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떨기를 허하라

ARTICLE 2020-11-28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교에서 설문을 돌렸다. "집에 혼자 있을 때 가장 하고 싶은 일은?"이라는 문항에서 의외의 응답을 본적이 있다. 정크푸드를 맘껏 먹거나 온라인게임등이 물론 나왔지만 의외의 답변이 있었다. “다리떨기”였다. 어렸을 때 다리를 떨어서 어른들에게 혼난 경험이 있다. 복 나간다며 못하게 했다. 지금은 다리를 떠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어른들에게 제지 당했기 때문에 고쳐진 건 아니다. 과한 움직임과 소리는 타인과의 교류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지가 생기면서 부터다. 각종 인간행동 연구보고서에는 집중력 향상이나 긴장완화의 효과가 있다고도 주장한다. 때로는 뭔가 기대되고 신나서 다리를 떠는 때도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 다리를 떨지 않는 건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신나는 일도 줄어들고, 호기심 자극하는 상황도 줄어든 건 아닐까 의심도 하게 된다. 그런데 다리떨기라고 답을 쓴 초등학생은 진짜 다리를 반드시(!) 꼭(!) 떨고 싶었던 걸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15세기를 가운데 두고 일어난 르네상스의 예술가 절대다수는 과학자였으며, 새로운 물질과 현상에 대한 탐닉 경향을 드러낸다. 다양한 물질의 조합과 현상의 관찰을 즐기는 "광maniac"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에 몰입하고 호기심으로 반복하는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에 문화와 문명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끝없이 시도하고, 실험하는 경험이 쌓여가는 동안 산업혁명이 다가오고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그들은 창의력으로 세계를 변화시켰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찾아가기 보다 생산된 도구와 물질을 소비하는데 익숙하다. 이때 창의력은 조합하는 능력처럼 여겨졌다.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하다 보니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능력과 기술의 전수가 아니라 가르침의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 시스템은 효율성을 기반으로 동작하다 보니, 시도나 도전이 가로막히는 경우가 생긴다. 다시 말해 대량생산 시스템의 환경에서 배움이 일어나게 되니 개인의 창의력은 한계에 부딪히고, "광maniac"이 등장하기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이때 창의력은 학습가능한 능력인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발상과 구현(또는 실현)능력이 통일되어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이른바 창의력이다. 이는 특정한 콘텐트나 커리큘럼에 의해 교육가능하다는 의견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효율이 떨어지고, 성과가 단번에 나오지 않으며,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즐거워서 흔쾌히 하는 탐닉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을 뒤흔들었다. GPS와 초소형칩셋, 무선인터넷환경과 IoT가 놀라운 속도로 대중화 되었다. 자본은 발빠르게 움직이며 판매방식과 유통망을 재편했다. 지금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의사소통하고 소비패턴의 변화를 주도한다. 이런 기술력의 기반에 결국 과학과 수학, 공학과 테크놀로지로 부터 새로운 발상과 행동이 유발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추론 가능한 요소들이다. 하지만 창의력으로 전환되는 티핑포인트를 만든 건 자발적으로 선택한 시간에 충분한 시도와 실험이 가능한 환경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교육상품을 판매하거나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서 창의력 교육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다수의 창의력 교육은 "창의력=생산성"이라는 프레임에서 훨씬 큰 생산을 위한 방법론으로 시작하는 것에 가깝다. 실제로는 자신이 속한 세계나 다양한 재료를 탐색하고, 스스로 선택한 문화적 행위자가 되었을 때 창의적인 발상과 행동으로 이어질 뿐이다. 제공한 창의력 훈련으로 창의적인 인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때 교육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장 문화적인 환경을 세팅하는 것과, 창의적 발상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서점에서 책을 펼치고 첫장을 읽는데 재밌는 사례가 하나 눈에 들어 왔다. 독창성에 대한 내용이다.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들의 업무특징을 조사했다. 여러가지 특이점으로 분류하여 근거를 찾아보는 방식. 인터넷 브라우져에서 실마리를 찾아낸 사례다. 인터넷 익스프로러와 사파리를 쓰는 사람들 보다, 파이어 폭스와 크롬을 쓰는 사람들이 꽤 높은 비율로 독창적 일처리를 해내고 만족도가 높다는 것이다. 컴퓨터를 구매 하면서 이미 설치된 브라우져에 적응하는 사람과 새로운 브라우져를 찾고 자기 방식을 찾아가는 사람의 차이에 대한 설명이다. 당연히 수동적인 것보다 능동적 대처가 독창성을 발휘한다. 하지만 읽는데 헛헛한 웃음이 함께 나왔다. 첫째는 이 책을 읽고 새로운 브라우져를 쓰면서 스스로 창의적인 행동을 했다고 착각하게 될 사람들이 떠올랐다. 둘째로 한국에선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아니면 아예 일을 할 수 없는 업무환경이 얼마나 많은가. 선택할 수 없는 봉쇄된 환경에서 독창성을 넘어서서 창의성을 강요받을 때 과연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에 대한 헛헛함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제약이 그득한 환경에서 선택과 자유로움으로 창의력을 발휘하라고 말하고 누군가에게 성과를 보고하는 일 말이다. 교육환경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창의환경이 있다면 창의력은 발생한다. 그 환경을 만드는 일은 창의력의 발생빈도를 높이는 것이지, 창의력 자체를 전달하는 것은 매우 희박한 확률일 수 밖엔 없다.

수년전 내셔널트러스트에서 선정한 12세가 되기전에 꼭 경험하길 권하는 리스트가 있었다. 나무타기, 큰 언덕에서 굴러 내리기, 야생 자연에서 야영하기, 나무 은신처나 동굴 같은 아지트 만들기, 물 수제비 뜨기, 빗속에서 뛰어다니기. 이 리스트를 보면서 반드시 꼭 해봐야 할 것이 아니더라도 위험하여 금지되거나, 그런 환경을 만나는 것은 특별한 이벤트가 되어 버린 우리사회의 아동/청소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런 경험이 결국 창의력을 만들텐데 말이다. 하물며 다리떨기를 눈치 보고 싶지 않다고 까지 말하면서 자기 선택을 외쳐야 한다면, 우리가 창의력과 창의교육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할 시점은 점점 늦어질 것이다.

서울예술센터_용산 5/6층을 기획하며

ARTICLE 2020-11-26

흔히 환경오염의 원인이며 쓰레기로 인해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주범으로 비닐을 지목한다. 그래선지 사용을 자제하자는 말을 자주 접한다. 누군가는 당장 비닐사용 줄이기를 실천해야 한다고 외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비닐이나 비닐봉투를 정책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한다. 개인의 사용자제가 효과적일 것 같아 장바구니를 사용하자는 캠페인에 동참해도 모든 포장은 이미 비닐에 담겨져 나온다. 하지만 이미 위생관념이란것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포장되어 있지 않은 상품에 대한 불신은 팽배하기 때문에 대안이 분명치 않다. 편의적 발상으로 인한 인간의 행동으로 쓰레기는 쌓여 충분히 예상가능한 재앙을 만들어내는 것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작년에 우연히 영국 BBC 온라인 뉴스채널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터뷰 클립영상을 보게 되었다. 스웨덴의 스텐 구스타프 툴린(Sten Gustaf Thulin)에 대한 기사였다. 툴린씨는 종이봉투를 쓰기 위해서는 수 많은 나무가 잘려 나가는 것을 보고 비닐봉투를 개발한 사람이었다. 종이는 쉽게 찢기고, 물에 약했기에 다시 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반면 비닐은 접어 넣고 다니기 쉽고, 질긴데다 습기에 강했기에 재사용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결국 비닐봉투를 개발한 배경에는 환경에 대한 관찰과 상념이 담겨있다.

메시지는 대다수 의도를 포함한다. 동의와 공감과 무관하게 곡해될 가능성과 편의에 의한 변형이 동시에 발생한다. 2020년 현재를 사는 청소년과 예술교육 역시 자유롭지 않다. 문명과 문화는 예술과 함께 해왔지만, 시대에 따라 그 행위자의 지위가 달랐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예술은 모두가 누려(?)야 하는 영역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경험재인 예술과 예술행위를 배우고 익히고 싶어한다. 그렇게 예술교육이 대중으로 존재하는 아동/청소년에게 다가가기 위해 정책과 사업을 세팅하고 수행인력과 예산을 배정했다. 공공성을 탑재한 예술교육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본래의 의도는 예술과 예술가를 접하면서 세계관이 넓어지고, 자연스러운 예술행위로 만나게 되는 자기성장을 독려하자는 것이다. 의도는 그러하다. 허나 교육의 현장과 예술교육의 장면은 조금 다른 그림이 펼쳐진다. 입시를 위한 학교와 학원의 스케줄에 밀려 선택이 한정적이고, 부모의 정보에 의존하다 보니 선호와 무관하거나, 동기없이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일도 허다하다. 이때 예술교육은 스케줄을 피해 짧은 시간 성과를 내야 하는 과제를 떠 안고, 학습자의 동기를 조작적으로라도 부여하느라 정작 예술행위와 그 이야기를 풀어내기 보다 자극의 요소와 방법론에 대한 관심이 더 깊어질 수 밖에 없었다. 청소년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접속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고, 예술가와 대화하면서 세계관을 확장할 수 있는 경험의 장은 과연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질문으로 [서울예술센터_용산]을 기획하는 것은 불확실하고 불가능한 상상인가.

비대면을 대면하다.

ARTICLE 2020-10-16

연재기고_비대면을 대면하다.

  1. 흔한 공포영화를 보다.

    최근 몇년간 유행하는 공포영화에는 좀비가 자주 나온다. 예전에 “귀신영화”로 통칭하던 오컬트와는 다른 장르가 된지 오래다. 좀비가 영화 뿐 아니라 시리즈로 나오는 드라마나 코미디에서도 등장하는 걸 보면 확실히 대세임에 분명하다. 공포영화를 즐기는 이유는 역시 긴장과 이완의 반복이다. 하지만 좀비물은 조금 다른 장르적 성격이 하나 더 있다. 고립감에 대한 공감이다. 물리면 전염되는 상황에서는 어딘가 스스로를 가둔다. 이때 거의 예외없이 영화와 드라마속 인물은 거리로 나가고 사람들을 만난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이들은 함께 싸울 전투능력 상승에 대한 기대보다 생존자에 대한 반가움을 더 크게 느낀다. 고립된 상황을 영화로 간접경험한 관객은 누군가와 마주하는 그 순간, 긴장이 풀리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무서운 대상에서 느끼는 공포와 고립의 절망감이 동시에 있다는 뜻이다.

    바이러스로 인해 최소한 지금 한국사회는 잠시 멈추고 있다. 세계 어딘가 사람들은 여전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처럼 살고, 또 다른 어느나라는 전염병과 싸우며 매일 장례를 치루기도 한다. 하지만 최소한 한국은 잠시 멈춤을 선언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긴 어렵다. 처음이라서 그렇다. 유사한 사례를 참조하지만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우리의 정서를 지배하는 건 분명하다. 마스크를 쓰고, 한 공간에 사람들과 함께 있지 말라고 경고한다. 바이러스의 전파는 감염자로 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회합이나 파티는 물론이고, 직장과 학교등 같은 공간에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경로가 생기니 일단 피하는 것을 택했다. 감염보다는 현명한 선택인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구의 대다수가 마스크를 사용하고, 재택근무나 온라인 수업등으로 대체하면서 직접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으로 부터 자유로와지기 위해 개인공간으로 피하는 것을 강조한다. 자유로와 지기 위한 고립인 셈이다. 연일 질병관리본부의 브리핑에서는 “의사소통은 가급적 온라인으로 하시고…”를 들을 수 있다. 인간은 의사소통을 몸으로 한다. 문자와 음성언어만이 아니다. 순간 순간 무한대로 발생하는 표정과 억양, 제스처등의 조합이다. 그래서 현재는 임시 또는 차선책이라고 느낀다. 과연 그럴까. 수 많은 석학들은 새로운 시대의 진입을 예고한다. 경제구조와 그 베이스가 되는 일터나 학교의 구조가 변화하고, 사회생활과 의사소통의 표준이 달라질 것이라는 예측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어떤가 생각해 보자. 인구가 밀집한 도시에 살면서 하루 종일 수 많은 인파속에서 머물러야 한다. 출퇴근 시간의 대중교통은 상상만 해도 멀미가 난다. 아동과 청소년의 삶은 어땠는가. 학교와 학원등의 교실에 머물러 있고, 걸핏하면 강당에 모이거나 떼(?)를 지어 수학여행에 참여해야 했다. 밀도높게 앉고 줄서서 이동하는 것을 반복했던 건 사실이다. 이런 풍경은 전염병이 돌기 이전에도 문제였다. 다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에 가깝다. 지금 우리사회의 상황은 코로나19의 이전을 상상하며 자유로와지려는 고립을 강조해야 할 때는 아닌 듯 하다. 오히려 이 상황을 지났을 때 우리가 문제라고 느끼지 못하던 소비문화와 집단의 효율성에 대해 기준을 달리 놓는 것이 더 생산적이며 건강한 실천이 될 것이라고 본다. 어찌보면 지금 우리가 느끼는 고립감은 지향을 달리 했을 때 가까운 사람과의 친밀감으로 전환되고, 의사소통의 방법은 더 구체적이고 다양해 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다만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전제로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곤란해진다는 의미다.

  2. 아이들에게 시간이 생겼다.

    가끔, 어른들에게서 듣는 그들의 어릴적 이야기가 동화같은 느낌을 주곤한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를 건너면서 전혀다른 성장환경을 전해 들을 때 그렇다. 플로피 디스크를 썼다거나, TV가 흑백이었다고 말하는 식의 세대차이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를 간혹 듣는다. “오후 부터 동네 아이들과 신나게 놀았어. 뭘 했는지 기억도 잘 안나지만 다들 논밭을 뛰어다니면서 놀았지. 겨울이면 어둑어둑 해질 때 헤어지지만, 낮이 긴 계절은 그렇지 않았어. 신나게 놀다보면 집에 갈 시간이 다가오지. 40-50년대에 시계를 가진 애들이 있었겠어? 그 신호가 있었지. 초가지붕에 하얀 박꽃이 피면 집에 가야할 때가 된거야. 박꽃은 밤이 되면 하얀 꽃이 보이거든…” 전화기에 알람을 맞춰 놓고 아침을 시작하고, 시간표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우리사회에서 박꽃이야기는 동화처럼 느껴진다. 박꽃이 멸종한 것도 아니고, 해지는 시간이 크게 변한것도 아닌데 판타지에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가 되었다. 시간관리(?)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좀 낯설게 받아들여 보면 어떨까. 시간을 관리하는 것인가 시계가 날 관리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식으로 한번 일부러 뒤집어 생각해 보자는 뜻이다. 물론 진부한 말장난이기도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대입해 보면 어른이 허락한 시간과 스케줄에 꽉 채워져 끝없이 눈치 보며 성장한다는 걸 부정하긴 힘들다. 그 시절에는 시간 개념이 없었는가. 다들 바빴다. 오히려 더 시간을 꼼꼼히 썼다. 대부분의 생산이 가족공동체의 노동량에서 결정되었을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계가 관리하는 것 보다 자연의 순환과 흐름에 맡겼다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성장기의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훨씬 시간의 자율성이 높게 주어졌다. 그렇게 몸이 판단하고, 환경을 관찰하고, 자연스럽게 시간을 익히며 살 수 있었던 시절이 채 50-60년전이었다니 놀랍다. 시간이 생겼다. 이 역시 조금 낯설게 받아들여보자. 시간은 생기고 사라지는 물성을 가진 것이 아닌데 왜 이렇게 표현하게 되었는가. 아이들의 시간을 누군가가 거두어 들였기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최근 아이들에게 꽤 긴 시간이 주어졌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이 시기. 부모는 오히려 시간을 빼앗겼다고도 말한다. 지금이야 임시, 잠시, 어쩔 수 없다고 하기에는 불과 1년전 오늘과 같은 상황이 다시 돌아오리라고 쉽게 생각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학교와 학원을 뺑뺑돌던 아이들에게 자기 시간이 주어졌는데, 부모는 그 시간을 이렇게 쓰라고 강조하느라 자기 시간을 빼앗긴다. 그 동안 시간개념에 대해 아이들과 상의해 본 경험이 없는 어른들은 패닉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전염병으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는 지금 상황은 어른들도 버겁다. 시간에 대한 아이들과의 상의(또는 협상?)를 시작할 때다. 지금까지는 버겁지 않은 척 하면서 이 답답함을 극복하자고 했다면, 부모인 나도 괜찮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고 테이블에서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 그 누구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어른은 해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대화를 하지 않는다면 이 협상은 진척이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아이들과 상의하는 것. 의견을 구하는 것. 이런 대화가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라이프스타일에서 단번에 이 시간을 어떻게 쓸(?)것인가에 대한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2020년의 상황을 수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쩌면 아이들에게 자기의 시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오늘부터 협상을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3. 가중된 정보불평등

    우리는 수 많은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한다. 얼마전 가깝게 지내는 선생님 한분이 이런 말을 꺼냈다. “선택은 마치 여러가지 중 하나를 결정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여러가지를 포기하는 것과 같지” 다분히 냉소적인 말처럼 들리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또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처럼 한번 포기한 결정은 다시 최초의 에너지가 되지 않는다. 삶에서 수 많은 선택의 순간이 있고, 얻는 것은 잃는 것과 교환한다. 그렇지만 주목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우리가 고를 수 있다고 믿는(또는 착각하는) 선택지의 정보량이다. 예를 들어보자. 낯선 여행지에서 밥먹을 때가 되어 식당을 찾는다. 여행의 경험이 없는 친구에게 묻는다. 뭐 먹고 싶어? 이때 할 수 있는 말은 지극히 한정적이다. 무엇을 먹을지 선택한다는 것 이전에 어떤 정보가 필요하다. 처음하는 경험이니 새로운 식재료와 환경을 접하면서 음식취향은 넓어진다. 입에도 댈 수 없었던 맛과 향은 어느 순간 생각나고 다시 먹고 싶은 선택지에 자리한다. 즉, 이전 경험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음식을 선택한것이 아니라 다양한 감각정보를 취하는 것이 선결과제가 되는 셈이다. 어느 청소년센터의 입구에 설문조사(라고 써있지만 그건 설문은 아니었다)를 위한 입간판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새로 개관한 이 센터에서 청소년 스스로 원하는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선택하고 스티커를 붙여달라는 안내가 써 있었다. 총 네개의 프로그램이름이 써 있고 스티커가 많이 붙은 프로그램은 우리가 익히 들어본 강좌다. 이 설문조사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프로그램을 개설하고나서 청소년이 “스스로 선택한” 또는 “원하는”것이라고 할 수 있을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2020년 우리사회는 교육장면에서 수 많은 포기를 해야 한다. 또 한번 뒤집어 생각하면 선택의 순간이 온 것이다. 집합금지란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이해가능한 범위안에서 용인된다. 하지만 일상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교육은 온라인을 택했다. 교과과정은 이미 넘칠 정도의 영상콘텐트화 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대면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할 이유는 굳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경험의 양을 넓히기 위한 상호작용. 이는 저장된 정보만으로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아직은 의미 있는 시도란 걸 부정하기 힘들다. 그런데, 수 많은 부모들이 동시에 바빠졌다. 온라인에 접속하고,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컴퓨터를 세팅하고, 수업시간을 체크한다. 학교의 온라인 수업 뿐 아니라 다양한 경험의 양을 축적하기 위해 멈추고 싶지 않는 배움의 장이 온라인에서 열린다. 역시 마찬가지다. 세팅하고 접속하고 지켜봐야 한다. 물론 처음하는 경험이라 우왕좌왕하면서 적응하는 기간임에 분명하다. 그 결과 다수의 보호자는 신경쓰고 애써야 하는 일이 늘어났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이 보호자가 없거나 이를 도와 주지 못하는 부모와 함께 사는 아동과 청소년의 경우다. 아동과 청소년의 양육과 성장에서 우리사회는 이미 가정을 벗어난지 오래되었다. 교육을 사회적 기능으로 전환하고 부모가 할애했던 시간과 책임을 사회교육기관등으로 위탁했다. 지금의 비대면상황이 오기 전에도 정보는 평등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교육등에 대한)의지만으로도 정보에 닫는 것이 위탁한 교육기관을 통해 가능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놓였다 해도 정보에 닿기 위한 환경자체에서 소외되는 아동과 청소년이 생겼다는 뜻이다. 해법이 있는가? 모르겠다. 가중되는 정보의 불평등은 양극화를 가중시킬 것이란 결과가 예상되지만 문제해결에 어떤 방법이 있는지 답답하다. 이런 문제의식을 많은 사람이 공유하고 있을 때, 우선 내 발등에 불 끄는 것이 먼저이니 남이야 어떻든 상관없다고 외면하지 않을 때 해법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남아 있다.

  4. 창의환경

    시리즈소설이나 드라마를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다. 아마 긴 호흡의 이야기에 집중을 못하는 탓이라 생각하곤 한다. 여행 중 숙소에서 케이블방송으로 우연히 응답하라1988 한편을 본 기억이 난다. 전후 맥락을 모르고 보긴 했지만 참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주인공인 둘째 딸의 생일은 언니 생일에 묻어서 지낸다. 언니의 생일케이크에 불을 끄고 다시 초를 꽂아 주인공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 결국 폭발한다. 통닭 한마리에 닭다리는 언니와 동생에게 나눠주고, 계란이 떨어지면 주인공에게는 콩자반 먹으라고 권했다. 생일상 앞에서 울며 소리 지르고 학교로 간다. 저녁에 아빠가 둘째 딸을 구멍가게 앞으로 불러내 생일케이크를 주며 말한다. “미안하다. 아빠가 몰라서 그래. 첫째는 어떻게 키우고, 둘째는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나도 몰라.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거든”이라고.

    전문가인척 하는 것은 쉽지만 초보라 말하는 것은 어렵다. 많은 분야에서 전문성에 대한 과한 찬양이 만들어낸 사회적 부끄러움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분명히 다르다. 판데믹을 선언하고, 전염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아동/청소년의 교육을 이어나가야 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환경을 만들어왔다. 창의력을 교육으로 만들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집단실험을 거쳤다. 인간은 이미 내재하고 있는 창의력을 가진 존재다. 단지 어떤 환경과 만났을 때 창의력이 촉발되고 발현한다. 정리하자면 창의적 행동과 창의력은 환경을 통해 발생빈도를 높인다. 결국 핵심요소는 창의적 발상을 담은 교육프로그램과 창의적 행동을 업으로 삼는 작업자, 그리고 창의환경. 이렇게 세가지 주요요인(key factor)이다. 이 중에서 모든 것의 기반이 되는 것은 역시 환경이다. 그. 런. 데. 집단시설이 통제되고, 집합이 제한되었다. 물리적 환경에 모이는 것이 어려워진 현재 콘텐트생산에 주력하게 된다. 하지만 창의력의 발생빈도를 높이는 환경이 사라진 것에 대한 대체 가능한 그 무엇을 찾는 것에는 역시 우리도 잘 모른다. 솔직히 초보란 뜻이다. 허나 분명한 것은 환경이 촉발했던 어포던스(Affordance/행동유도성)는 가장 큰 고민이 되었다. 창의환경에 물리적 접촉과 곁눈질로 상호관계를 만들고 참여와 모사, 모방, 반복, 재조합이 가능했던 그 집단역동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에 포커스 하기 시작한다. 창의환경이 학습자가 사는 공간이라면 어떨까라는 실험과 참여자간의 교류와 의사소통이 온라인에서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시도해야 한다. 단지 패키지로 만들어진 키트와 매뉴얼, 설명하는 동영상강좌로 창의력을 흉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과제와 과업을 수행하도록 감시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교육자의 역할로 머물지 않아야 하기에 그에 따른 적응과 트레이닝이 동반되어야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잘 모르기에 참여자도 그의 보호자도 시작점에 함께 섰으면 한다. 그렇게 같이 걸어야 하는 길 위에 섰다는 것을 수용하기까지 우리는 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꽤나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을 확신한다.

질문과 대답

ARTICLE 1993-03-16
  1. 좋은 선생이 되는 방법은 있는가?

그렇게 살면 된다. 자신이 가르친 삶대로 사는 모습을 학습자에게 노출시키는 것 이상은 없다. 교과 역시 이런 철학을 토대로 한다. 교사가 알게되는 과정이 얼마나 즐겁고/신나고/유쾌한 경험이었는지를 전하는 것이 방법론이라면, 그래서 나의 삶이 충만해 진다는 철학을 실천하는 삶이 드러나야 한다.

  1. 공교육, 특히 초등교육은 어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건 단지 교육권. 즉 권리의 문제를 가지고 접근하면 곤란하다고 본다. 초등교육은 문화. 조금 더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문명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사회를 구성한다. 혼자보다 협업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진화의 관점이다. 그 존속을 위한 것이 문화의 전승이다. 중등교육이 사회적 필요에 대응한다면, 초등교육은 문화의 시작점에 놓인 개인에 대응한다.

  1. 교육과정이란 어떻게 만들어지고 왜 그것을 따른다고 보는가?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과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고 말한다. 동의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래서 교사의 질적 성장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허나 개인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공교육은 그 기준을 찾아내고 학습자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교육과정은 그 기준점이 된다.

  1. 4차산업혁명시대의 교육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우선 4차산업혁명에 대비하는 교육이라고 표현하게 되면 아이러니 하게도 이미 혁명은 일어난 상태에 적응하기 위한 것 이외에는 할게 없어진다. 즉, 4차산업혁명 이후 변화한 사회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과제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정보를 다루는 방법과 그 정보의 집약결과인 AI나 딥러닝 프로젝트등 정교한 자동화와 예측방법등이 생산력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산업혁명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마치 교육이 산업의 일부 또는 산업과 생산을 위한 인간을 양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이 오히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이 교육의 기능이 아닐까라고 반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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