덕도 들어있고, 철없는 아집도 들어있지만 관조하는 삶과 철학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종말과 일상이 마주하고 있는 것과 묘하게 닮아 있다.

플란다스의 개와 기생충

Buscant 2020-11-26

한국영화에 대한 대화에 참여하는 참신한 방법_데뷰작과 최신작으로 읽기

플란다스의 개와 기생충

봉준호는 이미 한국 영화에서 최고 수준의 감독이다. 관객 뿐 아니라 영화계에서도 아니라고 말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작품이라기 보다 진짜 “잘 만든”영화를 줄줄이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데뷰작 플란다스의 개는 제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플란다스의 개는 독창적인 작품이고, 기생충은 독보적인 작품이다. 한 감독의 데뷰작과 최신작을 나란히 놓고 보면 작품세계를 더 많이 이해한 느낌이 들곤한다. 우선 플란다스의 개는 영국의 아동문학에서 제목을 가져 왔겠지만, 오히려 봉준호 감독의 어린시절에 보았을 법한 쿠로다 요시오감독의 TV애니메이션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1970년대 애니메이션이 대부분 밝은 분위기였던 것과 달리 플란다스의 개는 어린이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가난한 소년이 우유배달을 하며 자기의 꿈인 화가가 되겠다고 말하면서 살아가다 미술관의 그림 아래에서 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당시 어린이들에게는 가난과 소외, 비극이나 죽음등에 노출되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수많은 묘한 감정이 교차됨을 느꼈다. 2000년 작품이니 그 당시 주요관객의 연령대를 고려했을 때 아마 많은 사람들이 비슷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어린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면서도 어느 한구석에 석연찮을 것 같은 불길함 같은 이미지 말이다. 정작 영화는 동화와 애니메이션 무엇과도 상관없다.

영화 플란다스의 개는 한국의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국의 아파트는 효율을 위해 만들어졌다. 집(또는 home)이라기 보다는 집단 거주시설에 가깝다. 1000세대가 같은 주소를 공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이 지켜야 하는 매너가 있다. 부족한 주차장의 관리, 쓰레기 처리, 공공안전등이다. 자기의 집이라면 직접 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아파트에서는 그 모든 일을 고용한 누군가에게 시키고 감춘다. 마치 원래 없던 것처럼. 숨기고 감춘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파트의 문을 닫고 들어가는 순간 충분히 외면할 수 있다. 영화 플란다스의 개는 우리가 사는 사회에 분명 존재하지만 특별히 관심을 가져본적 없는 외면과 분리된 삶에 대한 성찰이다. 단, 어둡지 않다. 흔히 말하는 블랙코미디인 셈이다. 웃는 이유의 뒷맛이 쓰다. 등장인물은 정의감에 불타지만 목표가 유명인인 여자와, 자력으로 메인스트림으로 진입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현실에 좌절하고 심성이 꼬인 남자다. 캐릭터의 설정이나 연기가 아무리 훌륭해도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한정적 공간인 아파트와 지하실이 가장 인상적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주거지에서 대부분이 알고 싶어하지 않거나, 알지 못하는 곳. 경비원과 정체불명의 어떤 인물이 등장하는 곳. 그 지하공간은 숨어들어간 사람이 숨기고 싶은 일을 벌이는 곳이다. 영화속에서는 지하에서 개를 잡아먹는다. 물론 이건 영화의 설정이다. 한국, 특히 서울에서 길잃은 개를 몰래 데려다 먹이로 삼는 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만큼 극단적으로 감추거나 비밀스럽기에 숨어해야 하는 행위다. 영화속 서사는 지하공간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뭔가 부정한 것을 들킨것 같은 민망함과 약간의 소름끼치는 공포가 흐른다. 그리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속시원히 해결된 것 없는 찜찜함이 지속된다. 우리가 외면하려는 현실을 마주했기 때문에 생기는 부끄러움이라고나 해야할까. 플란다스의 개는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독창적인 내용과 표현이었다. 마치 다소 엉뚱하고 비약이 심한 단편영화에서 나올 것 같은 플롯에다 코믹스 같은 연출이 그랬다. 당연히 흥행하지 못했다.

이후 여러편의 영화를 거쳐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을 만들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영화제에서 수상소감을 했다. 소셜미디어에 그 수상소감이 담긴 영상클립이 돌았고 ‘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라는 심정으로 영화관을 찾은 관객도 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단도 관객도 영화제도 그의 영화를 칭송한다. 사회에 존재하지만 가려놓고, 감추고, 비밀에 부치고, 부정하게 되는 무엇인가를 세련된 스타일과 화법에 멋진 연출로 독보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 생기는 그 찜찜하고 부끄러운 감정과 더불어 어두운 유머코드로 이 영화는 흥행했다. 20년 동안 균형을 잃지 않고 일관성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 참 멋있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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