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사진읽기_강의자료_Finding Vivian Maier

ARTICLE 2020-12-04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Finding Vivian maier)

역사책을 쓰고 있어서 사진이 필요했다는 다소 설득력 떨어지는 내레이션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빈티지 상점이나 경매장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찾는다. 그러다 우연히 네거티브 필름을 발견하고 집으로 가져온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리면서 수집으로 묘사한다. 영상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는 개연성이 떨어지고, 작가가 열심히 프린트 하면서 사회적 실험(미술관을 찾는다거나, 예술계의 태도를 겨냥한 발언을 한다거나)을 거듭하는 것이 진심으로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에 감동을 받은 다큐멘터리 작가의 시선이라기 느끼기는 힘들어 보인다. 다만 다큐멘터리를 잘 만들고자 하는 의식적 행동에 가까와 보인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사진과 예술에 대해서는 그렇다. 더구나 2009년 이후 디지털미디어가 다양한 형식(비형식, 탈형식을 포함한)을 실험하며 가속화하는 변화추이에 따라 “사진”을 바라보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몇 가지 질문이 생긴다.

예술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정 받아야 하는 문화적 텍스트인가?

현재의 이슈인 초상권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2차저작물이 만들어질 때 원저작자의 권리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면 이 영화는 “신상털기”에 해당한다. 작가는 어떤 윤리의식을 가져야 할까?

필름 한 롤이라고 해도 모두 공개하는 작가는 드물다. 셀렉팅의 예술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작업결과가 그녀의 작품이라고 말해도 될까?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비비안 마이어가 있는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가 있고, 사회적으로 약속한 범위가 있다. 이 모든 것은 혼재 되어있기 때문에 명문화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즉, 그것이 입장의 차이거나 그 시대에 통용되는 가치에 따른 다양한 “해석의 결과”다.

2018년 상상력발전소 기고글

ARTICLE 2020-12-04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흔한 투덜거림 중 하나가 일기예보다. 분명히 오늘 아침 예보로는 오후에 비가 온다고 했다. 그래서 우산을 챙겨나왔는데 쾌청하다. 우산 하나를 들고 다니는 것이 몸의 움직임에 엄청난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도 하루 종일 우산을 볼 때면 불평하게 된다. 기상을 예측한다는 건 인간의 생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다양한 방식으로 예측을 해왔다. 동물의 움직임을 보면서도 판단하고, 어젯밤 달무리의 모양새를 보면서도 다음날을 예상하곤 했다. 그만큼 날씨는 우리의 삶에 많은 것을 차지하기 때문에 흔하게 투덜거릴 대화의 소재가 된다. 최근들어 이 흔한 투덜거림이 더 많아졌다. 한국인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디지털디바이스에서 그 정보를 얻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하늘색이 바뀌면 날씨정보를 찾거나 앱을 열어 확인한다. 그리곤 기상정보 업데이트가 지금 자기 몸이 느끼고 있는 정보와 동일한지 확인한다. 어찌보면 좀 쓸데 없는 일이다. 물론 운항을 나가야 하는 파일럿이거나, 고기잡이 배의 선장이라면 꼼꼼히 체크한 기상정보와 수년간의 경험으로 오는 예측으로 판단을 내릴 것이다. 그런 이유로 기상정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우산을 하루 정도 들고 다녔다고 해서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일기예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어서 참고할 뿐이다. 예보 자체도 그렇게 구성되지 않는가. 하지만 기상정보를 손쉽게 얻기 시작하면서 달라진 것이 있다. 체감하는 것의 중요성을 잃어가는 느낌이랄까. 지금 춥다면 온도가 내려간 것이고, 저 멀리 하늘에 먹구름이 있다해도 비가 오지 않는다면 그저 흐린 날일 뿐이다. 햇살이 쨍쨍한데 오늘 비온다는 온라인 정보를 읽으면서 ‘일기예보란 믿음이 안가는군’이란 마음의 소리가 굳이 필요 없을텐데 말이다. 날씨예보에 오늘 흐리고 비가 온다고 써 있다 해도, 체감하는 자신이 느끼는 정보가 진짜다.

2018년 상상력발전소는 성수동에서 열렸다. 매해 열리는 행사(?)라지만 또 다른 환경을 탐색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상상력발전소의 주요컨셉은 이미 정해진 상황이어서 커미티가 결성되는 시점이 조금 늦었다는 생각을 했다. 반면 이런 성격의 전시와 파티에는 너무 큰 책임감 없이 참여하는 것이 즐겁기도 한 법이다. 전시를 설계하면서 가장 큰 이슈는 성수동일 수 밖엔 없다. 인간의 사유방식은 사고와 대화를 반복하면서 생기는 마찰과 충돌의 결과로 완성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성수동은 매력적인 곳인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더 필요했다고 욕심이 생기지만 어디서든 그 아쉬움은 남는다. 성수동은 오랜시간 쌓아올린 장인의 삶터가 아니던가. 상상력발전소가 지향하는 기본적인 가치는 예술이 작업자를 향하고, 장인이 예술가가 되며, 테크놀로지의 정점에 인간감성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수십년간 쌓아온 장인과 제작문화가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 예술이 조금 다른 관점으로 지역과 사람들을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어찌보면 진부한 발상이기도 하다. 여전히 지켜야 하는 것과 새로운 문화가 만나야 한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어서 그럴게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진부한 발상과 행동이 또 얼만큼의 시간을 견디며 쌓여질 것인가가 중요하다. 누군가는 뻔한 결론이니 그만 하자고 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상상력발전소의 새로운 방법론을 내 놓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공공의 지원이나 공공영역의 해석방식에도 특정한 사명감이 부여되길 바란다. 그래서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퍼포먼스와 관람객의 수로 몇 마디 평가로 방향이 전환되기에는 아까운 사업이라고 판단했다. 성수동의 수십년간의 역사가 지금의 모습으로 평가되길 바라지 않듯 상상력발전소 역시 인스턴트에 가까운 쓰고 버리는 시도에 그치지 않길 바라는 바람이 생긴다. 짧은 준비시간은 늘 좋은 핑계가 된다. 어차피 준비할 시간이 짧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과업이 있어 해내야 하는 것 보다는 자율적 판단으로 자신이 해야하는 이유를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이 참여한 사람들이 가져야 할 태도다. 2018년 상상력발전소도 짧은 준비시간에 촉박한 일정을 견뎌야 했다. 작가를 선정하고 준비하는 동안 성수동에 대해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역시 그런데도 참여해야 하는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결합한 것이 즐거운 일이었다. 결국 해내야 하는 이유는 없더라.

급변하는 사회, 달라진 문화, 적응하기 힘든 속도전쟁.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곧 들어왔다.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들어야 하는 소리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따라오는 이야기는 앞으로는 이렇게 될 것이라는 예측. 혁명이 다가온다고 선언하고, 대비하며 살아가라는 말을 쉽게 한다. 우리는 그 수 많은 미래예측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를 생각했으면 한다. 마치 일기예보를 보면서 현실과 비교하면서 맞네 틀리네를 말하는 모습으로는 오늘 나와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간다. 그 감각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라스코 동굴벽화를 보며

ARTICLE 2020-12-03

언젠가 라스코 동굴벽화를 보면서 몇 명의 아티스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라스코 동굴벽화가 인류가 그린 첫 번째 그림은 당연히 아니고 그 보다 몇만년 앞선 예술 행위는 각지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라스코 동굴벽화는 잘 알려진 그림이기도 하고, 표현방식이나 예술적 각성을 이야기하기에 적합하다. 우리의 대화는 어디서도 본적 없는 최초의 경험과 독립성을 가진 설렘에 대한 것이다. 현재 우리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라고도 하고,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라고도 하면서 역사 속 시각예술품을 보며 산다. 더구나 미디어는 각종 작품을 다채널로 재생산하며 우리 가운데 있다. 잠깐 그리는 행위를 생각해 보자. 무엇을 그릴까 관찰을 시작한다. 피사체에서 중심이 되는 선을 나의 감각으로 옮겨 넣는다. 그 작업이 쌓이는 과정이 수련이고, 그 반복 행위가 모여서 작가가 탄생한다. 라스코 동굴벽화를 그려 넣었을 그때, 비교할 그림도 없고 다른 그림을 본 경험이 없었을 그 상황은 표현의 자유가 극대화된다. 그들은 행위를 무엇이라고 정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실험적일 수 있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초기 인류가 남긴 드로잉은 잘 그리고 못 그린다 뿐 아니라 그 행위가 무엇인지조차 비교할 대상이 없었다. 즉, 지금의 행위에 온전히 집중하고 작업할 수 있으며 독립적이라는 의미다.

문화공간과 문화환경_예술교육공간을 세팅하려는 사람들에게 보낸 레터

ARTICLE 2020-12-02

문화를 삶의 양식이라고 조작적 정의를 해 본다면 일상과 문화의 관찰을 통하여 사회적 관계 안에서 성장할 수 있게 돕는 것이 문화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문화적 행위를 포함한 문화활동이 문화시설을 근거로 발생한다고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모든 문화행위는 삶의 근거지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문화적 공간이 주어졌다고 해서 활발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예를 들어 학교문화를 상상해 보자. 학교에서 문화의 발생은 교실과 교실을 이어주는 복도이고, 하교길의 골목이며, 어른들의 간섭이 최소화된 자율적 공간에서 시작한다. 일상으로 그 연결고리가 된 삶의 연장선에 있지 않은 문화는 타자에 의한 조직 또는 조작에서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문화공간은 문화환경의 연장선에서 시작한다. 문화예술교육의 근거지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우선, 문화활동은 문화공간에서 일어나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이 필요하다. 문화공간이 충분하다면 급속하게 문화활동이 일어날까 라는 의문이다. “충분”이라고 하는 기준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문화적 환경과 문화공간은 연관성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문화예술회관, 문화원, 문화의집, 문화센터 등등. “문화”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는 문화공간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더구나 지역의 국공립도서관, 다양한 규모의 갤러러, 작은도서관, 평생교육센터, 예술창작센터등 여러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때 문화행위가 공간이 규정하는 것으로 출발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보아야 한다. 즉, 문화행위 기준이 되는 것이 공연을 보고, 예술콘텐트로 동아리를 만드는 것 등의 단순한 패턴이 우선 연상된다면 문화예술교육의 장을 협소하게 상상하는 것에 그치기 쉽다. 문화예술교육은 기존의 교육패러다임으로 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 왔다. 정책과 제도, 사업등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철학과 그 노력이 변질되어 보이기는 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문화예술교육매개자인 교사가 있고, 이미 생산해 둔 교육 콘텐트를 커리큘럼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 콘텐트를 소비할 학생이 있다면 가능할 것이라는 단순한 발상은 일단 제외해 두자. 모든 사람을 위한 예술이 모두에게 똑같은 내용과 형식의 문화/예술교육으로 일관성있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발상자체가 비문화적, 반예술적 행위이기 때문에 말하고 싶지 않은 테마다.

공연시설을 운영할 주체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일을 하는가에 따라 “문화공간”이 되는가 “대상을 만족시켜 실적을 만드는 공연시설”이 되는가로 구분된다. 문화가 형성되고 예술행위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곳은 요구에 의한 자생적 발생이고 문화예술교육은 스스로 재생산 구조를 끊임없이 생산해 낸다. 즉, 공간을 매개로 한다는 말은 그 자연스러움을 이해한 사람들로 부터 나오는 요구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지금의 문화예술교육이 발생하는 공간은 대부분 자연스럽다기 보다는 억지스러움에 더 가깝다. 더구나 지역문화가 담아낼 수 없는 (오히려 외면하는) 공간자체가 생겼다고 해서 새로운 문화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예는 지역에서 쉽게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지역에서 몇 몇 사람들이 의기투합하여 엄청난 예산규모를 끌어들여 문화시설을 지어 놓았으나, 적당한 콘텐트를 만나지 못해 정체성자체가 흔들리는 경우는 허다하다.

더구나 대량생산하려는 의지는 문화예술교육의 공간적 개념으로 부터 점점 멀어지게 한다. 공연 및 그와 관련한 시설을 만든다고 가정해본다. 대단위 공연장을 중심으로 하거나, 전시실을 만드는 것에 주력한다.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진 불특정 다수의 개인과 집단이 함께 공연장을 사용하려고 하면 그 인원수가 가장 중요하다. 물론 큰 공연장이 때론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자생적 문화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보통사람이 공연장에서 소비재로써의 예술콘텐트를 향유하면서 문화예술교육의 가능성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험재로써의 문화와 예술에 접근하면서 문화예술교육의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균형감 있는 문화예술교육 세팅의 태도다. 교육을 통한 자발적 공연 콘텐트가 생겨났을 때 대규모 시설에서 관객을 채우느라 급급해야 하는 이유는 없다. 더구나 소규모의 교육생집단이나 동아리들의 다종 장르를 모아 발표회 형식을 만들었을 때 그 맥락없는 나열밖에 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지 않은가. 문화시설이나 공연장, 예술활동이 가능한 시설을 만들 때 가급적인 소집단의 다종생산이 가능하도록 디자인 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그것이 문화예술교육공간 설계의 기본이다. 밴드연습실이 있다면 그 연습실을 무대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천명의 객석을 확보하는 공연장 하나를 만들려면 100-200명단위의 공연장 여러 개로 분할하는 것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적합하다. 예산이 항상 문제라고 말한다. 지금 현재 시민이 이용할 수 있는 공연장에 가보라. 초기 예산으로 각종 장비를 들여왔는데 전혀 사용하지 않아서 처분되는 장비들과, 보기에서 그럴싸 하게 포장하기 위해 준비된 것들이다. 사용자중심에 서서 공간이 확보되는 것에 주력하는 것이 우선이다.

평상을 찾다.

ARTICLE 2020-11-30

의사소통은 타인의 생각이나 실천에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표현의 이유와 닮은 듯 차이가 있는 것도 변화를 요구하는 화자의 실천행위라는 측면이다. 의사표현은 욕구 또는 욕망을 담아내기 바쁜데 비해 소통은 타자와 교류하는 것을 말한다. 타인에게 단지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인간은 미디어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천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이해받기 위해 미디어가 진화했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 의사소통을 혁신적으로 전환시킨 몇 가지 (발견 또는 발명으로 습득하고 체화한)미디어를 나열해 본다면 몸-소리-음성언어-문자-인쇄-전파와 통신기술-컴퓨터-온라인 네트워크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한다. 물론 이 모든 미디어는 인간의 사용을 근거로 발견했거나 만들어졌다. 또한 이 모든 미디어가 우연이든 필연이든 의사소통을 돕는데 종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뉴미디어의 탄생을 마치 지금까지의 불통을 해소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굳이 아니라고 우길 이유는 없지만 생각해 봐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인구가 늘고 집단을 형성하고, 그 집단에서 문화를 만들어 가노라면 사용해야 하는 새로운 언어와 미디어가 늘어간다. 새로운 언어와 미디어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그로인해 또 새로운 언어와 그 언어를 싣고 나르는 미디어가 탄생한다. 다시 말해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절대시간을 단축하고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이유가 생기기에 뉴미디어가 생기는 사라지는 기간은 단축되고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당연해졌다. 이때 우리를 환기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미디어”그 자체의 개념이다. 모든 미디어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서 인간에게 다가간다. 때로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최고이자 최초의 미디어라고 말해야 한다. 건강한 미디어에는 건강한 인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버추얼...사이버...온라인...네트워크...이제는 이런 단어들도 트랜드에서 조금 벗어난 듯 느껴진다. 소셜미디어, SNS가 화두다. 마치 소셜네트워크를 모르거나, 사용자의 입장이 되지 않는 것이 사회적 도태를 말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곤 한다. 하긴 이 사회의 대부분의 정보가 신문과 TV를 넘어서서 웹으로 움직였고, 웹이 정보를 집적하는 공간에서 분화되는 공간으로 향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정보는 곧 생산력과 비례했다. 역사적으로 그랬다.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잘 듣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던 사회에서 생존을 위한 생산력을 얻는 경위를 따져보면 된다. 사냥하는 방법과 수렵, 이동, 집단생활의 모든 것을 선 경험자의 언어와 행동으로 동 시간에 경험해야 했다. 이를 위해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고 윗세대의 정보는 나의 생존과 직결되었다. 그렇게 쌓여온 것이 지식을 넘어선 지혜가 되는 과정이었다. 시간이 흘러 기억과 경험에 의존하던 정보가 기록되기 시작했다. 기록은 읽고 쓰는 능력을 요구했다. 자연스럽게 기록된 정보를 누가 갖는가에 따라 생산력이 달라졌다. 지식은 문자에 의존했고 사람들은 그 기록된 정보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경험과 지혜를 기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커뮤니티가 확장되고 보다 복잡한 사회를 구성하면서 효율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모든 감각을 열어두려고 노력하지 않고, 기록된 정보에만 매달렸다. 그것은 시각정보였다. 정보는 갖게 된 사람은 생산력을 얻게 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많은 인구가 기록된 정보를 얻고 싶어 했다. 놀랍게도 그렇게 쌓여진 정보들은 지식으로 쌓여갔다. 그 지식을 득한 사람들은 또 다른 정보를 가공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또 다른 생산력을 갖게 했다. 정보와 지식의 교류방식과 태도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방식과 같은 것이었다. 전기와 전파는 수신기를 가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사회는 이렇게 순환되고 있는 정보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태시키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스미디어가 창궐하던 시대에 대부분의 인구가 라디오와 TV를 그렇게 까지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구성원으로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는 미디어를 통한 정보유통 채널에서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이것 역시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생존과 직결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이런 미디어는 미디어문화를 형성하고, 단 한 번도 예술적 삶과 떨어져 있던 적은 없다. 인간감정을 묘사하려 했고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생존과 직결된 정보라지만 인간이기에 풍요로운 삶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문학적 상상력이 그러하며, 인간의 감각을 무뎌지지 않게 하려는 예술의 노력들이 그러하다. 미디어와 미디어문화의 본질은 다분히 인간답기를 지향했다. 최근 정보채널이 늘어나거나 접근성이 좋아졌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대안처럼 말하는 미디어들이 쏟아진다. 마치 개인의 접근권이 열려있으니 언제든 접속하여 “우리의 통계 안으로 진입하라”는 말처럼 들려서 불편해진다. 처리해야 할 정보가 늘어나면 그에 따른 정보해독에 따르는 집중력이 분산되는 것이 당연하기에, 한 개인이 균형을 찾는 일이란 쉽지 않다. 그 덕분에 다수의 의견이나 말 잘하는 논객의 화려한 언어유희에 속아 넘어가기 쉽다. 메일이 이동전화 문자메시지처럼 실시간으로 들어온다. 스마트폰이 실시간으로 우리 사회를 연결하고 중계해 준다. 편리함을 넘어선 처리할 정보의 양이 늘어났다는 것. 속도와 편의성을 무기로 찾아 온 통신의 혁신적 변화에 그리 좋아만 할 것일까를 생각해보자. 마치 새로운 정보를 남보다 빨리 얻게 되면 쿨하고 멋진 신세계에서 사는 것 같은 환상이 늘어난 것은 아닐까. 미디어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여 풍요로운 인간사회를 꿈꾸는 것이라면 지금의 미디어가 취하는 태도는 그에 반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마치 소셜미디어가 생산력을 높여 줄 것이라는 마케팅의 언어로 언제 어디서든 네트워크에 접속해서 노동하라는 행동지침으로 치환된다면 경계하자는 말이다. 지금 당장 하라는 요구가 늘어난다는 것을 행복에 겨워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곳에서 온라인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라는 광고카피는, 당신이 언제든 일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인간에겐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조절할 자율성도 가지고 있 다. (또는 가지고 있다고 믿거나 전제하고 싶다) 정보를 가진 자가 승자가 되는 사회에 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가. 서양인들은 예로부터 생각하는 모든 것은 표현 가능할 것이라는 억지스런 관념을 명제화 한듯하다. 대부분의 수사학과 언어학의 기초는 그렇게 완성되었다고 본다. 그냥 무시할 법도 한데 학자를 신봉하고, 학설을 떠받드는 사람의 수가 워낙 많으니 개인이 무시한다고 무시될 수 있는 건 분명 아니다 싶다. 몰라도 되거나, 몰라야 하는 정보가 나에게 와서 비효율성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그 스트레스의 정도를 안다. 가족이나 지인과의 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수가 혹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전화벨이나 문자메시지라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가. 스마트폰 사용자들이 트위터에 접속하고 세상을 구원할 듯 말하고 있지만,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과 대화가 방해받는다면 "의사소통을 위한 매체가 의사소통을 방해하는"꼴이다. 온라인에서 의사소통의 대안으로 포장된 소셜미디어는 교류와 소통이 사라진 정치와 특정인물의 욕망이 드러나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이른바 "social"이 지향하고 있는 신념과 확신이 빠진 것에 문제의식이 별로 생기지 않거나, 무리한 사회적 요구로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되면 사람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몰려들 것이 분명하다. 이보다 더 중요 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 집에서 나오면서 만나는 동네사람과 인사 나눌 여유는 있었는지? 친구의 현재 고민을 함께 나눌 시간을 내고 있는지? 문자메시지와 실시간 메일을 확인하면서 부모님과의 통화는 늘어나고 있는지?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망치와 못은 가구를 만들 때나 고칠 때 사용하는 도구다. 하지만 같은 도구를 쓰면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그것이 도구의 본질이다. 미디어가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이며 때로는 도구를 넘어선 문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 현재 모습을 한걸음 떨어져서 살펴보려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간혹 학부모(?)특강 강의를 끝내고나면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그 질문의 핵심은 “청소년이 된 우리아이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어려워요” “방문을 꼭 닫고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 저와 말하는 것이 싫은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럴 때면 나는 대답대신 먼저 확인하고 싶은 생각에 질문을 던진다. “혹시 거실에 소파는 TV를 향해 배치되어 있진 않은가요?” 많은 가정에서 온 가족이 모여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은 거실이다. 그런 거실에서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공간을 디자인 해놓고, 자녀와대화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숨 쉬는 것.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공간을 연출하는 것에는 너무도 인색하다. 물론 아이들이 성장에서 흔히 말하는 사춘기를 거치면서 자기세계가 생긴것에도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와 더불어 어떤 환경이나 조건이 없는 상황에서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다소 무모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들어줄 수 있는 구조와 들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닌데 말하는 것은 참 어려운 것이다. 우리 문화 안에서 집단의사소통이 일어나는 과정을 살펴보면, 수없이 반복되는 오류와 ‘사유방식의 소비적 반복’을 목격할 수 있다. 어제 회의에서 충분히 이야기하고 결론을 내렸건만 다시 만나서 확인하면 간혹 전혀 다른 결론을 말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같은 시-공간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 우리는 이런 오류가 생기는 것을 단순히 화자의 ‘말하기 방법’이나 ‘화술을 펼치는 태도’에서 그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상호작용이란 것이 의사소통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청자의 ‘듣는 방법’이나 ‘경청’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같은 말을 다르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내용을 어떻게 잘 전달하고 잘 전달 받을 수 있게 하는가 하는 구체적 내용에 대한 문제라는 것에 초점을 두어보자. 표현에는 구체적인 단어나 문장의 조합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태도와 적극적으로 듣는 행위가 포함된다. 능동적 경청자에게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은 “잘 전달하여 말걸기”보다 더 중요한 “스스로 말하게 하기”가 들어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즉, 의사소통의 환경이 문제라는 발상이 필요하다. 의사소통의 내용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여도 ‘의사소통의 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가능할리 없다. 소통이 시도되는 타이밍은 항상 어떤 환경에 놓여져 있는가와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문화가 평상이다. 근대 이후 교육이나 정보가 공공영역으로 급격히 팽창되어 가정과 지역사회의 기능이 분명히 약화되었다. 하지만 항상 마을입구에는 느티나무가 서 있다. 느티나무는 그저 한그루의 식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이 시작되는 진입에 대한 상징이다.

사람들은 느티나무 밑에서 마을로 들어가기전 잠시 쉰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시작을 알리는 곳이기에 몸이 그렇게 반응한다. 그곳에는 거의 평상이 있었다. 비를 피하기도 하고, 잠시 누굴 기다리기도 한다. 긴 시간을 걸음에 피곤한 다리를 쉴 수도 있다. 이것이 그 기능의 전부가 아니었다. 평상은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앉게 되는가에 따라 인원구성이 다양하다. 둘러앉거나 마주볼 수 있지만 등을 대고 사적인 공간으로 빠져나올 수도 있다. 그래서 평상에 앉은 사람들은 자연스럽다. 그렇게 평상에 앉으면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 현재, 우리에게 평상은 어디에 있는가.

어떤 공부

ARTICLE 2020-11-30

인문학 또는 인문학 학습은 어떤 특정 시기에 유행처럼 번지기도 한다. 학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이 어째서 유행인가 싶기도 할것이라고 생각 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사회에서 교양과 상식이 근사한 장식품으로 여겨지는 때가 있(었)다.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무크가 생산되고 소비되었던 시기를 생각해 보면, 수 많은 독자가 그 내용보다 형식에 더 끌렸던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디지털기반의 다양한 디바이스가 생겨나면서 형식은 더욱 내용을 압도했다. 그리고 정보는 겉잡을 수 없을 만큼 여러방향으로 교환되기도 하고 부유하기도 하면서 2000년대를 열었다. 2020년 현재 인문학과 인문학 학습은 “학습”자체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에 다다랐다. 그 배경에 오지선다의 답안지에 적혀 있지 않을 법한 책과 글은 청소년에게 더 이상 읽혀지지 않았고, 대학의 기능은 고용에 초점이 된 커리큘럼을 생산해 냈다. 독서는 통독의 경험을 강조하기 보다는, 과제를 위한 핵심정리 요약본과 누군가가 권한 챕터별 읽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어떻게 살것인가 또는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의 삶과 지향에 대한 근본적 물음은 그저 종교활동 정도로 대체되었다. 누군가는 이것이 위기라고 말하겠지만, 또 다른이는 자연스러운 변화이며 정보와 지식의 발전단계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수천년간 인류가 쌓아온 지식과 지혜의 깊이를 전달할 수 있는 매개는 여전히 고민거리여야 한다. 무엇을 매개하는가도 중요하지만, 매개자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은 사회적 과제다. 그렇다고 해서 공공사업이 그 기능을 수행해 낼 것이라는 기대는 그리 많지 않다. 여전히 매개자의 역할은 지식공급과 근사한 언어배달에 그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학습자체에 집중하는 매개자의 탄생은 지적욕망이 필요해지는 사회로 진입할 때 가능한건 아닐까? 그렇다면 최소한 한국사회는 예외다.

다리떨기를 허하라

ARTICLE 2020-11-28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교에서 설문을 돌렸다. "집에 혼자 있을 때 가장 하고 싶은 일은?"이라는 문항에서 의외의 응답을 본적이 있다. 정크푸드를 맘껏 먹거나 온라인게임등이 물론 나왔지만 의외의 답변이 있었다. “다리떨기”였다. 어렸을 때 다리를 떨어서 어른들에게 혼난 경험이 있다. 복 나간다며 못하게 했다. 지금은 다리를 떠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어른들에게 제지 당했기 때문에 고쳐진 건 아니다. 과한 움직임과 소리는 타인과의 교류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지가 생기면서 부터다. 각종 인간행동 연구보고서에는 집중력 향상이나 긴장완화의 효과가 있다고도 주장한다. 때로는 뭔가 기대되고 신나서 다리를 떠는 때도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 다리를 떨지 않는 건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신나는 일도 줄어들고, 호기심 자극하는 상황도 줄어든 건 아닐까 의심도 하게 된다. 그런데 다리떨기라고 답을 쓴 초등학생은 진짜 다리를 반드시(!) 꼭(!) 떨고 싶었던 걸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15세기를 가운데 두고 일어난 르네상스의 예술가 절대다수는 과학자였으며, 새로운 물질과 현상에 대한 탐닉 경향을 드러낸다. 다양한 물질의 조합과 현상의 관찰을 즐기는 "광maniac"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에 몰입하고 호기심으로 반복하는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에 문화와 문명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끝없이 시도하고, 실험하는 경험이 쌓여가는 동안 산업혁명이 다가오고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그들은 창의력으로 세계를 변화시켰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찾아가기 보다 생산된 도구와 물질을 소비하는데 익숙하다. 이때 창의력은 조합하는 능력처럼 여겨졌다.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하다 보니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능력과 기술의 전수가 아니라 가르침의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 시스템은 효율성을 기반으로 동작하다 보니, 시도나 도전이 가로막히는 경우가 생긴다. 다시 말해 대량생산 시스템의 환경에서 배움이 일어나게 되니 개인의 창의력은 한계에 부딪히고, "광maniac"이 등장하기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이때 창의력은 학습가능한 능력인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발상과 구현(또는 실현)능력이 통일되어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이른바 창의력이다. 이는 특정한 콘텐트나 커리큘럼에 의해 교육가능하다는 의견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효율이 떨어지고, 성과가 단번에 나오지 않으며,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즐거워서 흔쾌히 하는 탐닉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을 뒤흔들었다. GPS와 초소형칩셋, 무선인터넷환경과 IoT가 놀라운 속도로 대중화 되었다. 자본은 발빠르게 움직이며 판매방식과 유통망을 재편했다. 지금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의사소통하고 소비패턴의 변화를 주도한다. 이런 기술력의 기반에 결국 과학과 수학, 공학과 테크놀로지로 부터 새로운 발상과 행동이 유발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추론 가능한 요소들이다. 하지만 창의력으로 전환되는 티핑포인트를 만든 건 자발적으로 선택한 시간에 충분한 시도와 실험이 가능한 환경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교육상품을 판매하거나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서 창의력 교육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다수의 창의력 교육은 "창의력=생산성"이라는 프레임에서 훨씬 큰 생산을 위한 방법론으로 시작하는 것에 가깝다. 실제로는 자신이 속한 세계나 다양한 재료를 탐색하고, 스스로 선택한 문화적 행위자가 되었을 때 창의적인 발상과 행동으로 이어질 뿐이다. 제공한 창의력 훈련으로 창의적인 인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때 교육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장 문화적인 환경을 세팅하는 것과, 창의적 발상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서점에서 책을 펼치고 첫장을 읽는데 재밌는 사례가 하나 눈에 들어 왔다. 독창성에 대한 내용이다.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들의 업무특징을 조사했다. 여러가지 특이점으로 분류하여 근거를 찾아보는 방식. 인터넷 브라우져에서 실마리를 찾아낸 사례다. 인터넷 익스프로러와 사파리를 쓰는 사람들 보다, 파이어 폭스와 크롬을 쓰는 사람들이 꽤 높은 비율로 독창적 일처리를 해내고 만족도가 높다는 것이다. 컴퓨터를 구매 하면서 이미 설치된 브라우져에 적응하는 사람과 새로운 브라우져를 찾고 자기 방식을 찾아가는 사람의 차이에 대한 설명이다. 당연히 수동적인 것보다 능동적 대처가 독창성을 발휘한다. 하지만 읽는데 헛헛한 웃음이 함께 나왔다. 첫째는 이 책을 읽고 새로운 브라우져를 쓰면서 스스로 창의적인 행동을 했다고 착각하게 될 사람들이 떠올랐다. 둘째로 한국에선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아니면 아예 일을 할 수 없는 업무환경이 얼마나 많은가. 선택할 수 없는 봉쇄된 환경에서 독창성을 넘어서서 창의성을 강요받을 때 과연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에 대한 헛헛함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제약이 그득한 환경에서 선택과 자유로움으로 창의력을 발휘하라고 말하고 누군가에게 성과를 보고하는 일 말이다. 교육환경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창의환경이 있다면 창의력은 발생한다. 그 환경을 만드는 일은 창의력의 발생빈도를 높이는 것이지, 창의력 자체를 전달하는 것은 매우 희박한 확률일 수 밖엔 없다.

수년전 내셔널트러스트에서 선정한 12세가 되기전에 꼭 경험하길 권하는 리스트가 있었다. 나무타기, 큰 언덕에서 굴러 내리기, 야생 자연에서 야영하기, 나무 은신처나 동굴 같은 아지트 만들기, 물 수제비 뜨기, 빗속에서 뛰어다니기. 이 리스트를 보면서 반드시 꼭 해봐야 할 것이 아니더라도 위험하여 금지되거나, 그런 환경을 만나는 것은 특별한 이벤트가 되어 버린 우리사회의 아동/청소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런 경험이 결국 창의력을 만들텐데 말이다. 하물며 다리떨기를 눈치 보고 싶지 않다고 까지 말하면서 자기 선택을 외쳐야 한다면, 우리가 창의력과 창의교육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할 시점은 점점 늦어질 것이다.

서울예술센터_용산 5/6층을 기획하며

ARTICLE 2020-11-26

흔히 환경오염의 원인이며 쓰레기로 인해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주범으로 비닐을 지목한다. 그래선지 사용을 자제하자는 말을 자주 접한다. 누군가는 당장 비닐사용 줄이기를 실천해야 한다고 외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비닐이나 비닐봉투를 정책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한다. 개인의 사용자제가 효과적일 것 같아 장바구니를 사용하자는 캠페인에 동참해도 모든 포장은 이미 비닐에 담겨져 나온다. 하지만 이미 위생관념이란것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포장되어 있지 않은 상품에 대한 불신은 팽배하기 때문에 대안이 분명치 않다. 편의적 발상으로 인한 인간의 행동으로 쓰레기는 쌓여 충분히 예상가능한 재앙을 만들어내는 것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작년에 우연히 영국 BBC 온라인 뉴스채널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터뷰 클립영상을 보게 되었다. 스웨덴의 스텐 구스타프 툴린(Sten Gustaf Thulin)에 대한 기사였다. 툴린씨는 종이봉투를 쓰기 위해서는 수 많은 나무가 잘려 나가는 것을 보고 비닐봉투를 개발한 사람이었다. 종이는 쉽게 찢기고, 물에 약했기에 다시 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반면 비닐은 접어 넣고 다니기 쉽고, 질긴데다 습기에 강했기에 재사용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결국 비닐봉투를 개발한 배경에는 환경에 대한 관찰과 상념이 담겨있다.

메시지는 대다수 의도를 포함한다. 동의와 공감과 무관하게 곡해될 가능성과 편의에 의한 변형이 동시에 발생한다. 2020년 현재를 사는 청소년과 예술교육 역시 자유롭지 않다. 문명과 문화는 예술과 함께 해왔지만, 시대에 따라 그 행위자의 지위가 달랐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예술은 모두가 누려(?)야 하는 영역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경험재인 예술과 예술행위를 배우고 익히고 싶어한다. 그렇게 예술교육이 대중으로 존재하는 아동/청소년에게 다가가기 위해 정책과 사업을 세팅하고 수행인력과 예산을 배정했다. 공공성을 탑재한 예술교육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본래의 의도는 예술과 예술가를 접하면서 세계관이 넓어지고, 자연스러운 예술행위로 만나게 되는 자기성장을 독려하자는 것이다. 의도는 그러하다. 허나 교육의 현장과 예술교육의 장면은 조금 다른 그림이 펼쳐진다. 입시를 위한 학교와 학원의 스케줄에 밀려 선택이 한정적이고, 부모의 정보에 의존하다 보니 선호와 무관하거나, 동기없이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일도 허다하다. 이때 예술교육은 스케줄을 피해 짧은 시간 성과를 내야 하는 과제를 떠 안고, 학습자의 동기를 조작적으로라도 부여하느라 정작 예술행위와 그 이야기를 풀어내기 보다 자극의 요소와 방법론에 대한 관심이 더 깊어질 수 밖에 없었다. 청소년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접속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고, 예술가와 대화하면서 세계관을 확장할 수 있는 경험의 장은 과연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질문으로 [서울예술센터_용산]을 기획하는 것은 불확실하고 불가능한 상상인가.

비대면을 대면하다.

ARTICLE 2020-10-16

연재기고_비대면을 대면하다.

  1. 흔한 공포영화를 보다.

    최근 몇년간 유행하는 공포영화에는 좀비가 자주 나온다. 예전에 “귀신영화”로 통칭하던 오컬트와는 다른 장르가 된지 오래다. 좀비가 영화 뿐 아니라 시리즈로 나오는 드라마나 코미디에서도 등장하는 걸 보면 확실히 대세임에 분명하다. 공포영화를 즐기는 이유는 역시 긴장과 이완의 반복이다. 하지만 좀비물은 조금 다른 장르적 성격이 하나 더 있다. 고립감에 대한 공감이다. 물리면 전염되는 상황에서는 어딘가 스스로를 가둔다. 이때 거의 예외없이 영화와 드라마속 인물은 거리로 나가고 사람들을 만난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이들은 함께 싸울 전투능력 상승에 대한 기대보다 생존자에 대한 반가움을 더 크게 느낀다. 고립된 상황을 영화로 간접경험한 관객은 누군가와 마주하는 그 순간, 긴장이 풀리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무서운 대상에서 느끼는 공포와 고립의 절망감이 동시에 있다는 뜻이다.

    바이러스로 인해 최소한 지금 한국사회는 잠시 멈추고 있다. 세계 어딘가 사람들은 여전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처럼 살고, 또 다른 어느나라는 전염병과 싸우며 매일 장례를 치루기도 한다. 하지만 최소한 한국은 잠시 멈춤을 선언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긴 어렵다. 처음이라서 그렇다. 유사한 사례를 참조하지만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우리의 정서를 지배하는 건 분명하다. 마스크를 쓰고, 한 공간에 사람들과 함께 있지 말라고 경고한다. 바이러스의 전파는 감염자로 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회합이나 파티는 물론이고, 직장과 학교등 같은 공간에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경로가 생기니 일단 피하는 것을 택했다. 감염보다는 현명한 선택인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구의 대다수가 마스크를 사용하고, 재택근무나 온라인 수업등으로 대체하면서 직접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으로 부터 자유로와지기 위해 개인공간으로 피하는 것을 강조한다. 자유로와 지기 위한 고립인 셈이다. 연일 질병관리본부의 브리핑에서는 “의사소통은 가급적 온라인으로 하시고…”를 들을 수 있다. 인간은 의사소통을 몸으로 한다. 문자와 음성언어만이 아니다. 순간 순간 무한대로 발생하는 표정과 억양, 제스처등의 조합이다. 그래서 현재는 임시 또는 차선책이라고 느낀다. 과연 그럴까. 수 많은 석학들은 새로운 시대의 진입을 예고한다. 경제구조와 그 베이스가 되는 일터나 학교의 구조가 변화하고, 사회생활과 의사소통의 표준이 달라질 것이라는 예측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어떤가 생각해 보자. 인구가 밀집한 도시에 살면서 하루 종일 수 많은 인파속에서 머물러야 한다. 출퇴근 시간의 대중교통은 상상만 해도 멀미가 난다. 아동과 청소년의 삶은 어땠는가. 학교와 학원등의 교실에 머물러 있고, 걸핏하면 강당에 모이거나 떼(?)를 지어 수학여행에 참여해야 했다. 밀도높게 앉고 줄서서 이동하는 것을 반복했던 건 사실이다. 이런 풍경은 전염병이 돌기 이전에도 문제였다. 다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에 가깝다. 지금 우리사회의 상황은 코로나19의 이전을 상상하며 자유로와지려는 고립을 강조해야 할 때는 아닌 듯 하다. 오히려 이 상황을 지났을 때 우리가 문제라고 느끼지 못하던 소비문화와 집단의 효율성에 대해 기준을 달리 놓는 것이 더 생산적이며 건강한 실천이 될 것이라고 본다. 어찌보면 지금 우리가 느끼는 고립감은 지향을 달리 했을 때 가까운 사람과의 친밀감으로 전환되고, 의사소통의 방법은 더 구체적이고 다양해 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다만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전제로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곤란해진다는 의미다.

  2. 아이들에게 시간이 생겼다.

    가끔, 어른들에게서 듣는 그들의 어릴적 이야기가 동화같은 느낌을 주곤한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를 건너면서 전혀다른 성장환경을 전해 들을 때 그렇다. 플로피 디스크를 썼다거나, TV가 흑백이었다고 말하는 식의 세대차이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를 간혹 듣는다. “오후 부터 동네 아이들과 신나게 놀았어. 뭘 했는지 기억도 잘 안나지만 다들 논밭을 뛰어다니면서 놀았지. 겨울이면 어둑어둑 해질 때 헤어지지만, 낮이 긴 계절은 그렇지 않았어. 신나게 놀다보면 집에 갈 시간이 다가오지. 40-50년대에 시계를 가진 애들이 있었겠어? 그 신호가 있었지. 초가지붕에 하얀 박꽃이 피면 집에 가야할 때가 된거야. 박꽃은 밤이 되면 하얀 꽃이 보이거든…” 전화기에 알람을 맞춰 놓고 아침을 시작하고, 시간표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우리사회에서 박꽃이야기는 동화처럼 느껴진다. 박꽃이 멸종한 것도 아니고, 해지는 시간이 크게 변한것도 아닌데 판타지에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가 되었다. 시간관리(?)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좀 낯설게 받아들여 보면 어떨까. 시간을 관리하는 것인가 시계가 날 관리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식으로 한번 일부러 뒤집어 생각해 보자는 뜻이다. 물론 진부한 말장난이기도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대입해 보면 어른이 허락한 시간과 스케줄에 꽉 채워져 끝없이 눈치 보며 성장한다는 걸 부정하긴 힘들다. 그 시절에는 시간 개념이 없었는가. 다들 바빴다. 오히려 더 시간을 꼼꼼히 썼다. 대부분의 생산이 가족공동체의 노동량에서 결정되었을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계가 관리하는 것 보다 자연의 순환과 흐름에 맡겼다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성장기의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훨씬 시간의 자율성이 높게 주어졌다. 그렇게 몸이 판단하고, 환경을 관찰하고, 자연스럽게 시간을 익히며 살 수 있었던 시절이 채 50-60년전이었다니 놀랍다. 시간이 생겼다. 이 역시 조금 낯설게 받아들여보자. 시간은 생기고 사라지는 물성을 가진 것이 아닌데 왜 이렇게 표현하게 되었는가. 아이들의 시간을 누군가가 거두어 들였기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최근 아이들에게 꽤 긴 시간이 주어졌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이 시기. 부모는 오히려 시간을 빼앗겼다고도 말한다. 지금이야 임시, 잠시, 어쩔 수 없다고 하기에는 불과 1년전 오늘과 같은 상황이 다시 돌아오리라고 쉽게 생각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학교와 학원을 뺑뺑돌던 아이들에게 자기 시간이 주어졌는데, 부모는 그 시간을 이렇게 쓰라고 강조하느라 자기 시간을 빼앗긴다. 그 동안 시간개념에 대해 아이들과 상의해 본 경험이 없는 어른들은 패닉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전염병으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는 지금 상황은 어른들도 버겁다. 시간에 대한 아이들과의 상의(또는 협상?)를 시작할 때다. 지금까지는 버겁지 않은 척 하면서 이 답답함을 극복하자고 했다면, 부모인 나도 괜찮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고 테이블에서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 그 누구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어른은 해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대화를 하지 않는다면 이 협상은 진척이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아이들과 상의하는 것. 의견을 구하는 것. 이런 대화가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라이프스타일에서 단번에 이 시간을 어떻게 쓸(?)것인가에 대한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2020년의 상황을 수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쩌면 아이들에게 자기의 시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오늘부터 협상을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3. 가중된 정보불평등

    우리는 수 많은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한다. 얼마전 가깝게 지내는 선생님 한분이 이런 말을 꺼냈다. “선택은 마치 여러가지 중 하나를 결정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여러가지를 포기하는 것과 같지” 다분히 냉소적인 말처럼 들리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또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처럼 한번 포기한 결정은 다시 최초의 에너지가 되지 않는다. 삶에서 수 많은 선택의 순간이 있고, 얻는 것은 잃는 것과 교환한다. 그렇지만 주목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우리가 고를 수 있다고 믿는(또는 착각하는) 선택지의 정보량이다. 예를 들어보자. 낯선 여행지에서 밥먹을 때가 되어 식당을 찾는다. 여행의 경험이 없는 친구에게 묻는다. 뭐 먹고 싶어? 이때 할 수 있는 말은 지극히 한정적이다. 무엇을 먹을지 선택한다는 것 이전에 어떤 정보가 필요하다. 처음하는 경험이니 새로운 식재료와 환경을 접하면서 음식취향은 넓어진다. 입에도 댈 수 없었던 맛과 향은 어느 순간 생각나고 다시 먹고 싶은 선택지에 자리한다. 즉, 이전 경험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음식을 선택한것이 아니라 다양한 감각정보를 취하는 것이 선결과제가 되는 셈이다. 어느 청소년센터의 입구에 설문조사(라고 써있지만 그건 설문은 아니었다)를 위한 입간판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새로 개관한 이 센터에서 청소년 스스로 원하는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선택하고 스티커를 붙여달라는 안내가 써 있었다. 총 네개의 프로그램이름이 써 있고 스티커가 많이 붙은 프로그램은 우리가 익히 들어본 강좌다. 이 설문조사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프로그램을 개설하고나서 청소년이 “스스로 선택한” 또는 “원하는”것이라고 할 수 있을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2020년 우리사회는 교육장면에서 수 많은 포기를 해야 한다. 또 한번 뒤집어 생각하면 선택의 순간이 온 것이다. 집합금지란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이해가능한 범위안에서 용인된다. 하지만 일상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교육은 온라인을 택했다. 교과과정은 이미 넘칠 정도의 영상콘텐트화 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대면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할 이유는 굳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경험의 양을 넓히기 위한 상호작용. 이는 저장된 정보만으로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아직은 의미 있는 시도란 걸 부정하기 힘들다. 그런데, 수 많은 부모들이 동시에 바빠졌다. 온라인에 접속하고,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컴퓨터를 세팅하고, 수업시간을 체크한다. 학교의 온라인 수업 뿐 아니라 다양한 경험의 양을 축적하기 위해 멈추고 싶지 않는 배움의 장이 온라인에서 열린다. 역시 마찬가지다. 세팅하고 접속하고 지켜봐야 한다. 물론 처음하는 경험이라 우왕좌왕하면서 적응하는 기간임에 분명하다. 그 결과 다수의 보호자는 신경쓰고 애써야 하는 일이 늘어났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이 보호자가 없거나 이를 도와 주지 못하는 부모와 함께 사는 아동과 청소년의 경우다. 아동과 청소년의 양육과 성장에서 우리사회는 이미 가정을 벗어난지 오래되었다. 교육을 사회적 기능으로 전환하고 부모가 할애했던 시간과 책임을 사회교육기관등으로 위탁했다. 지금의 비대면상황이 오기 전에도 정보는 평등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교육등에 대한)의지만으로도 정보에 닫는 것이 위탁한 교육기관을 통해 가능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놓였다 해도 정보에 닿기 위한 환경자체에서 소외되는 아동과 청소년이 생겼다는 뜻이다. 해법이 있는가? 모르겠다. 가중되는 정보의 불평등은 양극화를 가중시킬 것이란 결과가 예상되지만 문제해결에 어떤 방법이 있는지 답답하다. 이런 문제의식을 많은 사람이 공유하고 있을 때, 우선 내 발등에 불 끄는 것이 먼저이니 남이야 어떻든 상관없다고 외면하지 않을 때 해법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남아 있다.

  4. 창의환경

    시리즈소설이나 드라마를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다. 아마 긴 호흡의 이야기에 집중을 못하는 탓이라 생각하곤 한다. 여행 중 숙소에서 케이블방송으로 우연히 응답하라1988 한편을 본 기억이 난다. 전후 맥락을 모르고 보긴 했지만 참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주인공인 둘째 딸의 생일은 언니 생일에 묻어서 지낸다. 언니의 생일케이크에 불을 끄고 다시 초를 꽂아 주인공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 결국 폭발한다. 통닭 한마리에 닭다리는 언니와 동생에게 나눠주고, 계란이 떨어지면 주인공에게는 콩자반 먹으라고 권했다. 생일상 앞에서 울며 소리 지르고 학교로 간다. 저녁에 아빠가 둘째 딸을 구멍가게 앞으로 불러내 생일케이크를 주며 말한다. “미안하다. 아빠가 몰라서 그래. 첫째는 어떻게 키우고, 둘째는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나도 몰라.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거든”이라고.

    전문가인척 하는 것은 쉽지만 초보라 말하는 것은 어렵다. 많은 분야에서 전문성에 대한 과한 찬양이 만들어낸 사회적 부끄러움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분명히 다르다. 판데믹을 선언하고, 전염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아동/청소년의 교육을 이어나가야 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환경을 만들어왔다. 창의력을 교육으로 만들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집단실험을 거쳤다. 인간은 이미 내재하고 있는 창의력을 가진 존재다. 단지 어떤 환경과 만났을 때 창의력이 촉발되고 발현한다. 정리하자면 창의적 행동과 창의력은 환경을 통해 발생빈도를 높인다. 결국 핵심요소는 창의적 발상을 담은 교육프로그램과 창의적 행동을 업으로 삼는 작업자, 그리고 창의환경. 이렇게 세가지 주요요인(key factor)이다. 이 중에서 모든 것의 기반이 되는 것은 역시 환경이다. 그. 런. 데. 집단시설이 통제되고, 집합이 제한되었다. 물리적 환경에 모이는 것이 어려워진 현재 콘텐트생산에 주력하게 된다. 하지만 창의력의 발생빈도를 높이는 환경이 사라진 것에 대한 대체 가능한 그 무엇을 찾는 것에는 역시 우리도 잘 모른다. 솔직히 초보란 뜻이다. 허나 분명한 것은 환경이 촉발했던 어포던스(Affordance/행동유도성)는 가장 큰 고민이 되었다. 창의환경에 물리적 접촉과 곁눈질로 상호관계를 만들고 참여와 모사, 모방, 반복, 재조합이 가능했던 그 집단역동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에 포커스 하기 시작한다. 창의환경이 학습자가 사는 공간이라면 어떨까라는 실험과 참여자간의 교류와 의사소통이 온라인에서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시도해야 한다. 단지 패키지로 만들어진 키트와 매뉴얼, 설명하는 동영상강좌로 창의력을 흉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과제와 과업을 수행하도록 감시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교육자의 역할로 머물지 않아야 하기에 그에 따른 적응과 트레이닝이 동반되어야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잘 모르기에 참여자도 그의 보호자도 시작점에 함께 섰으면 한다. 그렇게 같이 걸어야 하는 길 위에 섰다는 것을 수용하기까지 우리는 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꽤나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을 확신한다.

질문과 대답

ARTICLE 1993-03-16
  1. 좋은 선생이 되는 방법은 있는가?

그렇게 살면 된다. 자신이 가르친 삶대로 사는 모습을 학습자에게 노출시키는 것 이상은 없다. 교과 역시 이런 철학을 토대로 한다. 교사가 알게되는 과정이 얼마나 즐겁고/신나고/유쾌한 경험이었는지를 전하는 것이 방법론이라면, 그래서 나의 삶이 충만해 진다는 철학을 실천하는 삶이 드러나야 한다.

  1. 공교육, 특히 초등교육은 어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건 단지 교육권. 즉 권리의 문제를 가지고 접근하면 곤란하다고 본다. 초등교육은 문화. 조금 더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문명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사회를 구성한다. 혼자보다 협업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진화의 관점이다. 그 존속을 위한 것이 문화의 전승이다. 중등교육이 사회적 필요에 대응한다면, 초등교육은 문화의 시작점에 놓인 개인에 대응한다.

  1. 교육과정이란 어떻게 만들어지고 왜 그것을 따른다고 보는가?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과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고 말한다. 동의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래서 교사의 질적 성장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허나 개인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공교육은 그 기준을 찾아내고 학습자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교육과정은 그 기준점이 된다.

  1. 4차산업혁명시대의 교육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우선 4차산업혁명에 대비하는 교육이라고 표현하게 되면 아이러니 하게도 이미 혁명은 일어난 상태에 적응하기 위한 것 이외에는 할게 없어진다. 즉, 4차산업혁명 이후 변화한 사회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과제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정보를 다루는 방법과 그 정보의 집약결과인 AI나 딥러닝 프로젝트등 정교한 자동화와 예측방법등이 생산력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산업혁명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마치 교육이 산업의 일부 또는 산업과 생산을 위한 인간을 양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이 오히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이 교육의 기능이 아닐까라고 반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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