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반시설연구

ARTICLE 2021-03-17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책기반 사업운영을 위한 기반시설 연구를 본격적으로 했다. 문화기반시설 연구에 쓴 원고의 일부. 최종 원고에는 정치적(?)으로 약간 수정되었지만, 이 내용이 드래프트였다.


2장 3절 / 문화예술교육 정책 추진을 위한 핵심주체로서 문화기반시설의 방향과 역할

문화기반시설의 방향과 역할은 각 시설의 설립취지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에서 사업수행의 원칙을 점검하는 것이 우선과제이며, 존립근거가 된다. 문화기반시설의 이미지는 문화와 예술이 핵심어가 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역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반시설에 대한 평가와 논의 구조에서 문화예술교육의 수행거점이 확보되었다고 보는 것은 많은 오류를 낳을 가능성이 짙다. 도서관은 고유의 역할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는 것이 필요하고, 문화의집은 설립초기부터 교육기능이기보다는 이용시설에 가깝다는 것이 예가 될 수 있다. 또한 그 시설을 위탁운영하고 경우와 설치 및 관리되고 있는가에 따라 기능적 평준화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즉, 문화기반시설은 하나의 독립적 성격을 띠고 있는 개별역량을 중심으로 분류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1)인구의 수, 2) 지역 문화자원이나 인프라, 3) 수혜대상자의 물리적/심리적 접근성, 4) 네트워크 구조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5)자원활용능력, 6)시설운영주체 스스로 문화예술교육의 전문성에 대한 인식 등을 고려해야 한다. 도서관, 문화원, 문화의집등이 동일한 이름이나 브랜드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기능과 사업수행에 있어서 위의 1)-6)에 따라 내용적 차이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문화기반시설이 이미 확보되어 있는 가운데 문화예술교육의 내용적 터미널이 되는 것은 당연히 문화기반시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문화예술교육을 브랜드로 상정하고 통일된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추론은 섣부르다. 문화기반시설이 자기역량강화를 위한 노력을 못하거나 안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보다는 지금 현재 무엇을 해낼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 유효할 것이다.

4장 1절 / 사회문화예술교육 활성화를 위한 문화기반시설의 조건

문화적 결핍과 소외가 인간의 삶의 질과 무관하지 않다는 발상이 문제해결을 위한 정책적 대안을 마련하는 것에 그칠 때 사회문화예술교육의 내용적 결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문화기반시설의 이용자가 문화적 소외를 대도시를 기준으로 비교한다거나, 지역사회의 이해정도와 해석을 위한 노력을 시설운영주체가 자발적으로 하고 있지 않을 경우 문화결핍과 소외의 문제를 희석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기반시설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고 실행하고 검증받는 것이 중심이 아닐 것이다. 시설은 일종의 지역 내 문화환경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문화기반시설로 존재한다는 것이 프로그램을 보급하는 시설이라고 생각하는 운영자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설립취지나 운영하고 있는 사업의 최종 목적은 프로그램보급이 아니라 문화환경을 구성하는 더 큰 목적을 수행하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럼에도 사업내용이 설립취지와 사업목적과는 이질적으로 프로그램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한계가 생긴다. 사회문화예술교육이 실행되기 위한 문화적 태도가 필요하다. 사례연구에서 문화예술교육의 주 대상자가 사회문화예술교육이 지향하는 문화결핍과 소외의 대상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인, 장애인, 문화적 접근성이 어려운 농산어촌의 아동 청소년 등이 그 대상이 된다. 하지만 대부분 문화기반시설에서는 소외계층의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필요성에 대한 확신은 가지고 있지만 대상자를 모집하는 것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다. 가장 수고를 덜 들이고 모집할 수 있는 대상을 확보하거나, 시설이용자들의 중복 수강 등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주요 이용시간대가 농산어촌의 경우 노동시간에 해당되는 경우에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전업주부와 방과 후의 아동에 국한된다. 마치 문화기반시설이 아동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 전문기관처럼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사회문화예술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대상자가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지역에서 사회문화예술교육을 시도할 때 사람이 모집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다. 이는 그 대상자들이 문화소외의 상황에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우선되어야 한다. 만약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홍보했을 때 대도시처럼 사람들이 모여든다면 이미 소외계층이나 소외지역의 대상자가 아닐 것이다. (물론 대도시의 경우라고 해도 소외계층의 대상인구수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많은 대상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양한 시도들이 있기 때문에 사회문화예술교육을 수행하는데 있어 훨씬 수월한 모집 및 모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다시 말해 대도시의 사례를 빌어 프로그램을 세팅하고 운영하거나, 대상인원의 적정수가 너무 많아서 스스로 실망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사회문화예술교육을 지역 문화기반시설에서 운영하기 위해서는 시설자체를 문화환경으로 만드는 노력이 동시에 시도되어야 한다.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대상은 문화적 욕구 또는 지적 호기심이 있다고 전제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문화예술교육의 대상자군은 문화적 욕구를 발견해 내기에는 시간을 할애하기 어렵거나 물리적 접근성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개인의 힘으로 문화예술교육에 다다르기 힘들다는 것을 염두하고, 문화환경으로써 시설의 모습을 상정하는 노력을 함께 해야 한다.

4장 2절 / 시설 유형별 활성화 모델 개발(문화원, 문화의집, 문예회관 등)

사회문화예술교육을 실행하는 중심이 되는 거점은 이용시설로의 편의성이 아니라 시설의 설립목적인 사회문화예술교육사업과 어울리는 것이 우선 검토되는 것이 필요하다. 즉, 박물관 미술관이 사회문화예술교육을 통하여 시설의 정체성을 구현하고자 시도하지 않고 있는 경우에 동일선상에서 바라볼 수 없다. 오히려 문화원과 문화의집에서 기획한 내용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협력하는 사업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다. 시설의 독자적 성격이 분명하다면 사회문화예술교육 중심의 활동을 활성화하기에는 힘들다고 보인다. 시설을 분류할 때 문화예술교육의 전문성을 별개로 놓고서라도 교육프로그램의 코디네이션능력이나 교육기획력을 갖추고 있는 인적구성이 되어 있는가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일단 현재 문화예술교육의 전문성으로 별개로 놓아야 하는 이유는, 각 시설이 문화예술교육수혜기관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문화원, 문화의집, 문예회관, 도서관등 문화기반시설은 각자의 사업영역에서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이라고 독자적으로 개발하거나 수행하려는 취지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문화적 서비스이거나 예술 또는 예술교육의 범용적 수혜, 시설이용자 수의 양적 확대등을 목적으로 문화예술교육을 하나의 사업으로 바라본다. 드러나고 있는 사업의 내용을 살펴보았을 때 문화예술교육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 문화원 / 문화원은 지역문화 활성화방안에 대한 논의구조를 선행 검토하고 있으며, 시설이 확보되었을 때 최우선으로 결정하고 수행하는 사업내용은 지역문화에 대한 이해다. 따라서 지역사회의 문화적 자원과 역사적 보존가치를 가지는 유, 무형의 문화자원에 대한 발굴 및 보급이 사업이 된다. 이런 사업은 교육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업을 하더라도 교육사업이 함께 구성된다. 내용적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원칙에서 그러하다.

  • 문화의집 / 이용시설로의 가치를 충분히 실현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대다수의 문화의집은 지극히 한정적인 인적구성을 가지고 있다. ‘양질의 프로그램을 보급하는’ 것 보다는 문화공간으로 지역사회에 문화적 자극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프로그램으로 가능할 것이라고 보기에는 종사자의 수가 부족하다. 특히 군단위의 작은 규모에서 고립감을 느끼고 있는 경우에 프로그램이 많아진다고 해서 발전하는 것은 없다. 문화의집을 드나들 수 있는 통로를 개척하는 것이 우선과제다.

  • 도서관 / 중소도시를 포함해서 가장 접근성이 좋고 정체성이 분명하다. 더구나 책을 읽는다는 문화적 행위가 가지는 한국사회의 긍정적인 태도가 도서관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도하기 보다는 특화된 독서문화와 정보습득이 가능한 공간이 된다. 사서의 기본업무가 도서를 분류하고 정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낡은 개념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으며, 정보에 접근하는 과정에 통로역할과 독서와 도서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문화기획이 업무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생산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인적자원과 공간의 결합형태로 볼 수 있다.

  • 문예회관 /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는 공간이 분명하지만 교육기획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문화향수권리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자생적 기획을 하려는 의지를 발견하라는 권유는 시설의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주된 관점은 문화향수권확대라기 보다는 관객개발에 가깝다. 물론 관객개발차원에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행하면서 문화향수권에 대한 가치를 발견해 냈다면 그건 부가이윤이 된 것이므로 막을 이유가 없고 권장해야 한다. 하지만 문화예술교육을 중심사업의 하나로 보고 있지 않다.

  • 박물관, 미술관 / 국공립과 사립이 동시에 존재한다. 또한 문화와 예술, 교육이 동시에 그 기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취약점이다.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도 박물관과 미술관의 콘텐츠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우선이지 지역민의 상황과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와 고려가 중심에 놓여 있지 않다. 그런 이유로 지역에서는 일정수준의 경계나 이질감이 있을 수 있다.

  • 평생학습관 / 관점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문화예술교육적 성격을 가진 프로그램이 가장 많이 유통되고 소비되는 공간이다. 평생학습 담론의 시작점이 문화예술교육보다 먼저 시작되었다는 점도 그렇지만 평생학습의 시각에서 문화예술교육은 이미 떼어놓고 바라보긴 어렵다. 그런 이유로 평생학습관에서 운영하고 있는 각종 프로그램은 양질의 교육프로그램은 적은 비용을 들여서 수혜받을 수 있고, 학습권에 대한 보장이 동시에 담론화되고 있기 때문에 문화예술교육이 활성화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 구민회관/여성회관/마을회관 / 이용시설로 충분히 역할을 하고 있다. 이용자 수가 줄어든다는 것은 시설의 낙후되거나 다른 이용시설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활성화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 보다는 보다 효율적 공간이용의 개념으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 기타 / 사회복지관과 청소년시설 / 사회복지나 청소년활동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시설이어서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사회복지관의 이용자가 대부분 사회문화예술교육의 대상자라고 본다면 복지관과 연관된 사업내용과 보다 전략적 제휴방식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청소년시설은 청소년이 이용하지 않는 시간대를 활용하여 문화강좌들이 있지만 상업적 문화센터와 차별성을 갖는 것은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청소년시설의 운영비마련을 위한 것에 가장 가깝다. 그래서 사회문화예술교육사업과 연계한다면 유효한 시설이 될 수 있다. 사회복지관과 청소년시설에는 대부분 전문성을 가진 교육기획자가 일하고 있다는 강점도 살릴 수 있다.

예술교육단체는 왜 사라졌을까

ARTICLE 2021-03-16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이 10년이 넘어간다. 정책이나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소위 문화계와 예술계의 지형이 변화한 것도 사실이다. 변화는 곧 전진하거나 발전한 것과 등치시켜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문화교육이나 예술교육은 어떤 교육 행위자를 양산하게 되었는가. 그 행위자는 누구인가가 궁금해진다. 우리사회에서 형식교육과는 어느 정도 무관하거나 대안적 성격을 가진 개인과 단체가 부각되었다. 예술과 놀이로부터 시작하여 미학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이 건강한 문화적 경험을 만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전국의 문화예술인이 매개가 되어 교육행위가 일어났다. 시키는 사람은 없었으나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었기에 자발적이었다고 할 수 있고, 세인의 관심이 폭발적일 순 없었다 해도 커뮤니티에서는 삶의 궤적만으로도 존경의 대상이 되는 행위자(또는 행위자군)가 문화예술교육의 장으로 진입했다. 진입경로야 모두 다르겠으나 이미 꾸준히 문화예술교육에 포커스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붐업이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고민의 대상이 되곤 했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교육자의 절대수가 준비되지 않았고, 정책이나 사업은 공공의 장에서 펼쳐지게 되므로 다수를 만족시켜야 하는 임무를 부여 받거나 기준이 다른 평가를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교육자가 없는데 교육행위는 일어날 수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은 사실 아직도 해갈되진 않았다. 피교육자에 대한 이해를 바탕에 두지 않고 운영되고 있는 문화예술교육을 목격할 때 이런 생각을 지우기란 힘들다. 아동, 청소년, 장애인등으로 구분되는 대상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 놓여있는 피교육자인가에 따라 드러나는 삶의 모습을 인식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다. 문화예술교육은 기능교육이 아니라고 틈틈이 또는 전면에 내세워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다니지만 어디 그러한가. 여전히 피교육자에 대한 배려없는 집체교육을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고, 반문화적인 환경에서 비문화적인 교육자가 문화적인 예술교육을 행하고 있는 상황도 자주 드러나곤 한다. 교육자의 절대수가 부족할 만큼 정책과 사업은 양적으로 팽창했다. 때론 양적확산의 결과가 질적 성장을 불러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문화예술교육이라 불릴만한 단체들이 자기모습을 정돈하고, 기존의 사업이 두 세배로 늘어나면서 더욱 활동이 잦아지는 경우를 보게 된 것은 매우 흐뭇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어느 순간. 문화예술교육행위자가 자기가 속한 지역사회이거나, 문화와 환경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어도 되거나, 굳이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혼자 살아남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 가장 큰 함정에 뛰어들게 된 모양새다. 문화예술교육자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거나, 전문성 여부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때 예술을 기능으로 훈련시키는 훈련프로그래머는 최소한 아니다 라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세련된 언어로 포장하는 것 보다는 조금 더 거칠고 날것에 가까운 실체를 마주하는 것이 필요 할 것이다. 문화예술교육 행위자는 피교육자에 대한 폭 넓은 관심과 이해를 중심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도시거나 농산어촌이거나 모두 마찬가지다. 모든 개인은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과 조건, 생태, 문화로부터 자극받으며 그와 연관된 관계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생존을 위한 근거가 되기도 하며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문화예술교육자는 피교육자 개인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그 개인이 놓은 환경의 보편과 특수를 동시에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문화예술교육행위가 일어나는 시점은 그 관심사(때로는 문제해결이기도 하다)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또한 교육전문성을 위한 노력이 수반된다. 문화예술교육이 강조될 때는 이미 교육자가 교육받은 내용자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접근방법이 부정된 것에 가깝다. 교육자가 깨닫게 된 예술적 상상력이나 실천능력이 긴 시간의 노력으로 얻어졌다면, 보다 정리되고 간결한 교육과정을 생산해야 하는 책임이 생긴다. 문화예술교육 전문성은 전문예술가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풍부한 삶의 질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나 더 서술하자면,작업자군의 연대를 상상해야 한다. 개인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단기 아르바이트의 수준을 생각하고 있다면 위의 두 가지 어느 하나도 만족시키긴 어렵다. 그런 이유로 교육자는 작게는 공동체나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려 노력해야하고 크게는 전국의 네트워크망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필요해진다.

문화예술교육 단체가 늘지만 줄어들었다? 이런 모순을 말하게 되다니 한숨이 나온다. 각종 펀드와 지원이 생기면 그 자본의 흐름을 따라 비대해진 조직의 거품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상된 결과다. 하지만 문화예술교육이 확대되지만 단체가 아니라 개인강사가 양적으로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기형적인 모습이다. 특정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배정받은 지역과 지역민을 대상으로 각종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모습은 어이없다고 밖엔 생각되지 않는다. 정책과 사업은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기뻐 날뛰기 위해 치러야하는 값이 있다. 환경과 대상에 대한 이해, 자발적인 전문성훈련, 교육자간의 연대를 지불해야 한다.

교육자의 처세술 또는 권의지계(權宜之計)

ARTICLE 2021-03-13

처세는 타인과 관계하며 살아가는 것을 지칭하니 결론적으로는 관계방식에 대한 표현이다. 긍정적으로는 적응력이나 융통성이 발휘되는 것이지만, 얇은 귀 또는 철학의 부재와 임기응변으로 구현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처세+술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라기 보다 사회관계의 기술이라는 뜻이다. 처세술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느낌이 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심지 없이 휘둘리고 사익만 취하는 방식을 지칭하니까 그렇다.

우리사회, 절대다수의 교육현장은 어떤가. 우리는 정해진 답을 요구하는 현실에 살고 있다. 교육장면에서 교육자는 답을 잘 알려주는 사람이어야 생존하게 된다. 전인교육이고 나발이고 당장 교육자가 먹고 살기 위한 생존법 또는 처세술이 발동한다. 내용은 말뿐이고, 형식이 주도하면 우리는 어떤 해법에 다가가는 길을 잃는다. 다수의 문화가 내놓은 정답 강요. 이 역설적 상황에 놓여 있다면 교육자는 그저 피교육자와 그 이해당사자의 욕구에 순응하며 밥벌이를 하는 것 이외에 시도할 방법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답을 요구하는 피교육자의 요청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난감할 필요가 직업적으로는 없어진다는 뜻이다. 일단, 가르치는 것은 전문성이 그리 많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의 역할인지가 끝나고 나면 바로 커리큘럼이 요구된다. 교육내용을 확정하고 성취정도를 결정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가르치는 것은 성취를 위한 학습계획에 따라 구조화되고, 학습성취가 부족할 경우 보충하며 최종 목표에 다다르는 것에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예상하는 범위의 성취와는 차이가 있다. 그 예측이 때로는 부작용이 되기도 한다. 교사의 성취정도와 학생의 성취정도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며, 개인의 능력과 교육장면의 환경이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교육 커리큘럼을 생산하는 교육자가 아무리 성찰적 개인이라도 교육과정을 통해 성장하게 되는 피교육자를 "이윤의 수단"으로 여기거나, "개인의 목표를 위한 제물"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시스템안에서 무력하다.

관찰

ARTICLE 2021-03-13

많은 예술과 표현에서 관찰을 만나게 된다.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매일 매일 일어나는 작은 변화를 감지하려는 노력이 예술로 쌓이게 되는 결과다. 감동은 무엇에 의미부여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속성이 있기에 인간의 보편적 정서와 닿아있다. 즉 공감의 성취물이다. 관찰은 어떤 특정한 대상을 분석하려는 의도로 해석되곤 하지만, 예술행위 또는 예술교육에서 관찰은 분석 이전의 단계를 지칭하게 된다. 바라보는 대상에 대한 침잠으로 부터 시작되는 시간싸움이다. 관찰의 주요 대상은 일상이다. 일상을 관찰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이 단지 특정 사물에 대한 것이 아니다. 감각을 열어두고 대상에 침잠하는 과정은 단지 대상의 외형적 변화를 감지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우선, 시간에 대한 감성이 열린다. 우리가 무감각하게 누리는 광원은 태양으로 부터 온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밝기와 위치가 변화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모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바뀐 것을 보게되는 듯 하지만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식한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왜 모를까 싶지만 통합적 감각을 열어두려 노력하고 보면 시간의 흐름이 신기하거나 낯설게 느껴진다. 사실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대상을 보는 것에서 지각된다. 그 지각에서 그치지 않고 대상체가 빛을 받아들이는 순간의 변화가 감지되고, 그늘이 눕거나 사라지는 경험이다. 여기서 "순간"이 무엇인가. 필연 속 우연의 연속이며/시기는 알 수 없으나 패턴으로 예상되며/수를 셀 수 없는 간섭의 조건을 포함한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속이라 걸 감각으로 느끼면 그제서야 자신의 경험영역으로 수용한다.

관찰과 일상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상의 관찰과 기록은 경험을 타자화 시킨다. 수 많은 예술이 아티스트의 자기표현에서 나왔다는 것에 토를 달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개인의 세계관이며 그 안에 갇혀 있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개인이 보고 듣고 만지는 감각과 대상체의 연결을 시도하면서 개인의 감각과 감정 또는 경험을 내면에서 외부세계로 내보내고 다시 받아들이는 순환을 반복하면서 타자화된 자기 경험을 표현하게 된다. 이것이 가능해질 때야 비로소 진짜 자기의 순수한 내면을 들여다 보게 되거나 보편성이라는 애매한 경계속에서 명제들을 찾아내기도 한다. 단지 그것이 개인과 대상체와의 관계가 아니라 사회적 참여등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더 분명해 진다. 일상은 매일 반복되는 것을 말한다. 반복은 같은 것이 되풀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의 같은 패턴화에 대한 인식이다.

“자신을 소재로 자기 표현이 이루어지고 나면 거기에서 ‘나’는 사라지고 타자화된다” -Nicolai Hartmann

“오브제는 세상을 사는 인간의 기호이다.”–Roland Barthe

카피에 대한 여러 해석_워크숍 초대

ARTICLE 2021-03-13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정말 다양한 정보를 접합니다. 흔히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물론, 정보의 양과 무관하게 정보의 질이 훨씬 중요합니다. 더구나 정보는 늘 업데이트되기 때문에 건강한 정보를 어떻게 취할 것인가가 현재를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해졌습니다. 얼마전 어떤 선생님을 뵙게되었습니다. 그분이 이런 질문을 하시더군요. 앞으로 어떻게 되든 백신을 맞아야 할 때가 올텐데 접종시기를 어떻게 결정하겠냐는 것이었어요. 순간 멈칫하더라구요. 하지만 나름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과 같은 대답을 하는 정보와 지식이 필요해진 사회가 되었다는 겁니다. 백신이 무엇인지.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 임상실험이란 무엇인지. 조금 더 필요하다면 그 역학작용과 면역체계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정보와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살아남기"위해서라도 반드시 입력해 두어야 한다는 거죠. 정보와 지식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 알아내거나 발견한 정보와 지식이 있을 때 공유해야 하는 것은 인류가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자 윤리입니다.

"Copy & paste" 요즘 사용하는 줄임말인 "복붙"은 뭔가 도둑질 같기도 하고, 해선 안되는 것 같은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전 정보를 복사하면서 배우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누군가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농 섞인 표현이 있기도 하구요. 이번 시즌에서는 건강한 정보의 업데이트는 이전 정보를 정확히 알아야 가능하다는 것이 주제입니다. 이는 인간의 문명 대부분에 걸쳐있습니다. 예술은 어떨까요. 물감의 성질을 이해할 수 없었다면 해낼 수 없는 일이 생기고, 저항과 반도체가 없었다면 우리는 생활에서 전기를 자유롭게 쓰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 정보와 지식은 결국 기반이 되는 무엇을 존중하고 잘 카피해냈을 때 새로운 창의적 발상으로 작업을 도와줍니다.

복사와 붙이기에서 원본의 가치를 이해하기 위한 워크숍을 기획합니다.

medium

ARTICLE 2021-03-13

옷을 살 때 디자인을 고른 후 결정해야 하는 건 사이즈다. L/M/S. 맞춤옷이 아니라면 대충 이 정도에서 골라야 한다. 여기서 M은 중간이다. 큰 옷과 작은 옷 사이에 있다. 스테이크를 시키면 주문받는 사람이 묻는다. 고기는 어느정도로? 이때 특별한 취향이 아니라면 미디움을 시킨다. 적당히 익혀달라는 말이기도 하다.

미디어는 의사소통 가운데 존재하는 중요한 도구임에 분명하지만 그 출발점은 인간이다. (미디어인)인간이 자기표현을 위해 사용하는 데 다양한 미디어로 도구화된다. 말과 글 음악, 이미지, 디지털등이다. 전달되는 미디어는 생명력을 가지고 수용자에게 다가가지만 수용자의 참여가 없으며 의미가 생기지 않는다. 즉, 미디어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은 의사소통의 키워드에 해당한다. 이렇게 볼 때 미디어나 영상을 교육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생각해 보자. 현대사회의 매스미디어에 교육적 논의가 시작된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당연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자본력이 지배하고 있는 나라 미국은, 실용적 관점으로 미디어교육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매스미디어는 자본과 결탁한 것임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각종 광고료를 지불하고 있는 셈이 되어지는 시청자는 곧 소비자라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한다. 더구나 매스미디어가 사회적 파급력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미디어교육의 주 관점이 시청자 또는 소비자운동과 함께 적극적 참여를 통한 감시의 기능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현실의 재현 매스미디어의 현실왜곡과 한계 상업미디어에서의 소비자 권리 인식등의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반면, 위에서 서술한 교육적 기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현대사회의 정보와 미디어의 분화, 뉴미디어의 적응성등은 분명히 그러한 인식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음을 느끼곤 한다. 건강한 매체체험을 하는 것은 문화적 다양성을 경험하여 자기 언어를 가지고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소통의 부재는 세대가의 갭을 낳았고, 이것은 겉잡을 수 없는 오해와 왜곡으로 이어지고 있다. 서로를 이해하려고만 했지 서로를 경험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또 다른 미디어 왜곡현상중에 하나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영상과 미디어 교육은 매체화 되어진 자기를 드러내 보고 삶과 세상에 다리를 놓으며 문화를 건강하게 하는 것이라 할수 있다. 교육으로 이해하는 모든 것은 문자리터러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교육적 생산성을 갖지만 영상교육에서 주 대상자인 10대는 문자의 소통을 버겁게 느낀다. 자기 언어라고 생각하지 않는 가운데 교육 대상자는 도덕적 판단을 강요받게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 할 수 있다. 자기 표현의 도구로 미디어를 사용하여 “나”로부터 분화되어 나온 미디어와 메시지의 소중함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다 할 수 있다. 21세기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상상력에 기반을 둔 창조적 사고력이다.

미디어는 의사소통(communication)의 수단이라는 표현에 가장 들어 맞는다. 메시지를 전달 하고자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사용하는 통로이며 수단이다. 인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간단한 소리와 상징적인 그림 그리고 언어로 대표되는 다양한 기호들 을 발전시켜왔고 현대에는 전자문화의 영향으로 더욱 다양해 졌다.농경,유목사회에서 의사소통의 핵심은 듣는 것에 있었다. 생존과 생활에 필요한 정보(지식,지혜)는 어른(경험자)들로부터 전수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보고 듣는 것이 중요한 방법이었으므로 이 시기에 유능한 교사는 얼마나 잘 알아 듣도록 효과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었다. 지역사회는 축제나 시장에서 정보를 주고 받았으며 이때 역시 말로 하는 언어가 주로 사용되었다. 마을은 마치 한 몸 처럼 상부상조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청각과 감성을 발달시켰다. 15세기 구텐베르그는 인쇄술은 의사소통의 방법을 획기적으로 바꾸었다. 이제 지식이나 정보는 책에 실려서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 되었다. 문맹자는 그가 아무리 훌륭한 인격을 갖추었다 해도 가르치는 사람(교사,지도자)이 될 수 없다. 교육의 장소는 가정에서 학교로 교사는 부모나 어른에서 먼저 지식을 습득한 지식인에게로 넘어갔다. 아이들은 가정을 떠나 집단으로 학교에 보내졌다. 전통적인 이념이나 사상보다 새로운 지식에 매료되었다. 문자를 보고 이해하기 위해 시각과 사고력이 요구되었다. 인쇄된 책에 실린 지식은 가장 강력한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전기의 발명은 곧이어 라디오와 TV를 일상에서 사용하게 했으며 공장을 움직이게 하고 대량생산된 물건들은 팔릴 곳을 찾아 시장전쟁을 불가피하게 했으며 전파는 모든 나라와 부족과 국가의 이념적인 담을 허물었다. 사람들은 마을 축제나 학교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나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사회의 대표 적 매체는 컴퓨터이자 네트워크 자체다. 인간의 두뇌를 모방하고 있으며 그 망은 마치 신경조직처럼 뻗어나간다. 우리는 의사소통을 위해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사용하도록 감각을 연장한다. 인쇄의 시대에 기능을 축소시켰던 청각은 오히려 더 중요한 기능으로 부활했다고나 할까. 현재 이 시대의 문화는 인터넷과 멀티미디어의 시대로 고도로 발달된 연결망을 구축하고, 그 중심에 로보틱스/컴퓨팅/인공지능이 자리한다. 다시말해 전기는 단지 에너지가 아니라 인간을 통제하는 실질적인 힘이 되었다.

집단사고의 오류

ARTICLE 2021-01-24

"1961년 4월 17일, 미국은 1,400명의 반카스트로 쿠바 추방자들로 구성된 무장 군인들을 쿠바 남부의 해안 피그만으로 침투시켰다.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몰아내고 친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여러 위험 요인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실행된 이 작전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1,2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거나 체포되었고, 미국은 포로들의 몸값으로 5,000만 달러 상당의 식량과 의약품을 지불해야만 했다. [피그만 침공사건]은 당시 미국 내 최고의 군사전문가와 상황분석가들이 참여하여 내린 결론이었다. 의사결정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만장일치를 이루어내야 가장 합리적일 것이라는 중압감은 결국 엄청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더구나 최고의 전문가로 구성된 그 회의구조와 결정내용은 실행에 옮기기까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결속력이 높은 소수의 의사 결정 집단이 대안에 대한 분석과 이의 제기를 억제하면서 공동의 합의를 쉽게 이루려고 하는 왜곡된 사고 유형을 “집단사고의 오류”라고 말한다. 결국 집단 사고는 의사 결정 과정에서 나타나는 집단 착각 현상인 셈이다. 위의 사례뿐만 아니라 미국의 베트남 확전 결정,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 등도 집단 사고의 예라 할 수 있다."

이는 조직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의사 결정을 내려야 하는 집단에서 종종 발생되며, 그 발생 원인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을 수 있다. 공동체의식이 강한 것은 조직의 강점으로 보이지만, 리더에 의해 주도된 공동체이거나 대의명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조합한 의식일 경우에 발생한다. 이때 옳고 그른것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또 다른 경우는 집단에 속한 성원이 속된말로 가방끈이 긴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실수와 실패를 경험한 적 없을 때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읽고 듣고 배운것이 그 경험을 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빈틈없을 것이라는 추정이 생긴다. 집단 사고가 발생하면 의사 결정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우선 대안의 수가 적을 뿐만 아니라 대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다수가 선호하는 안에 대해 비판적 사고에 입각한 재검토가 어렵다.

집단 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막는 방법은 없을까. 집단사고의 오류를 주장한 사람은 미국의 심리학자 어빙 제니스다. 그는 조직이 집단 사고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사안을 공개적으로 논의하거나 리더가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를 만들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논의 집단 자체를 이원화한다. 이 두가지 조차 실행할 수 없는 경직된 조직이라면 제기된 주장에 대해 흠을 잡는 반론 대변인을 의도적으로 두는 방법이 있다. 집단 사고는 어느 조직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집단 사고가 발생하는 원인과 징후들을 공유하는 한편, 집단내 브레이크 장치를 미리 마련해 둘 필요가 있다. 개인에 비해 오히려 집단이 더 극단적으로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교황청에서는 교황을 선출할 때 의도적으로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이라는 제도를 두었다고 전해진다. 추천이 될 정도라면 이미 교회 내에서 검증된 위인이기에 교황이 될 재목이 아니라고 트집을 잡는 다는 것은 힘이 들었으며, 교회내의 입지도 문제가 되었다. 그 완충작용이 ‘악마의 대변인’이라는 제도였다. 투표권을 가진 사람들과 추천인들은 그가 왜 교황이 되어야 하는가를 말하는 동안, 비숍중의 한 사람은 ‘악마의 대변인’이 되어 그가 교황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말하는 것. 우리의 의사결정 구조안에는 악마의 대변인이 있는가.

당사자의 입장

ARTICLE 2021-01-21

교육설계에 앞선 피교육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자.

어린이와 청소년을 만나면서 당사자 입장을 고려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런데 그것이 쉬운일은 아니다. 그런 사고의 기초가 되는 것이 비슷한 상황의 규제를 상상해 보는 연습방법이 요구된다. 다음은 상상시나리오의 몇 가지 예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상황과 완전히 독립적이거나 문화와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순 있겠지만 시나리오로 상상하면서 당사자는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되는지 유추해 보는 것이다.

1) 성인건강보호법이 입법되고 술은 45세미만, 담배는 60세미만이 구입할 수 없게 된다면... 2) 중. 고등학교에 콘돔자판기가 설치되고 보건실에서 피임약을 나누어 주는 제도가 생긴다면... 3) 의무교육이 대학까지 확대된다면... 4) 대한민국의 모든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직장인 두발규제가 시행된다면... 5) 근로기준법이 1일 근로시간을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14시간으로 규정한다면...

“아는 것”에 관심이 간다. 사람들이 모여서 연예인들의 루머를 끊임없이 하고, 뉴스에 그들의 사생활을 보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공통적으로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아는 사람의 기준이 모두 다르겠지만,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았던 사람을 친근하게 느끼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는 사람이 나오기에 텔레비전은 더욱 재밌어지고, 그렇게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최근 가수는 웃겨야하고 개그맨은 과장된 변장을 서슴지 않는다.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이유는 아는 만큼 보이고/아는 만큼 들리고/아는 만큼 관심이 가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교육설계를 할 때 어떻게 ‘아는 것’을 마주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하는 장면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잘 사용/활용할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론을 말하는 것이다.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내가 습득한 지식을 대입하여 문제를 해결하거나, 어떤 특정한 상황에 대한 메타적 관점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못하는 것을 해내거나,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달성했을 때 박수를 보낸다. 인류의 몇%가 해낸 성과를 보고 모든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을 불어넣는 것은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우리가 개발해야 하는 것이나, 잠재력을 끌어올린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 전자는 인류의 몇%고 후자는 대다수의 사람들에 가깝다. 간혹 인용되는 소극적 교육(루소가 말한)이란 잠재력을 극대화시키는 일종의 방법론에 가까운 발상이다. 즉, 교육자의 개입이 최소화 되었을 때 잠재력이 발현되고 자생력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내용이 발생한다. 나 스스로 어떤 교육적 태도를 준비하고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예술교육 기획자의 시선_공생과 예술교육에 대한 노트

ARTICLE 2021-01-14
  1. 며칠전 갑자기 눈이 내렸다. 집 밖에 나가서 현관문 근처를 쓸었다. 누군가는 이곳을 쓸어야 사람들이 미끄러지지 않고 다닐 수 있다. 아이들의 눈싸움과 썰매놀이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길이 오픈되어야 한다. 그래서 눈이 오면 입구를 빗자루질 하곤 했다. 그런데 올해 처음으로 느꼈다. 혼자 쓸고 있었다. 눈이 이렇게 쌓이고 있는데 나와서 빗자루질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걸 여태 몰랐다. 단독주택에 살 때는 너무도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공동주택인 아파트로 이사와서도 나는 내려가서 눈을 쓸었다. 누군가는 이곳을 쓸어야 한다. 그래서 나간다. 경비아저씨들과 관리소 사람들에게 관리비를 냈으니 그들이 쓸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관리비를 더 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많은 눈길을 그들 몇명이 혹독한 노동을 해야 하는 쓸쓸한 공간으로 놔두고 싶지 않다.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청소를 누군가가 할 것이라고 위탁하는 그 순간을 목격한다면 그곳에서 공동체성을 말하긴 쉽지 않다. 공동체성은 누구네집 숟가락 숫자나 사생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닥치고 일하는 것에 가깝다. 제발 좀 떠들기 앞서 휴지를 줍고, 공유마당을 청소하라고 얘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2. 공동체는 배려를 통해 공생하며 산다. 그 당연한 배려를 다른 이름으로는 희생이라 부르기도 했고, 어떤 관점으로는 협업이라 부르기도 한다. 수십년 전만 해도 마을 노인의 죽음은 공동체를 움직이곤 했다. 자기 집에 있는 식기를 꺼내와 팔을 걷어붙이고 모여들던 아주머니들을 상상할 수 있었고, 손님맞을 준비는 가족과 더불어 이웃사람이 함께 힘써 해내는 모습이 그려진다. 현재 이런 풍경은 특별한 것이어서 다큐멘터리에 등장하거나 영화속에 등장한다. 낡은 것이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사적영역에 침범을 두려워하는 현대인의 생활상이라고 접어두자면 중대한 가치를 놓치게 된다. 현대인에게 이런 관계의 문제는 이웃을 경계하고, 공동체의 성원을 의심하고,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에 과하게 이입하여 사회를 두렵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은 사라진 공동체의 든든한 지원은 인간의 삶에서 필수조건에 해당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시스템으로써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재화의 교환이나 지불로 대체된다. 돈을 주고 사거나 그와 유사한 거래로 변해왔다는 뜻이다. 다시말해 관계방식으로 자연스럽게 해결되던 문제가 재화와 사회적 권위를 갖지 못하면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이전되었다. 이때 재화와 힘을 갖지 못한 공동체 성원이 느끼는 것이 분노와 상실감이다. 문화와 예술은 한 인간의 태생적 배경이 되어버린 습속에 근거하는 경험영역에 있다. 문화는 환경이며 예술은 경험재다. 생성조건이 온전하여 자연발생하며 이전의 경험속에 추론한 행위라는 뜻이다. 한 개인은 물리적 독립조건을 충족시키면 정의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농축된 문화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예술교육은 개인의 문화/예술적 성장을 중심에 두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게 된다. 하지만 사회적 분노와 상실감이 배경으로 존재하는 한, 개인의 성장에 교육이 역할을 할 수 없다.
    모두들 자신이 우리사회를 가장 잘 들여다 보고 해석하고 있다고 강하게 믿고 있더라. 넘쳐나는 자칭 전문가 그룹의 등장을 보면 실감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병리현상이나 사회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내가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고 내세우기 급급하다. 하지만 사회적 항상성이 어느 시점에 정상작동할 것인지 기다리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또 어떤이는 사회가 자정능력을 가진 유기체라며 스스로 구경꾼을 자처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힘을 보탠적이 없으면서 정작 자신에게 고통과 사회적 소외가 가해지기 전까지는 무감각하게 반응한다. 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해 낼 수 없다. 단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하고 있는 개인과 사회의 모습을 성찰해야 할 때는 분명히 찾아왔다.

  3. 흔해빠진 예술교육 포럼에서 발표자의 이야기가 충격적인 기억이 있다. 소득수준과 학력은 문화향유능력과 비례곡선을 그린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문화와 예술의 향유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문화콘텐트를 소비하는 능력으로 놓고 보면 그 이야기는 타당성이 있다. 전시를 관람하고,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는 횟수가 늘어날 수록 미적 탐색능력이 높아지고 문화적인 사람이 된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포인트는 누구와 공연을 볼 것인가 (-> 즉 관계방식과 관계의 질에 대한 문제다), 전시를 보고 난 후에는 어떤 경로로 집에 오는가(-> 문화와 예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한 이슈다), 내가 원한 콘텐트를 소비하는 주체인가(-> 복지의 시각에서 문화와 예술을 바라보게 되면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최소한 남들만큼은 우리도 한다는 시각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때 문화소비의 주체 각종 문화와 예술을 개별 콘텐트로 떼어놓고 상상하는 낡은 사고방식은 단체로 관람을 시켜주면 문화예술의 향유자권리가 지켜지는 것이라고 보는 도식적 사고를 만들어낸다)를 우선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극단적으로는 타워팰리스에 사는 개인으로서 10대 청소년은 문화예술의 적극적인 소비자라고 전제하거나, 농산어촌의 분교에 다니며 농사가 주업인 부모를 둔 10대 청소년은 TV이외의 문화수용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가정해선 안된다는 말이다. 학교에 다니면서 강둑을 걷고, 바람의 냄새로 하루를 점치는 문화적 환경은 도시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며, 문화적 다양성이 허용되는 거리를 걸으며 오브제의 예술성을 경험하는 것은 도서산간지역에서 경험할 수 없다. 즉, 무엇은 예술이고 무엇은 예술이 아니다로 선을 그어선 곤란하다. 소비가능한 예술경험을 중심에 두고 우리는 예술과 예술교육을 말할 순 없다. 촌스러움이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바라볼 때 이질감을 표현하는 말이다. 촌에사는 사람이 촌스럽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움을 말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비하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예술교육은 어떤가. 촌스럽다는 자연스러움을 얼만큼이나 존중할 수 있는가 질문해야 한다.

쓰다 말았던 글

ARTICLE 2021-01-12

(2014년에 어딘가에서 원고 부탁 받고 쓰다가 말았던 것 같다.
아마 다른 주제로 글을 보내지 않았을까?)

"시간"에 대한 객관적 정의는 없으나 조작적 정의나 약속의 개념이 있다. 시간에 대해 가장 오랜 관심을 가진 학문은 역시 천문학이지만, 아인슈타인 이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상대적 시간을 증명해내면서 (굳이 표현하자면)뒤틀렸다. 표준시간이란 그래서 천체를 중심으로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맞춰놓은 것이거나 약속의 개념이된다. 그 역사는 얼마나 되었을까가 궁금하다면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는건 분명하다. 봉건제 해체 이후 농민계급이었던 노동자에게 더 많은 생산을 요구하기 위해선, 더 효율적 관리 대상으로 시간개념이 확보되어야 했다. 그렇게 만들어져야 했던 표준시각은 인간을 시스템으로 몰아갔다. 표준이 된 시간은 생활의 편리를 가져왔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으로 생각한다면 참 무서운 결과를만들어낸다. 가장 비정상적인 생태계를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 170만년전 두발로 걷기 시작한 인류는 신화로 존재하는 아이테르를 바라보며 지구에 적응하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에너지원이 되는 태양을 중심으로 살아왔다. 생존과 번식을 위한 자연의 시스템으로 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은 에너지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문명은 그 에너지를 어떻게 다루는가로 부터 출발했다고 본다. 문제는 소유다. 초기인류의 생존을 위한 투쟁적 관점이 아니라 소유를 위한 투쟁은 현재시점까지 계속되는 것이란 말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토인비가 말한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시간을 누가 소유할 것인가의 개념이 되었단 말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시간을 소유하려고 한다. 그 시간은 생산량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사회 대다수의 사람들이 체감하는 시간이란, 물리적 사건의 연속선의 한 지점이거나 독립적 물리량을 갖는 비연속적 객체라고 보기 보다는 재화와 교환되며 소비를 가능케하는 화폐와 유사하다. (물론 이 관점은 생산주체인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의 쓰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긴 싸움이 계속된다) "나는 내 시간의 주인이다"라고 역설하는 자기계발서를 보면 한심한 이유기도 하다. 오히려 "나는 타인의 시간 노예다"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2014년 4월. 한국사회는 기능이 정지된 정부로 인해 무력감을 갖는다. 세월호의 침몰로 인해 시작된 무력감이다. 이 글은 세월이라는 시간개념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의 조각 중 하나다. 왜...라는 질문이 자꾸 생기지만 결국 기능상실의 가장 큰 원인은 모두가 타인시간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하는 거다. 매뉴얼이 없어서 문제라고 말할까봐 나는 더 무섭다. 매뉴얼은 이미 있다. 엉성한 것이 문제다. 그럼 완벽한 매뉴얼은 존재할까? 그건 사건이 잘 수습되었을 때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지키지 않아서 문제가 아니라 시키지 않아서 문제가 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어떤 설명도 지금은 설득력이 없다. 타인의 시간을 사는 것이 당연해진 사회에서 그 무엇도 각성할 수 없이 마비된 인격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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