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활동(?)가를 만나 인터뷰 한 후에 쓴 원고의 일부

ARTICLE 2020-12-06

우리는 쉽게 공동체를 말합니다. 흔히 공동체는 의식을 공유하는 집단을 지칭합니다. 그것은 미래나 운명을 같이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공동체는 그런 거창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너무 쉽게 입에 오르내립니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가 가진 생각을 가장 잘 이해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만, 자신이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첫번째 어른이 부모였다는 것을 잊기 쉽습니다. 즉, 모두가 다르게 성장하는 객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합으로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가 형성될것이라는 신념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결국 허상을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먼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상상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주거지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었을까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내 고장 내 마을이기 때문에 지키고하는 사람이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지금 거주의 결정을 내리는데 중요한 요인은 경제력입니다.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재산의 정도에 따라 대부분 결정되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입니다. 안타깝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경제적 수준에 따라 주거를 결정하고, 살다보니 적응하고 익숙해 져서 정주성이 형성되곤 합니다. 지역사회에서 나고 자랐다 해도 이주를 결정하는 가장 큰 이유 역시 경제력에 의해 좌우되기 쉽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떠나서 새로운 문화적 경험을 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당연한 욕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속해있는 지역사회가 순수하게 자기주도적인 결정이라고 보긴 어려워집니다.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어쩔 수 없이 지금의 지역을 선택한 사람도 꽤 많을 것이며, 언제든 부의 정도에 따라 지역을 옮기고 싶어하는 욕구 역시 적은 수가 아닐 것입니다. 감추지 않고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지역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사업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업이란 형식을 빌어야 하기 때문에 따뜻한 사람들의 마음씨를 키우거나, 부족한 것을 메우면서 애향심을 북돋아야 한다고 말할 수 밖엔 없기 때문입니다.

공공지원사업이 되는 순간 실체로서 공동체는 드러나기 힘들고, 사업체로서 공동체가 더 부각되기 쉽습니다. 더구나 지원사업의 형태가 행정에서 주도하는 것으로 보일 때 훨씬 강회됩니다. 공공성이 가진 함정은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환상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다수의 만족을 따를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합니다. 이제는 익숙한 개념이 되어버린 님비NIMBY나 핌피PIMFY가 집단의 크기와 이익에 대한 문제이며 다수의 만족이라는 이유로 공공성이 훼손되는 것을 목격하곤 합니다. 결국 다양한 개인의 집합이라는 명제와 모두의 이익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사업의 구성과 참여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와 연관된 다양한 지원사업에서도 필요와 요구가 다양하기 때문에 유형화한 사업형태를 최종 목표로 삼거나, 단기간의 사업으로 성과를 드러내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부터 자유로와져야 합니다. 행정기관과 함께 해낼 수 있을까를 의심하면서 지역사회에서 공동체활성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등장했습니다. 대부분의 활동가는 이미 지역공동체에서 선의를 가지고 일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것 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들 입을 모아 말합니다. 그 행동은 사람들을 모으고, 생각을 공유하며, 함께 하니 즐겁다는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래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지원사업을 만나게 되었을 때 조금 더 확장하여 다양한 일을 지역에서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다른 누구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고 필요에 의해 행동을 결정한 사람들을 우리는 활동가라고 칭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최상위의 가치는 물적보상이 아니라 가치를 알아채는 동료가 늘어나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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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공동체, 커뮤티니, 평생교육, 마을등의 이름으로 활동가를 양성하는 교육이 많습니다. 이름을 조금씩 달리 쓸 뿐이지 교육과정에서 다루는 것은 거의 비슷합니다. 모든 교육프로그램이 다 달라야 하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양성교육이 비슷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 양성교육으로 양성이 되는가에 대한 문제는 다릅니다.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활동가가 단지 여가활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살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삶의 태도를 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양성교육은 어떻게 할것인가에서 어떻게 살것인가로 변화하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매우 어려운 시도라고 생각하고, 오래 걸릴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일 생겼을 때 반창고 붙이는 방식에 신물이 난 활동가들이 떠나지 않기 위한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활동가가 자율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과로 부터 자유로와져야 합니다. 공공의 비용을 들였기 때문에 그에 응당한 성과를 내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은 행정기관만이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활동으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성과가 아니더라도 활동가는 다양한 시도와 실패를 통해서 성장합니다. 즉, 성과로 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은 다양한 활동가의 경험을 축적하게 만드는 일종의 양식장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결국 공동체활성화는 공동체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을 남겼는가에 초점이 맞춰질 수 밖엔 없습니다. 사업성과로 축제가 만들어지고, 공원과 텃밭이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애정을 가진 지역사회의 참여자가 없다면 생명력에는 한계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공동체활동을 이해하는게 너무 어려웠다고 말은 공동체활동은 특정한 범주로 정의하거나, 옳거나 그른것에 판단이 단지 사업평가등으로 내려지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자주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사업이 조금이라도 확장되면 사업을 자꾸 분류하여 지원부서가 바뀌거나, 같은 내용의 사업이 다른 이름으로 둔갑하여 늘어납니다. 사업이 확장되면 그때가 가장 큰 위기 입니다. 예를 들어 50년전통의 맛집이라고 해서 찾아가던 곳이 갑자기 프렌차이즈가 되면 그 맛과 멋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결국 고유성이 사라지면 형식이 남고, 형식이 내용을 따라가기 힘들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니까요. 운영하는 사업이 활성화 단계를 거쳐 가능성이 보이면 무조건 확장하려 하지만, 그 고유성을 어떻게 지키면서 더 많은 참여를 독려할 수 있을지 우선 고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럴 때에도 공동체활동을 어떻게 할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에서 어떻게 살것인가를 이야기 해야 합니다.

노인이 행복한 나라

ARTICLE 2020-12-05

사람들마다 여행방식에 대한 여러가지 분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행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누구와 함께 가는가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갑자기 훌쩍 떠나는 여행이 있는 반면 철저히 준비해서 가는 사람도 있다. 커뮤니티와 노인에 대한 글을 쓰면서 여행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는 지난 여름 캘리포니아를 여행하면서 느낀 것을 쓰려고 하는 의도다. 나의 여행스타일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다니는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지내는 여행”이다. 대체로 이곳 저곳을 구경하며 낯선 환경속에 나를 노출시키고는 무엇을 느끼는지 살피는 것이 다니는 여행이다. 비용을 생각하며 하나라도 더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신기한 물건을 만져보는 것이 그렇다. 그런데 이런 여행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즉석요리를 먹고난 느낌 같다. 재료의 맛을 느끼기 어렵고 입으로는 잘 들어가지만 배가 부를 뿐 나에게 영양소를 제공해 줄 것 같은 느낌이 아닌 것 같달까. 그래서 난 대부분의 여행지에 도착하면 한 곳에 주로 머물며 매일 같은 거리를 걷는다거나 단골 식당을 만든다거나 하는 여행지의 일상적 경험에 주목한다. 캘리포니아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머물면서 동네를 산책하고, 도서관에서 책 읽고,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주일이 지나면서 묘하게 이곳의 문화적 특징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공간에서 적응하느라 생긴 호기심이 사라질 무렵 놀라운 것이 보이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주말이 되면 개인의 차고를 이용한 장이 열린다. Garage sale또는 Yard sale이라고 말하는 중고시장은 집집마다 열리기도 하지만 마을에 조금 더 큰 규모로 열리기도 한다. 집에서 안쓰는 물건을 내놓고 파는 것이니 대단한 것은 아니겠으나 생각보다 훨씬 더 작고 사소한 것이 거래된다. 차고에 쌓여 있던 1960년대 어느날의 신문 한부는 2불에 팔리고, 쓰다 남은 기저귀는 협상가능한 가격으로 팔린다. 오래된 가구는 상태에 따라 값이 매겨졌다.

도서관에서는 거의 매월 도서관 재단이 후원하는 행사가 있었다. 주로 헌책을 교환하거나 구매할 수 있다. 이곳에 오는 사람은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 토요일 오전에 시작해서 오후 3시까지 열리는 이 헌책장터는 재미있는 이벤트가 있었다. 오후 1시부터는 5불을 내고 자신이 가져온 가방에 갖고 싶은 책을 한 가득 가져갈 수 있다. ‘그럼 여행용 가방을 하나 가져와서 싹 쓸어가는 사람이 있을텐데...’라는 생각은 이곳의 문화적 태도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매 주말이 되면 도시마다 농산물 직거래 장 Famers market이 열린다. 도시라고 하기 보다는 작은 규모의 마을 장터의 느낌이다. 토요일 또는 일요일에 다운타운의 한 블럭을 이용하여 가까운 곳에 사는 농부들이 농산물을 직접 가져오와 팔거나 가공식품을 만들어 내놓는다. 보통 오전에 시작해서 오후 3시정도에 장이 마감하니 이들이 이 시장에 나오는 것이 생계수단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유통시장은 따로 존재하지만 동네 장터에 나오는 것이 즐거워 보이는 이유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신선한 야채나 과일도 사고 공원에서 가족이나 친구와 점심을 먹으며 주말을 보낸다. 물론 장이 서는 곳에는 크지 않은 규모의 아티스트 무대가 열린다.

문화적인 모든 곳에는 왠지 모를 여유와 뭉클함 같은 것이 있었다. 한국에도 장터가 열리고, 무대가 있고, 공원도 있고, 축제도 있지 않은가. 단지 나는 외국여행 중이니 이런 모든 것이 신기하게 보여서 느끼는 것과는 달랐다. 이유를 알아냈다. 커뮤니티의 문화콘텐트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노인이다. 우리에게도 있는 장터는 동네에 있다기 보다 문화적인 거리에 자주 등장하고, 무대는 홍대나 대학로에 나가야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이 젊은이들의 문화다. 그 차이였다. 야드세일도, 장터도, 거리공연도, 도서관 재단의 행사도 대부분 노인들이 주도적으로 그 일을 해낸다. 심지어 20년이 넘게 진행된다는 마을축제도 진행자부터 스탭까지 대부분이 노인이다. 노인들이 주도하는 문화와 예술의 장에 세대차이를 느끼는 젊은이들은 외면하고 오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축제에서 공연하는 사람들의 절반은 20대/30대다.

축제에 모인 가족들 사이사이에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함께 있고, 20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축제를 즐긴다. 그냥 자연스러운 풍경속에 모든 세대가 공존한다. 이 모든 문화와 예술을 주도하는 노인들의 움직임으로 보면서 느꼈던 것이 뭉클함의 실체였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희망을 정의하는가. 모두에게 평등한 권리를 준다고 약속하는 사람이 희망을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책의 대안을 가지고 있어서 당신의 미래에 희망을 선물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사기에 우리는 수 없이 속으면서 희망을 말하고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번 캘리포니아 여행은 커뮤니티의 문화를 주도하는 노인과 지역사회를 만나게 된 것 같다. 문득 지금까지 함부로 사용하던 희망이란 단어를 설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은 윗세대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 살때 자연스럽게 생긴다. 노인이 행복한 모습이 지역사회에 노출되면 그 마을이 행복하다. 지금까지 마을의 행복은 어린이의 밝은 웃음속에 들어있다는 추상적인 상상만 하면서 살아왔던 내가 스스로 한심해 졌다. 복지제도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서비스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지역사회에 머물지 않았으면 한다. “노인의 행복”이라는 키워드가 “커뮤니티의 희망”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우리사회의 노인의 모습은 행복한가.

영화 속 사진읽기_강의자료_Finding Vivian Maier

ARTICLE 2020-12-04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Finding Vivian maier)

역사책을 쓰고 있어서 사진이 필요했다는 다소 설득력 떨어지는 내레이션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빈티지 상점이나 경매장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찾는다. 그러다 우연히 네거티브 필름을 발견하고 집으로 가져온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리면서 수집으로 묘사한다. 영상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는 개연성이 떨어지고, 작가가 열심히 프린트 하면서 사회적 실험(미술관을 찾는다거나, 예술계의 태도를 겨냥한 발언을 한다거나)을 거듭하는 것이 진심으로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에 감동을 받은 다큐멘터리 작가의 시선이라기 느끼기는 힘들어 보인다. 다만 다큐멘터리를 잘 만들고자 하는 의식적 행동에 가까와 보인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사진과 예술에 대해서는 그렇다. 더구나 2009년 이후 디지털미디어가 다양한 형식(비형식, 탈형식을 포함한)을 실험하며 가속화하는 변화추이에 따라 “사진”을 바라보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몇 가지 질문이 생긴다.

예술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정 받아야 하는 문화적 텍스트인가?

현재의 이슈인 초상권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2차저작물이 만들어질 때 원저작자의 권리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면 이 영화는 “신상털기”에 해당한다. 작가는 어떤 윤리의식을 가져야 할까?

필름 한 롤이라고 해도 모두 공개하는 작가는 드물다. 셀렉팅의 예술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작업결과가 그녀의 작품이라고 말해도 될까?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비비안 마이어가 있는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가 있고, 사회적으로 약속한 범위가 있다. 이 모든 것은 혼재 되어있기 때문에 명문화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즉, 그것이 입장의 차이거나 그 시대에 통용되는 가치에 따른 다양한 “해석의 결과”다.

2018년 상상력발전소 기고글

ARTICLE 2020-12-04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흔한 투덜거림 중 하나가 일기예보다. 분명히 오늘 아침 예보로는 오후에 비가 온다고 했다. 그래서 우산을 챙겨나왔는데 쾌청하다. 우산 하나를 들고 다니는 것이 몸의 움직임에 엄청난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도 하루 종일 우산을 볼 때면 불평하게 된다. 기상을 예측한다는 건 인간의 생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다양한 방식으로 예측을 해왔다. 동물의 움직임을 보면서도 판단하고, 어젯밤 달무리의 모양새를 보면서도 다음날을 예상하곤 했다. 그만큼 날씨는 우리의 삶에 많은 것을 차지하기 때문에 흔하게 투덜거릴 대화의 소재가 된다. 최근들어 이 흔한 투덜거림이 더 많아졌다. 한국인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디지털디바이스에서 그 정보를 얻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하늘색이 바뀌면 날씨정보를 찾거나 앱을 열어 확인한다. 그리곤 기상정보 업데이트가 지금 자기 몸이 느끼고 있는 정보와 동일한지 확인한다. 어찌보면 좀 쓸데 없는 일이다. 물론 운항을 나가야 하는 파일럿이거나, 고기잡이 배의 선장이라면 꼼꼼히 체크한 기상정보와 수년간의 경험으로 오는 예측으로 판단을 내릴 것이다. 그런 이유로 기상정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우산을 하루 정도 들고 다녔다고 해서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일기예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어서 참고할 뿐이다. 예보 자체도 그렇게 구성되지 않는가. 하지만 기상정보를 손쉽게 얻기 시작하면서 달라진 것이 있다. 체감하는 것의 중요성을 잃어가는 느낌이랄까. 지금 춥다면 온도가 내려간 것이고, 저 멀리 하늘에 먹구름이 있다해도 비가 오지 않는다면 그저 흐린 날일 뿐이다. 햇살이 쨍쨍한데 오늘 비온다는 온라인 정보를 읽으면서 ‘일기예보란 믿음이 안가는군’이란 마음의 소리가 굳이 필요 없을텐데 말이다. 날씨예보에 오늘 흐리고 비가 온다고 써 있다 해도, 체감하는 자신이 느끼는 정보가 진짜다.

2018년 상상력발전소는 성수동에서 열렸다. 매해 열리는 행사(?)라지만 또 다른 환경을 탐색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상상력발전소의 주요컨셉은 이미 정해진 상황이어서 커미티가 결성되는 시점이 조금 늦었다는 생각을 했다. 반면 이런 성격의 전시와 파티에는 너무 큰 책임감 없이 참여하는 것이 즐겁기도 한 법이다. 전시를 설계하면서 가장 큰 이슈는 성수동일 수 밖엔 없다. 인간의 사유방식은 사고와 대화를 반복하면서 생기는 마찰과 충돌의 결과로 완성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성수동은 매력적인 곳인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더 필요했다고 욕심이 생기지만 어디서든 그 아쉬움은 남는다. 성수동은 오랜시간 쌓아올린 장인의 삶터가 아니던가. 상상력발전소가 지향하는 기본적인 가치는 예술이 작업자를 향하고, 장인이 예술가가 되며, 테크놀로지의 정점에 인간감성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수십년간 쌓아온 장인과 제작문화가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 예술이 조금 다른 관점으로 지역과 사람들을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어찌보면 진부한 발상이기도 하다. 여전히 지켜야 하는 것과 새로운 문화가 만나야 한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어서 그럴게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진부한 발상과 행동이 또 얼만큼의 시간을 견디며 쌓여질 것인가가 중요하다. 누군가는 뻔한 결론이니 그만 하자고 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상상력발전소의 새로운 방법론을 내 놓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공공의 지원이나 공공영역의 해석방식에도 특정한 사명감이 부여되길 바란다. 그래서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퍼포먼스와 관람객의 수로 몇 마디 평가로 방향이 전환되기에는 아까운 사업이라고 판단했다. 성수동의 수십년간의 역사가 지금의 모습으로 평가되길 바라지 않듯 상상력발전소 역시 인스턴트에 가까운 쓰고 버리는 시도에 그치지 않길 바라는 바람이 생긴다. 짧은 준비시간은 늘 좋은 핑계가 된다. 어차피 준비할 시간이 짧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과업이 있어 해내야 하는 것 보다는 자율적 판단으로 자신이 해야하는 이유를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이 참여한 사람들이 가져야 할 태도다. 2018년 상상력발전소도 짧은 준비시간에 촉박한 일정을 견뎌야 했다. 작가를 선정하고 준비하는 동안 성수동에 대해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역시 그런데도 참여해야 하는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결합한 것이 즐거운 일이었다. 결국 해내야 하는 이유는 없더라.

급변하는 사회, 달라진 문화, 적응하기 힘든 속도전쟁.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곧 들어왔다.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들어야 하는 소리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따라오는 이야기는 앞으로는 이렇게 될 것이라는 예측. 혁명이 다가온다고 선언하고, 대비하며 살아가라는 말을 쉽게 한다. 우리는 그 수 많은 미래예측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를 생각했으면 한다. 마치 일기예보를 보면서 현실과 비교하면서 맞네 틀리네를 말하는 모습으로는 오늘 나와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간다. 그 감각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라스코 동굴벽화를 보며

ARTICLE 2020-12-03

언젠가 라스코 동굴벽화를 보면서 몇 명의 아티스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라스코 동굴벽화가 인류가 그린 첫 번째 그림은 당연히 아니고 그 보다 몇만년 앞선 예술 행위는 각지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라스코 동굴벽화는 잘 알려진 그림이기도 하고, 표현방식이나 예술적 각성을 이야기하기에 적합하다. 우리의 대화는 어디서도 본적 없는 최초의 경험과 독립성을 가진 설렘에 대한 것이다. 현재 우리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라고도 하고,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라고도 하면서 역사 속 시각예술품을 보며 산다. 더구나 미디어는 각종 작품을 다채널로 재생산하며 우리 가운데 있다. 잠깐 그리는 행위를 생각해 보자. 무엇을 그릴까 관찰을 시작한다. 피사체에서 중심이 되는 선을 나의 감각으로 옮겨 넣는다. 그 작업이 쌓이는 과정이 수련이고, 그 반복 행위가 모여서 작가가 탄생한다. 라스코 동굴벽화를 그려 넣었을 그때, 비교할 그림도 없고 다른 그림을 본 경험이 없었을 그 상황은 표현의 자유가 극대화된다. 그들은 행위를 무엇이라고 정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실험적일 수 있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초기 인류가 남긴 드로잉은 잘 그리고 못 그린다 뿐 아니라 그 행위가 무엇인지조차 비교할 대상이 없었다. 즉, 지금의 행위에 온전히 집중하고 작업할 수 있으며 독립적이라는 의미다.

문화공간과 문화환경_예술교육공간을 세팅하려는 사람들에게 보낸 레터

ARTICLE 2020-12-02

문화를 삶의 양식이라고 조작적 정의를 해 본다면 일상과 문화의 관찰을 통하여 사회적 관계 안에서 성장할 수 있게 돕는 것이 문화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문화적 행위를 포함한 문화활동이 문화시설을 근거로 발생한다고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모든 문화행위는 삶의 근거지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문화적 공간이 주어졌다고 해서 활발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예를 들어 학교문화를 상상해 보자. 학교에서 문화의 발생은 교실과 교실을 이어주는 복도이고, 하교길의 골목이며, 어른들의 간섭이 최소화된 자율적 공간에서 시작한다. 일상으로 그 연결고리가 된 삶의 연장선에 있지 않은 문화는 타자에 의한 조직 또는 조작에서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문화공간은 문화환경의 연장선에서 시작한다. 문화예술교육의 근거지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우선, 문화활동은 문화공간에서 일어나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이 필요하다. 문화공간이 충분하다면 급속하게 문화활동이 일어날까 라는 의문이다. “충분”이라고 하는 기준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문화적 환경과 문화공간은 연관성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문화예술회관, 문화원, 문화의집, 문화센터 등등. “문화”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는 문화공간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더구나 지역의 국공립도서관, 다양한 규모의 갤러러, 작은도서관, 평생교육센터, 예술창작센터등 여러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때 문화행위가 공간이 규정하는 것으로 출발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보아야 한다. 즉, 문화행위 기준이 되는 것이 공연을 보고, 예술콘텐트로 동아리를 만드는 것 등의 단순한 패턴이 우선 연상된다면 문화예술교육의 장을 협소하게 상상하는 것에 그치기 쉽다. 문화예술교육은 기존의 교육패러다임으로 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 왔다. 정책과 제도, 사업등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철학과 그 노력이 변질되어 보이기는 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문화예술교육매개자인 교사가 있고, 이미 생산해 둔 교육 콘텐트를 커리큘럼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 콘텐트를 소비할 학생이 있다면 가능할 것이라는 단순한 발상은 일단 제외해 두자. 모든 사람을 위한 예술이 모두에게 똑같은 내용과 형식의 문화/예술교육으로 일관성있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발상자체가 비문화적, 반예술적 행위이기 때문에 말하고 싶지 않은 테마다.

공연시설을 운영할 주체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일을 하는가에 따라 “문화공간”이 되는가 “대상을 만족시켜 실적을 만드는 공연시설”이 되는가로 구분된다. 문화가 형성되고 예술행위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곳은 요구에 의한 자생적 발생이고 문화예술교육은 스스로 재생산 구조를 끊임없이 생산해 낸다. 즉, 공간을 매개로 한다는 말은 그 자연스러움을 이해한 사람들로 부터 나오는 요구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지금의 문화예술교육이 발생하는 공간은 대부분 자연스럽다기 보다는 억지스러움에 더 가깝다. 더구나 지역문화가 담아낼 수 없는 (오히려 외면하는) 공간자체가 생겼다고 해서 새로운 문화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예는 지역에서 쉽게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지역에서 몇 몇 사람들이 의기투합하여 엄청난 예산규모를 끌어들여 문화시설을 지어 놓았으나, 적당한 콘텐트를 만나지 못해 정체성자체가 흔들리는 경우는 허다하다.

더구나 대량생산하려는 의지는 문화예술교육의 공간적 개념으로 부터 점점 멀어지게 한다. 공연 및 그와 관련한 시설을 만든다고 가정해본다. 대단위 공연장을 중심으로 하거나, 전시실을 만드는 것에 주력한다.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진 불특정 다수의 개인과 집단이 함께 공연장을 사용하려고 하면 그 인원수가 가장 중요하다. 물론 큰 공연장이 때론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자생적 문화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보통사람이 공연장에서 소비재로써의 예술콘텐트를 향유하면서 문화예술교육의 가능성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험재로써의 문화와 예술에 접근하면서 문화예술교육의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균형감 있는 문화예술교육 세팅의 태도다. 교육을 통한 자발적 공연 콘텐트가 생겨났을 때 대규모 시설에서 관객을 채우느라 급급해야 하는 이유는 없다. 더구나 소규모의 교육생집단이나 동아리들의 다종 장르를 모아 발표회 형식을 만들었을 때 그 맥락없는 나열밖에 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지 않은가. 문화시설이나 공연장, 예술활동이 가능한 시설을 만들 때 가급적인 소집단의 다종생산이 가능하도록 디자인 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그것이 문화예술교육공간 설계의 기본이다. 밴드연습실이 있다면 그 연습실을 무대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천명의 객석을 확보하는 공연장 하나를 만들려면 100-200명단위의 공연장 여러 개로 분할하는 것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적합하다. 예산이 항상 문제라고 말한다. 지금 현재 시민이 이용할 수 있는 공연장에 가보라. 초기 예산으로 각종 장비를 들여왔는데 전혀 사용하지 않아서 처분되는 장비들과, 보기에서 그럴싸 하게 포장하기 위해 준비된 것들이다. 사용자중심에 서서 공간이 확보되는 것에 주력하는 것이 우선이다.

평상을 찾다.

ARTICLE 2020-11-30

의사소통은 타인의 생각이나 실천에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표현의 이유와 닮은 듯 차이가 있는 것도 변화를 요구하는 화자의 실천행위라는 측면이다. 의사표현은 욕구 또는 욕망을 담아내기 바쁜데 비해 소통은 타자와 교류하는 것을 말한다. 타인에게 단지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인간은 미디어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천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이해받기 위해 미디어가 진화했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 의사소통을 혁신적으로 전환시킨 몇 가지 (발견 또는 발명으로 습득하고 체화한)미디어를 나열해 본다면 몸-소리-음성언어-문자-인쇄-전파와 통신기술-컴퓨터-온라인 네트워크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한다. 물론 이 모든 미디어는 인간의 사용을 근거로 발견했거나 만들어졌다. 또한 이 모든 미디어가 우연이든 필연이든 의사소통을 돕는데 종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뉴미디어의 탄생을 마치 지금까지의 불통을 해소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굳이 아니라고 우길 이유는 없지만 생각해 봐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인구가 늘고 집단을 형성하고, 그 집단에서 문화를 만들어 가노라면 사용해야 하는 새로운 언어와 미디어가 늘어간다. 새로운 언어와 미디어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그로인해 또 새로운 언어와 그 언어를 싣고 나르는 미디어가 탄생한다. 다시 말해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절대시간을 단축하고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이유가 생기기에 뉴미디어가 생기는 사라지는 기간은 단축되고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당연해졌다. 이때 우리를 환기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미디어”그 자체의 개념이다. 모든 미디어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서 인간에게 다가간다. 때로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최고이자 최초의 미디어라고 말해야 한다. 건강한 미디어에는 건강한 인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버추얼...사이버...온라인...네트워크...이제는 이런 단어들도 트랜드에서 조금 벗어난 듯 느껴진다. 소셜미디어, SNS가 화두다. 마치 소셜네트워크를 모르거나, 사용자의 입장이 되지 않는 것이 사회적 도태를 말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곤 한다. 하긴 이 사회의 대부분의 정보가 신문과 TV를 넘어서서 웹으로 움직였고, 웹이 정보를 집적하는 공간에서 분화되는 공간으로 향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정보는 곧 생산력과 비례했다. 역사적으로 그랬다.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잘 듣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던 사회에서 생존을 위한 생산력을 얻는 경위를 따져보면 된다. 사냥하는 방법과 수렵, 이동, 집단생활의 모든 것을 선 경험자의 언어와 행동으로 동 시간에 경험해야 했다. 이를 위해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고 윗세대의 정보는 나의 생존과 직결되었다. 그렇게 쌓여온 것이 지식을 넘어선 지혜가 되는 과정이었다. 시간이 흘러 기억과 경험에 의존하던 정보가 기록되기 시작했다. 기록은 읽고 쓰는 능력을 요구했다. 자연스럽게 기록된 정보를 누가 갖는가에 따라 생산력이 달라졌다. 지식은 문자에 의존했고 사람들은 그 기록된 정보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경험과 지혜를 기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커뮤니티가 확장되고 보다 복잡한 사회를 구성하면서 효율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모든 감각을 열어두려고 노력하지 않고, 기록된 정보에만 매달렸다. 그것은 시각정보였다. 정보는 갖게 된 사람은 생산력을 얻게 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많은 인구가 기록된 정보를 얻고 싶어 했다. 놀랍게도 그렇게 쌓여진 정보들은 지식으로 쌓여갔다. 그 지식을 득한 사람들은 또 다른 정보를 가공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또 다른 생산력을 갖게 했다. 정보와 지식의 교류방식과 태도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방식과 같은 것이었다. 전기와 전파는 수신기를 가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사회는 이렇게 순환되고 있는 정보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태시키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스미디어가 창궐하던 시대에 대부분의 인구가 라디오와 TV를 그렇게 까지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구성원으로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는 미디어를 통한 정보유통 채널에서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이것 역시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생존과 직결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이런 미디어는 미디어문화를 형성하고, 단 한 번도 예술적 삶과 떨어져 있던 적은 없다. 인간감정을 묘사하려 했고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생존과 직결된 정보라지만 인간이기에 풍요로운 삶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문학적 상상력이 그러하며, 인간의 감각을 무뎌지지 않게 하려는 예술의 노력들이 그러하다. 미디어와 미디어문화의 본질은 다분히 인간답기를 지향했다. 최근 정보채널이 늘어나거나 접근성이 좋아졌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대안처럼 말하는 미디어들이 쏟아진다. 마치 개인의 접근권이 열려있으니 언제든 접속하여 “우리의 통계 안으로 진입하라”는 말처럼 들려서 불편해진다. 처리해야 할 정보가 늘어나면 그에 따른 정보해독에 따르는 집중력이 분산되는 것이 당연하기에, 한 개인이 균형을 찾는 일이란 쉽지 않다. 그 덕분에 다수의 의견이나 말 잘하는 논객의 화려한 언어유희에 속아 넘어가기 쉽다. 메일이 이동전화 문자메시지처럼 실시간으로 들어온다. 스마트폰이 실시간으로 우리 사회를 연결하고 중계해 준다. 편리함을 넘어선 처리할 정보의 양이 늘어났다는 것. 속도와 편의성을 무기로 찾아 온 통신의 혁신적 변화에 그리 좋아만 할 것일까를 생각해보자. 마치 새로운 정보를 남보다 빨리 얻게 되면 쿨하고 멋진 신세계에서 사는 것 같은 환상이 늘어난 것은 아닐까. 미디어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여 풍요로운 인간사회를 꿈꾸는 것이라면 지금의 미디어가 취하는 태도는 그에 반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마치 소셜미디어가 생산력을 높여 줄 것이라는 마케팅의 언어로 언제 어디서든 네트워크에 접속해서 노동하라는 행동지침으로 치환된다면 경계하자는 말이다. 지금 당장 하라는 요구가 늘어난다는 것을 행복에 겨워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곳에서 온라인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라는 광고카피는, 당신이 언제든 일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인간에겐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조절할 자율성도 가지고 있 다. (또는 가지고 있다고 믿거나 전제하고 싶다) 정보를 가진 자가 승자가 되는 사회에 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가. 서양인들은 예로부터 생각하는 모든 것은 표현 가능할 것이라는 억지스런 관념을 명제화 한듯하다. 대부분의 수사학과 언어학의 기초는 그렇게 완성되었다고 본다. 그냥 무시할 법도 한데 학자를 신봉하고, 학설을 떠받드는 사람의 수가 워낙 많으니 개인이 무시한다고 무시될 수 있는 건 분명 아니다 싶다. 몰라도 되거나, 몰라야 하는 정보가 나에게 와서 비효율성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그 스트레스의 정도를 안다. 가족이나 지인과의 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수가 혹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전화벨이나 문자메시지라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가. 스마트폰 사용자들이 트위터에 접속하고 세상을 구원할 듯 말하고 있지만,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과 대화가 방해받는다면 "의사소통을 위한 매체가 의사소통을 방해하는"꼴이다. 온라인에서 의사소통의 대안으로 포장된 소셜미디어는 교류와 소통이 사라진 정치와 특정인물의 욕망이 드러나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이른바 "social"이 지향하고 있는 신념과 확신이 빠진 것에 문제의식이 별로 생기지 않거나, 무리한 사회적 요구로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되면 사람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몰려들 것이 분명하다. 이보다 더 중요 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 집에서 나오면서 만나는 동네사람과 인사 나눌 여유는 있었는지? 친구의 현재 고민을 함께 나눌 시간을 내고 있는지? 문자메시지와 실시간 메일을 확인하면서 부모님과의 통화는 늘어나고 있는지?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망치와 못은 가구를 만들 때나 고칠 때 사용하는 도구다. 하지만 같은 도구를 쓰면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그것이 도구의 본질이다. 미디어가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이며 때로는 도구를 넘어선 문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 현재 모습을 한걸음 떨어져서 살펴보려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간혹 학부모(?)특강 강의를 끝내고나면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그 질문의 핵심은 “청소년이 된 우리아이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어려워요” “방문을 꼭 닫고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 저와 말하는 것이 싫은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럴 때면 나는 대답대신 먼저 확인하고 싶은 생각에 질문을 던진다. “혹시 거실에 소파는 TV를 향해 배치되어 있진 않은가요?” 많은 가정에서 온 가족이 모여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은 거실이다. 그런 거실에서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공간을 디자인 해놓고, 자녀와대화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숨 쉬는 것.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공간을 연출하는 것에는 너무도 인색하다. 물론 아이들이 성장에서 흔히 말하는 사춘기를 거치면서 자기세계가 생긴것에도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와 더불어 어떤 환경이나 조건이 없는 상황에서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다소 무모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들어줄 수 있는 구조와 들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닌데 말하는 것은 참 어려운 것이다. 우리 문화 안에서 집단의사소통이 일어나는 과정을 살펴보면, 수없이 반복되는 오류와 ‘사유방식의 소비적 반복’을 목격할 수 있다. 어제 회의에서 충분히 이야기하고 결론을 내렸건만 다시 만나서 확인하면 간혹 전혀 다른 결론을 말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같은 시-공간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 우리는 이런 오류가 생기는 것을 단순히 화자의 ‘말하기 방법’이나 ‘화술을 펼치는 태도’에서 그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상호작용이란 것이 의사소통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청자의 ‘듣는 방법’이나 ‘경청’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같은 말을 다르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내용을 어떻게 잘 전달하고 잘 전달 받을 수 있게 하는가 하는 구체적 내용에 대한 문제라는 것에 초점을 두어보자. 표현에는 구체적인 단어나 문장의 조합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태도와 적극적으로 듣는 행위가 포함된다. 능동적 경청자에게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은 “잘 전달하여 말걸기”보다 더 중요한 “스스로 말하게 하기”가 들어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즉, 의사소통의 환경이 문제라는 발상이 필요하다. 의사소통의 내용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여도 ‘의사소통의 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가능할리 없다. 소통이 시도되는 타이밍은 항상 어떤 환경에 놓여져 있는가와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문화가 평상이다. 근대 이후 교육이나 정보가 공공영역으로 급격히 팽창되어 가정과 지역사회의 기능이 분명히 약화되었다. 하지만 항상 마을입구에는 느티나무가 서 있다. 느티나무는 그저 한그루의 식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이 시작되는 진입에 대한 상징이다.

사람들은 느티나무 밑에서 마을로 들어가기전 잠시 쉰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시작을 알리는 곳이기에 몸이 그렇게 반응한다. 그곳에는 거의 평상이 있었다. 비를 피하기도 하고, 잠시 누굴 기다리기도 한다. 긴 시간을 걸음에 피곤한 다리를 쉴 수도 있다. 이것이 그 기능의 전부가 아니었다. 평상은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앉게 되는가에 따라 인원구성이 다양하다. 둘러앉거나 마주볼 수 있지만 등을 대고 사적인 공간으로 빠져나올 수도 있다. 그래서 평상에 앉은 사람들은 자연스럽다. 그렇게 평상에 앉으면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 현재, 우리에게 평상은 어디에 있는가.

어떤 공부

ARTICLE 2020-11-30

인문학 또는 인문학 학습은 어떤 특정 시기에 유행처럼 번지기도 한다. 학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이 어째서 유행인가 싶기도 할것이라고 생각 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사회에서 교양과 상식이 근사한 장식품으로 여겨지는 때가 있(었)다.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무크가 생산되고 소비되었던 시기를 생각해 보면, 수 많은 독자가 그 내용보다 형식에 더 끌렸던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디지털기반의 다양한 디바이스가 생겨나면서 형식은 더욱 내용을 압도했다. 그리고 정보는 겉잡을 수 없을 만큼 여러방향으로 교환되기도 하고 부유하기도 하면서 2000년대를 열었다. 2020년 현재 인문학과 인문학 학습은 “학습”자체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에 다다랐다. 그 배경에 오지선다의 답안지에 적혀 있지 않을 법한 책과 글은 청소년에게 더 이상 읽혀지지 않았고, 대학의 기능은 고용에 초점이 된 커리큘럼을 생산해 냈다. 독서는 통독의 경험을 강조하기 보다는, 과제를 위한 핵심정리 요약본과 누군가가 권한 챕터별 읽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어떻게 살것인가 또는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의 삶과 지향에 대한 근본적 물음은 그저 종교활동 정도로 대체되었다. 누군가는 이것이 위기라고 말하겠지만, 또 다른이는 자연스러운 변화이며 정보와 지식의 발전단계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수천년간 인류가 쌓아온 지식과 지혜의 깊이를 전달할 수 있는 매개는 여전히 고민거리여야 한다. 무엇을 매개하는가도 중요하지만, 매개자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은 사회적 과제다. 그렇다고 해서 공공사업이 그 기능을 수행해 낼 것이라는 기대는 그리 많지 않다. 여전히 매개자의 역할은 지식공급과 근사한 언어배달에 그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학습자체에 집중하는 매개자의 탄생은 지적욕망이 필요해지는 사회로 진입할 때 가능한건 아닐까? 그렇다면 최소한 한국사회는 예외다.

다리떨기를 허하라

ARTICLE 2020-11-28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교에서 설문을 돌렸다. "집에 혼자 있을 때 가장 하고 싶은 일은?"이라는 문항에서 의외의 응답을 본적이 있다. 정크푸드를 맘껏 먹거나 온라인게임등이 물론 나왔지만 의외의 답변이 있었다. “다리떨기”였다. 어렸을 때 다리를 떨어서 어른들에게 혼난 경험이 있다. 복 나간다며 못하게 했다. 지금은 다리를 떠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어른들에게 제지 당했기 때문에 고쳐진 건 아니다. 과한 움직임과 소리는 타인과의 교류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지가 생기면서 부터다. 각종 인간행동 연구보고서에는 집중력 향상이나 긴장완화의 효과가 있다고도 주장한다. 때로는 뭔가 기대되고 신나서 다리를 떠는 때도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 다리를 떨지 않는 건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신나는 일도 줄어들고, 호기심 자극하는 상황도 줄어든 건 아닐까 의심도 하게 된다. 그런데 다리떨기라고 답을 쓴 초등학생은 진짜 다리를 반드시(!) 꼭(!) 떨고 싶었던 걸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15세기를 가운데 두고 일어난 르네상스의 예술가 절대다수는 과학자였으며, 새로운 물질과 현상에 대한 탐닉 경향을 드러낸다. 다양한 물질의 조합과 현상의 관찰을 즐기는 "광maniac"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에 몰입하고 호기심으로 반복하는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에 문화와 문명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끝없이 시도하고, 실험하는 경험이 쌓여가는 동안 산업혁명이 다가오고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그들은 창의력으로 세계를 변화시켰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찾아가기 보다 생산된 도구와 물질을 소비하는데 익숙하다. 이때 창의력은 조합하는 능력처럼 여겨졌다.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하다 보니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능력과 기술의 전수가 아니라 가르침의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 시스템은 효율성을 기반으로 동작하다 보니, 시도나 도전이 가로막히는 경우가 생긴다. 다시 말해 대량생산 시스템의 환경에서 배움이 일어나게 되니 개인의 창의력은 한계에 부딪히고, "광maniac"이 등장하기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이때 창의력은 학습가능한 능력인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발상과 구현(또는 실현)능력이 통일되어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이른바 창의력이다. 이는 특정한 콘텐트나 커리큘럼에 의해 교육가능하다는 의견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효율이 떨어지고, 성과가 단번에 나오지 않으며,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즐거워서 흔쾌히 하는 탐닉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을 뒤흔들었다. GPS와 초소형칩셋, 무선인터넷환경과 IoT가 놀라운 속도로 대중화 되었다. 자본은 발빠르게 움직이며 판매방식과 유통망을 재편했다. 지금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의사소통하고 소비패턴의 변화를 주도한다. 이런 기술력의 기반에 결국 과학과 수학, 공학과 테크놀로지로 부터 새로운 발상과 행동이 유발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추론 가능한 요소들이다. 하지만 창의력으로 전환되는 티핑포인트를 만든 건 자발적으로 선택한 시간에 충분한 시도와 실험이 가능한 환경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교육상품을 판매하거나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서 창의력 교육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다수의 창의력 교육은 "창의력=생산성"이라는 프레임에서 훨씬 큰 생산을 위한 방법론으로 시작하는 것에 가깝다. 실제로는 자신이 속한 세계나 다양한 재료를 탐색하고, 스스로 선택한 문화적 행위자가 되었을 때 창의적인 발상과 행동으로 이어질 뿐이다. 제공한 창의력 훈련으로 창의적인 인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때 교육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장 문화적인 환경을 세팅하는 것과, 창의적 발상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서점에서 책을 펼치고 첫장을 읽는데 재밌는 사례가 하나 눈에 들어 왔다. 독창성에 대한 내용이다.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들의 업무특징을 조사했다. 여러가지 특이점으로 분류하여 근거를 찾아보는 방식. 인터넷 브라우져에서 실마리를 찾아낸 사례다. 인터넷 익스프로러와 사파리를 쓰는 사람들 보다, 파이어 폭스와 크롬을 쓰는 사람들이 꽤 높은 비율로 독창적 일처리를 해내고 만족도가 높다는 것이다. 컴퓨터를 구매 하면서 이미 설치된 브라우져에 적응하는 사람과 새로운 브라우져를 찾고 자기 방식을 찾아가는 사람의 차이에 대한 설명이다. 당연히 수동적인 것보다 능동적 대처가 독창성을 발휘한다. 하지만 읽는데 헛헛한 웃음이 함께 나왔다. 첫째는 이 책을 읽고 새로운 브라우져를 쓰면서 스스로 창의적인 행동을 했다고 착각하게 될 사람들이 떠올랐다. 둘째로 한국에선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아니면 아예 일을 할 수 없는 업무환경이 얼마나 많은가. 선택할 수 없는 봉쇄된 환경에서 독창성을 넘어서서 창의성을 강요받을 때 과연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에 대한 헛헛함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제약이 그득한 환경에서 선택과 자유로움으로 창의력을 발휘하라고 말하고 누군가에게 성과를 보고하는 일 말이다. 교육환경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창의환경이 있다면 창의력은 발생한다. 그 환경을 만드는 일은 창의력의 발생빈도를 높이는 것이지, 창의력 자체를 전달하는 것은 매우 희박한 확률일 수 밖엔 없다.

수년전 내셔널트러스트에서 선정한 12세가 되기전에 꼭 경험하길 권하는 리스트가 있었다. 나무타기, 큰 언덕에서 굴러 내리기, 야생 자연에서 야영하기, 나무 은신처나 동굴 같은 아지트 만들기, 물 수제비 뜨기, 빗속에서 뛰어다니기. 이 리스트를 보면서 반드시 꼭 해봐야 할 것이 아니더라도 위험하여 금지되거나, 그런 환경을 만나는 것은 특별한 이벤트가 되어 버린 우리사회의 아동/청소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런 경험이 결국 창의력을 만들텐데 말이다. 하물며 다리떨기를 눈치 보고 싶지 않다고 까지 말하면서 자기 선택을 외쳐야 한다면, 우리가 창의력과 창의교육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할 시점은 점점 늦어질 것이다.

서울예술센터_용산 5/6층을 기획하며

ARTICLE 2020-11-26

흔히 환경오염의 원인이며 쓰레기로 인해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주범으로 비닐을 지목한다. 그래선지 사용을 자제하자는 말을 자주 접한다. 누군가는 당장 비닐사용 줄이기를 실천해야 한다고 외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비닐이나 비닐봉투를 정책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한다. 개인의 사용자제가 효과적일 것 같아 장바구니를 사용하자는 캠페인에 동참해도 모든 포장은 이미 비닐에 담겨져 나온다. 하지만 이미 위생관념이란것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포장되어 있지 않은 상품에 대한 불신은 팽배하기 때문에 대안이 분명치 않다. 편의적 발상으로 인한 인간의 행동으로 쓰레기는 쌓여 충분히 예상가능한 재앙을 만들어내는 것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작년에 우연히 영국 BBC 온라인 뉴스채널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터뷰 클립영상을 보게 되었다. 스웨덴의 스텐 구스타프 툴린(Sten Gustaf Thulin)에 대한 기사였다. 툴린씨는 종이봉투를 쓰기 위해서는 수 많은 나무가 잘려 나가는 것을 보고 비닐봉투를 개발한 사람이었다. 종이는 쉽게 찢기고, 물에 약했기에 다시 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반면 비닐은 접어 넣고 다니기 쉽고, 질긴데다 습기에 강했기에 재사용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결국 비닐봉투를 개발한 배경에는 환경에 대한 관찰과 상념이 담겨있다.

메시지는 대다수 의도를 포함한다. 동의와 공감과 무관하게 곡해될 가능성과 편의에 의한 변형이 동시에 발생한다. 2020년 현재를 사는 청소년과 예술교육 역시 자유롭지 않다. 문명과 문화는 예술과 함께 해왔지만, 시대에 따라 그 행위자의 지위가 달랐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예술은 모두가 누려(?)야 하는 영역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경험재인 예술과 예술행위를 배우고 익히고 싶어한다. 그렇게 예술교육이 대중으로 존재하는 아동/청소년에게 다가가기 위해 정책과 사업을 세팅하고 수행인력과 예산을 배정했다. 공공성을 탑재한 예술교육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본래의 의도는 예술과 예술가를 접하면서 세계관이 넓어지고, 자연스러운 예술행위로 만나게 되는 자기성장을 독려하자는 것이다. 의도는 그러하다. 허나 교육의 현장과 예술교육의 장면은 조금 다른 그림이 펼쳐진다. 입시를 위한 학교와 학원의 스케줄에 밀려 선택이 한정적이고, 부모의 정보에 의존하다 보니 선호와 무관하거나, 동기없이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일도 허다하다. 이때 예술교육은 스케줄을 피해 짧은 시간 성과를 내야 하는 과제를 떠 안고, 학습자의 동기를 조작적으로라도 부여하느라 정작 예술행위와 그 이야기를 풀어내기 보다 자극의 요소와 방법론에 대한 관심이 더 깊어질 수 밖에 없었다. 청소년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접속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고, 예술가와 대화하면서 세계관을 확장할 수 있는 경험의 장은 과연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질문으로 [서울예술센터_용산]을 기획하는 것은 불확실하고 불가능한 상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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