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ㄹㅂㄹ 시즌1-8 기획노트

ARTICLE 2020-12-21

2010년에 시작한 어린이 예술캠프 “우락부락/友樂部落/ㅇㄹㅂㄹ"은 친구가 있는 즐거운 부락이라는 타이틀로 어린이 여행을 기획 운영했다. 캠프는 비일상적 공간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본디 여행이란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경로가 있다고 본다. 혼자 또는 여럿이 다니고, 훌쩍 떠나거나 꼼꼼히 계획해서 간다. 그 모든 것이 힘든 상황이거나 환경일 때 여행프로그램안에 몸을 맡기게 된다. 어린이와 예술가가 함께 떠나는 여행은 놀이도 교육도 아닌 그 어느 애매한 위치에 선다. 누군가는 그 여행을 기획하고, 누군가는 여행을 즐긴다.

시즌1. 상상마을 창작 놀이터

  • 비일상적 경험과 삶의 동기에 주목한다. 캠프는 캠퍼의 비 일상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생활의 근거지에서 벗어나 잠깐 스스로 외로운 자기를 만나거나, 짧은 여행으로 일상과 다른 새로운 경험의 장을 열게 된다. 2박3일 짧은 여행에서 생기는 경험은 비일상적 경험의 축을 만나 조금 다른 자기 삶을 반추해 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는 매우 자연스런 경험적 자극이고, 이를 통해 얻게 되는 비일상적 동기는 다시 돌아올 일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마치 한 예술가의 삶이, 일상성과 비 일상성을 넘나드는 경계에서 발견한 자기 성찰이 되는 경우와 닮아 있다.
  • 아티스트와 놀다. 방학이 되면 각종 교육프로그램과 캠프가 생긴다. 하지만 교육캠프 또는 체험캠프라는 제목으로 주최되는 캠프가 식상하게 느껴지는 몇 가지 이유는 /장르교육의 성격이 분명할 경우/ 단기간에 큰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기존캠프들과의 차별성 없는 프로그램정도라고 보여 진다. 이런 의미에서라도 이번 캠프는 예술교육이라는 의미보다는 예술캠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적합한 표현이 된다. 교육이 중심 키워드에 놓이게 되면 교육 과정에서 생산된 결과물에 너무 많은 의미(교육적 성과, 윤리 의식, 예술적 완성도 등등)를 포함 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 더 가벼운 예술에 대한 기대. 『이것은 예술이다 vs. 이것은 예술이 아니다』의 경계는 허구에 가깝다. 그럼에도 특정한 기술을 연마하여 예술가가 된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기에 인간의 역사에서 예술이 가지는 탐미적 경향이 우리 감각을 놀랍도록 진보시킨다. 그래서 예술가가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살아 있다는 것은 행복감을 준다. 하지만 예술과 비예술이라는 것을 갈라놓을 수 없기에 거리의 낙서가 감동적인 예술로 보이거나, 모래사장에 새겨 넣은 짧은 시가 어느 개인에게는 그 어떤 규모의 뮤지엄과 갤러리에서 보다 훨씬 큰 예술적 영감을 주는 것이다. 수년간을 기능적 연마를 통해 달성된 완성도 높은 예술이 있는 반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술도 있다는 예술적 지형에 대한 수용이 필요해진 시점이다. 이 캠프는 단기간의 집중력과 방학이 되면 각종 교육프로그램과 캠프가 생긴다. 하지만 교육캠프 또는 체험캠프라는 제목으로 주최되는 캠프가 식상하게 느껴지는 몇 가지 이유는 /장르교육의 성격이 분명할 경우/ 단기간에 큰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기존캠프들과의 차별성 없는 프로그램정도라고 보여 진다. 이런 의미에서라도 이번 캠프는 예술교육이라는 의미보다는 예술캠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적합한 표현이 된다. 교육이 중심 키워드에 놓이게 되면 교육 과정에서 생산된 결과물에 너무 많은 의미(프로그램의 밀도를 높여 더 가벼운 예술과 심미적 체험이 생기는 것을 지향한다.

시즌2. 지구에 남기로 결정하다

2010년 여름에 이어 두 번째 예술교육 캠프다. "지구에 남기로 결정하다" 이런 주제어는 약 간 어이없고, 허망하지만 해석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고 야망과 욕심보다는 쿨한 단념이 들어 있기 때문에 설정했다. 우주시대라고 사람들이 말하지만 보편적인 정서를 가진 사람들에게 우 주는 동경 또는 두려움 같은 것에 가깝다. 뭔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게 다들 발맞춰 우주를 정복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서 하나의 세계를 살아가는 개인과 공동체를 생각해 보았으면 한 다. 캠프에서 놀이는 주요 키워드로 작동한다. 어린이는 놀이로 타자를 인식하며, 세계를 학습 한다. 어린이의 특징이기도 하고, 때로는 사회의 허용범위에서 누리는 특권이기도 하다. 또한 아직 더 많은 것을 배울 기회가 남겨져 있기 때문에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인정함과 동시에 건강한 실패는 학습과정으로 인정할 수 있다. 캠프의 기본 배경은 아티스트와 건강한 놀이터 를 만드는 것이지, 아이들이 짧은 기간 동안 엄청난 지식과 정보를 습득해 가는 것과는 거리 가 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기획한 프로그램이기에 근사한 포장에 욕심 내야 하 는 현실적 이유를 찾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를 생각해 보게도 된다. 캠프를 기획하기 위해 자료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재미있고도 놀라운 동영상하나를 발견했다. 2010년 평범한 아빠와 아들이 헬륨풍선에 GPS를 장착한 카메라를 매달아 띄우는 것이었다. 유튜브에서 발견한 이 작업은 꽤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실험과 실패의 과정이 담겨 있었고, 이들이 어떻 게 이 작업이 가능했었는지 몇 줄의 설명이 있었다. 영상에는 몇 만 피트까지 올라갈 수 있었 고, 촬영된 영상에는 바람소리와 구름위에서 바라본 둥근 지구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하지만 감동의 코드는 아이와 활짝 웃으며 지구로 귀환한 카메라를 찾아서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학 교의 과제로 이런 것을 수행했다면 결과물은 같은 수 있겠다. 그리고 어떤 공모전에 내보내기 위한 프로젝트 였다면 더 멋진 영상기록이 남아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기가 사는 아파 트에서 낙하산을 실험하고, 아빠의 차를 타고 가서 카메라를 수거하는 그 경험은 즐겁고 신나 는 경험처럼 자연스러울 순 없다. 만약 과제였다면 이런 일상성에 근거한 작업이 가능했을까? 자연스럽고 유쾌한 경험은 이 아이가 성장하면서 10년...20년...이 흘렀을 때 어떤 차이를 만 들어낼까. 캠프의 기본 개념은 이렇게 출발한다. 무엇인가 엄청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고 학 습하는 과정이라기 보다는, 아티스트와 놀며 즐거운 경험을 남기는 것이다. 이 캠프에 왔던 어린이들이 10년 후 20년 후 언젠가 이 경험을 떠올리며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곳 에 미세하게 영향을 주어,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내는 자연스럽게 용해된 삶의 작용 매개를 만들어야 한다. 어린이의 상상력을 때로는 비생산적인 공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매일 생 산적 활동만을 하거나, 먹고사는데 도움되는 일만 하며 살진 않는다. 생각해 보면 모두의 웃 음거리가 되었던 하늘을 날겠다는 청년들의 꿈이 현실이 된 것은 비생산적 공상이 기초가 되 었다. 어린이들은 접근 불가능했던 세계에 대한 꿈을 꾸고, 자연스러운 경험으로 체득한 상상 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번 캠프는 과학적 상상력이 예술과 만나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비 생산적 공상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하는 작업이다. 마치 하루 하루의 시행착오로 비약적 결과를 만들어낸 과학적 상상력이, 하루 하루의 일상과 문화를 담아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 술과 꼭 닮았다. 이번 캠프는 겨울방학에 아티스트와 2박3일을 고흥 우주센터에서 보내며 과 학/예술/스토리가 담기는 다소 비생산적 공상의 장이다. 아이들은 총 세 개의 카테고리에서 아티스트를 만난다. 첫 번째 카테고리는 [과학이 꾸는 꿈 '예술', 예술로 조각한 '과학']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테크놀로지와 예술은 참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그 둘은 원래가 한 몸이어 서 이런 구분이 생긴 것은 현재에 와서야 구분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복합양식 의 예술 영역이 자연스레 생긴 이유이기도 하다. 어린이들에게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과학 과 예술이 어떤 지점에서 만나고 작용하는지 작업하면서 스스로 알게 하는 워크숍이다. 소리, 광원, 빛이 모여드는 순간의 기록 등을 다루며 원인과 결과를 자연스럽게 추론하는 과정이 표 현되는 워크숍이다. 두 번째 카테고리는 [지구에 남기로 결정하다]인데 이 캠프의 주제어임과 동시에 아이들의 스 토리를 담고자 하는 노력이다. SF작가는 과학적 지식이 풍부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스토리는 독자와 호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 인류는 별의 모양새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때로는 신화이고 때로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상징이 되었다. 통계의 범위에서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으며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가 우리 사는데 어떤 영향력을 주는가를 살펴보거나, 이 주제를 객체로 바라보며 스토리를 정리하는 워크숍이다. 세 번째 카테고리는 [우주와 소통을 시도하다]. 몸을 움직이고, 소리를 지르거나, 퍼포먼스를 기획하면서 우주에 대한 상상력을 소통의 장으로 가져오는 작업이다. 우주와 소통하는 '나'의 존재와 존재이유 같은 것을 다루되, 철학적인 것을 바탕에 두는 것이 아니라 타자(또는 외부 의 세계)와의 소통을 중심에 두는 워크숍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과 비 물직적 가치 등을 캐릭터로 만들거나 우주시대를 시작하며 있었던 비극적 사건들을 떠올리며 합창을 하는 워크숍이다. 없던 꿈과 희망이 2박3일간 생겨야 한다는 허망한 기대는 꽉 막힌 어른들의 생각이라고 본 다. 이런 기획은 단순하고 쉽다. 이미 내재한 씨앗을 가진 아이들이기에 굳게 믿으면 된다. 잠 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건, 건강함의 증거란 걸 받아들이면 아이들이 마을을 열고 온전히 기대며 소통을 기대한다. 줄 세우고, 방향을 제시하면서 희망이 사라지는 경험을 우리는 이미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아이들을 믿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캠프에서 멋진 장면을 못 만들까 두려워 짜여진 프레임안에 아이들을 가두면 질서정연하게 움직여 꽤 뻔한 감각적 환희를 줄 수 있다. 스스로 찾아낸 여유에서 오는 잔잔한 감정의 파장이 아니라면 무슨 소용일까. 아티 스트를 만나 교감하여 생긴 스파크가 아니라면 멋진 공연이 무슨 소용일까. 감각이 주는 즐거 움은 순간을 만족시킬 수 있겠으나, 문화적 경험은 평생을 살아갈 힘을 만든다. 선택은 분명 하다. 다만 실행할 용기가 없을 뿐이다. 아이들에게 지구에 남기로 결정한 이상, 현재의 자기 가 보이는 오늘을 기억해 달라고 말하고 싶다. 스페이스 셔틀이 놓여진 공간의 모습과 이벤트 들의 감각적 즐거움은 한 순간 사라지고, 아티스트와 이 공간에서 침 한 방울 뚝 떨어지는 걸 모를 정도로 달리던 기억은 몸에 꼼꼼히 저장되어 기억으로 보존된다는 확신이 든다.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는 어른들의 질문에 스페이스 셔틀과 로봇을 봤다고 대답하겠지만 아이들이 진 짜 본 것은 아주 깊은 곳에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다가 조건이 성립되는 어느 순간 툭 하고 터 져 오를 것을 믿는다.

시즌3. 열두개의 아틀리에

  • 작업실과 전시실 / 연습실과 무대 / 실험실과 심포지엄 예술가의 작업실은 에술가의 생각이 예술행위를 전시실로 연결하는 튜브와 같은 공간디다. 형태와 장르에 따라 공작실, 연습실이라고 부른다. 예술가의 작업실은 때로는 사적이고 비밀스런 공간이다. 이 공간을 오픈한다는 것은 작업과정을 공개한다는 의미다. 즉, 결과물보다는 행위에 집중하고, 드러나는 것 보다는 가려진 것을 보게 되는 특권 같은 것이 아틀리에를 공개한다는 캠프의 기초 컨셉이다.

  • 아틀리에에서 예술교육이 일어난다는 것 예술교육의 장이 아틀리에가 된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특정 작업을 완성한다기 보다는 초기작업을 상상하는 것을 필요하다. 예술교육의 장으로 초대된 어린이는 아티스트가 되고자 배우려는 것이기 보다, 이 작업을 통해서 다양한 삶의 경험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경험을 아틀리에와 아티스트를 통해서 했는가에 따라 어떤 어린이는 아티스트의 꿈을 꿀 수 있고, 어떤 어린이는 삶의 자양분이 될 것이며, 또한 어떤 어린이는 예술가의 삶을 지켜보며 세계관이 넓어지는 경험을 한다.

  • 숲이 주는 공간감. 깊은 숲에 들어가서 제일먼저 하는 행동은 맑은 공기를 마신다. 평소에 마시던 공기와 다른 맛을 느끼게 되는 경험인데, 그것은 조금은 차갑고 신선하다는 청량감을 준다. 숨을 들이쉬고 내 쉬는 행동에서 발생한 행위에 대한 이해들을 하는 것이 필요해 진다는 의미다. 숲은 사람에게 상호작용을 만든다. 실내에 아틀리에를 만들고 작업하는 것과 함께 숲의 공간감을 최대한 살려주시는 것을 상상해야 한다.

  • 자연의 효율적인 시스템 낭비없이 모든 것이 쓰이는 것이 자연이다. 하나의 유기체이기에 자연은 쓸모있음과 없음에 대한 구분을 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것이 때가 되면 마르거나 썩어서 형태를 바꾸고 순환한다.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이 시스템을 끊임없이 닮아가려는 노력이 이 공간의 아틀리에서도 필요하다. 반면 예술은 시스템으로 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인위적인 노력으로 시작해서 결국 가장 자연스러운 효율성을 만들거나 구조화된 작업환경을 이끌어 낸다. 이 두 가지가 참 많이 닮아 있다. 더구나 사람들은 시각경험을 카피하고, 인식은 모사와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낸다. 예술을 통해서 찾고자 하는 것이 예술가가 구현하고자 하는 이상향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영감은 자연에서 빌어온 것이며 뉴미디어 테크놀로지 역시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있는 자연속에서 찾아낸 시스테메틱한 조형과 모듈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틀리에를 꾸미는 컨셉에서 엄청난 장비를 이곳에 들여와야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캠프는 자연의 효율적인 시스템에서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물리적공간을 이동하는 이사가 아니라 정서가 이동한다면 어떤 것이 가능할까 라는 질문으로 이 캠프가 구성된다.

시즌4. 비밀의 방

이건 비밀

시즌5. 숲풍

  • 비선형성_Nonliear 문화/예술/교육이 떨어지지 않고 하나의 고유명사화되는 과정에서 경험적으로 얻게 된 것은 선형적 방식으로 삶과 분리되지 않고 교육행위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하게 지향하며 얻게 된 것은 완성도 높은 커리큘럼이며, input과 output이 분명해 져야 한다. 문화예술의 향유자 권리의 관점은 "경험재인 문화와 예술이 더 많은 인구에게 보급되고 나면 문화예술로 인한 한 단계 높은 삶의 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분명해 진다. 문화예술교육 진흥원의 사업이 이 기본적인 관점과 철학을 유지하고 있다. 캠프는 그 선형성에서 벗어나야 하며, 벗어날 수 밖에 없다. 일상적인 공간을 떠나는 물리적 이동이 그렇고, 짧은 스케줄이라는 시간적 한계가 그렇다. 비 일상적 공간을 만나고 비 일상적- 2박3일간의 컴팩트한 문화예술교육- 행위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자기 모습에 대한 탐색이 된다. 캠프로 운영되는 문화예술교육이 실험적(실험은 실수가 아닌 실패에 대한 건강한 경험을 소중히 다룬다)성격을 갖고 있으며, 기승전결이 있는 일상적 교육커리큘럼과의 차별성을 가져야 한다.

  • 여행 아티스트는 2박3일의 일정을 풀어놓으면 6개월에서 1년의 교육과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만큼 압축적인 성격을 갖는 캠프의 특성에 맞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새로운 교육내용을 만들어 우락부락으로 가지고 들어온 경우도 있고, 우락부락을 경험하면서 아티스트의 세계가 바뀌기도 하는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우락부락 시즌4까지 오면서 아티스트가 캠프주제로 크로스오버를 경험할 수 있도록 세팅되어 왔다. 그 결과 우락부락 이외의 캠프에서 주제가 제안되고, 문화적 경험을 소중히 생각하는 기획이 나타나고 있다. 장르별 특성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주제의식을 드러내려고 하는 시도들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우락부락의 사회적 영향력이다라고 섣불리 말해선 안된다. 단지 우락부락이 딱 한발을 먼저 뗀 것이고(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미 수십년/수백년전에도 이런 요구와 문화는 있어왔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도는 아니었다) 현재 우리사회의 문화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 뿐이다. 시즌 5가 그래서 또 다른 한발을 내 딛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전혀 새로운 것을 제안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사회의 문화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수용하는 범위를 찾아보자는 제안이다. 시즌5는 예술콘텐트가 살아있으면서도 문화적 수용력을 넓히는 과제를 안고 시작한다. 특정 예술콘텐트를 전면에 내세우기 보다는 "여행의 문화" , "즐거움으로 남는 소풍과 친구" , "스스로 생산한 기억"이 드러나는 형식을 취하여 그 안에 자연스럽게 "경험과 행위로써의 예술"이 자생성을 가질 수 있게 한다.

시즌6. 우리 옆집엔 공작새가 살아

  • 우락부락으로 놀다. 우락부락은 "아티스트와 놀다"를 기초에 두고 기획한 다양한 문화예술교육의 실험적인 장이다. 문화예술교육에서 특정 장르를 뛰어넘자고 수년간 외치고 있지만, 현실에서 장르를 넘나드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크로스오버 경험을 풍부하게 가지지 못한 우리사회 예술교육시스템에서 아티스트가 크로스오버 교육을 실행하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락부락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놓인다. 장르를 앞세워 다양한 예술교육을 소개하는 여행식 교육프로그램 버전을 생산하거나 장르를 숨겨놓아 문화적 텍스트 안에 예술을 은근히 내려 놓는 방식의 두가지 선택지가 생겼다. 우락부락은 후자를 택했다. 클래식작곡가가 서점에서 전래놀이를 찾고, 사진작가는 가면을 만들고 그림자극을 연출했다. 회화작업을 하던 아티스트는 숲에서 몸의 움직임을 만들자고 제안하고, 일러스트작가는 각국의 식재료를 소개하고 요리를 한다. 막상 캠프의 현장에서는 아티스트의 예술적 기질과 장르적 손길이 적용되며 자연스럽게 놀이로 전환된다. 우락부락의 여섯번째는 이전 다섯번 캠프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작한다.

  • 여섯번째 우락부락은 커뮤니티. 시즌 6는 삶의 터전인 우리 동네의 이야기다. 지역은 어린이에게 크게 느껴지는 거리와 공간의 개념이다. 쉽게 쓰는 말로 마을이 있겠으나 그보다는 동네가 더 친숙하다. 동네는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 특히 우리동네는 걸어 다니며 감각할 수 있는 개념이다. 동네에는 친구가 있고, 함께 해야 재미있는 놀이가 있다. 다소 위험해 보이는 후미진 곳을 친구와 찾아가며 놀이는 시작된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위험해 보이지만 아이들에게는 모험의 공간이다.á현재 아이들에게 동네는, 놀이와 모험을 공유하는 곳이 되긴 어려워보인다. 어린이는 부모와 사회로 부터 멸균상태를 최대한 유지하며 필요이상으로 안전하게 자라고, 놀이터는 CCTV가 감시한다. 더구나 골목길에서 만난 수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뉴스에서 나오기라고 한다면 내가 사는 동네가 온통 불안요소 가득한 공포로 바뀐다. 동네에서 뛰어놀며 스스로 몸의 면역체계를 만들고, 다양한 경험으로 위험한 상황에 대처할 능력을 만들며 성장할 수 없다. 이번 캠프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연결된 동네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누구와 어떻게 놀까를 고민했다. 살아있는 동네의 모습을 구현하고 싶었던 거다.á시즌6가 우리동네의 어린이들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갑자기 붐처럼 불어온 커뮤니티 아트에 대한 환기다. 공공기금을 들여 지역으로 아티스트나 문화작업자가 파견되고 그 지역사회의 구성원이 참여하여 예술행위를 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지역민이 참여하여 그리고/노래하고/춤추고/만들고/촬영하고/공연한다. 이런 행위가 커뮤니티아트의 모습이 아니라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가장 아쉬운건 공공기금이 더 이상 지원되지 않으면 예술행위자체가 순식간에 사라지곤 한다. 그리고 참여한 사람들은 아쉬움을 토로한다. 다른 공공기금을 찾아보는 것은 그나마 긍정적인 문화행위라지만, 아무일 없었다는 듯 기억속에서 사라지는 걸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동네에는 예술가가 살지 않아? 진짜 없을까? 예술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고,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예술행위가 실제로 동네에 있다. 더구나 어린이는 매일ᅠ그리고/노래하고/춤추고/만들고/촬영하고/공연한다.á매일 예술을 하는 사람이 아티스트다. 우리 동네에는 수 많은 아티스트가 살고 있다는 뜻이다. 동네의 수 많은 아티스트를 찾아내고 그들과 놀이를 시작해보자는 말이다.

  • 공작새 간혹 공작새를 보면 깜짝 놀란다. 상상의 동물이거나, 어느 판타지소설에서 봤을 법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티스트는 공작새같은 존재다. 언제나 현재를 사는 이 사회에 섞여 있으면서도 아주 오래된 과거를 말하고 있거나, 먼 미래를 현재로 끌어다 놓기도 하며,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남들처럼 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없을 것 같으면서도 우리 가운데 있고, 예술세계가 활짝 펼쳐질 때면 많은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도 하는 존재다.

  • 미성숙한 어른에게 말하는 어린이의 목소리 어느 나라는 착한일을 하면 키가 커지고, 나쁜일을 하면 키가 작아집니다. 어느날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여러분 모두 착한일을 하세요"라고 말하셨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착한일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얘들아. 나 어제 착한일을 했더니 키가 2cm나 컸다~ 좋겠지 좋겠지? 무슨 일을 했냐구? 응. 길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가시는 할머니의 짐을 들어드리고 물에 빠진 고양이를 구했거든!"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모두 부러워하며 "와 좋겠다. 나도 어서 착한일을 해야 할텐데..."라며 좋은 생각을 많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착한일을 하려면 좋은 생각을 많이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여름방학이 되자 아이들은 착한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키가 쑥쑥 자랐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모두 부쩍 커있었습니다. 교실에 들어선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 다들 키가 많이 자랐네요? 착한일을 많이 했나봐요." 선생님을 보고 아이들이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어. 선생님은 왜 키가 그대로죠?" 방학이 끝나자 이 교실에서는 선생님이 키가 제일 작았습니다. 이야기 끝~

이 이야기는 어린이가 만든 단편애니메이션의 대사를 옮긴 것이다. 처음에 이 작품을 보고 귀엽기도 했지만, 아이들을 미성숙하게만 바라보는 우리 사회에서 이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야할까 고민이 되기도 했다. 어린이들이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른들의 세계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때로는 모사하고 모방하며 배우고, 때로는 거부하고 저항하며 자기 세계를 만들기도 한다. 어린이를 바른길로 안내하는 것이 캠프의 몫이 아니라, 건강하게 살고 있는 아티스트의 존재 자체가 캠프에서 드러나면 된다. 그 모든 여백은 놀랍게도 어린이가 알아서 채운다. 그 힘을 믿으면 된다.

시즌7. 노란잠수함

시즌 7은 어린이문화에 가장 많은 영향 받는 대중예술을 중심으로 다룰 시기적 고민이 담긴 캠프다. 아이돌 스타를 맹목적으로 따르거나, 좋아하는 연예인이 없으면 친구를 만들기 어렵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된다. 즉, 현재의 대중예술은 "대중적"예술이 아니라 "상업적"예술이라고 말해야 더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을 어떤 기점을 통해서 구분해 볼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속칭 클래식음악이라고 부르는 순수예술에서 아티스트는 굳이 음반을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대중음악을 하는 예술가는 음반을 만들어 대중과 만난다. 여기서 매개가 되는 예술적 형식은 현장성과 복제된 예술로 구분된다. 극단적 방식의 구분이기는 하지만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은 매개의 형식, 복제의 가/불가, 구매 또는 지불방식의 차이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21세기 어린이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다양한 대중예술을 접하며 산다. 거리에서, 핸드폰에서, TV에서, 인터넷을 통해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렇지만 대중예술 코드를 학습한 적도 없고, 그 역사에 대한 관심도 적고 단지 소비의 주체가 되기 쉽다고 생각된다. 이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한국사회의 문화예술의 현재가 그러하다. 더구나 노란잠수함은 전세계에서 수도 없이 많은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동화책을 비롯하여 소설과 에세이에 영감을 주었다.하나 덧붙이지면 노란잠수함 앨범은 영국의 조지 마틴경이 작곡한 클래식 넘버가 수록되었다. 비틀즈방식의 기타와 드럼비트가 들어간 락앤롤이 아니라 오케스트라가 앨범의 절반을 채운다. 그리고 비틀즈의 곡도 새로운 곡이 아니라 기존 비틀즈 곡의 편곡을 통한 새로운 버전이 수록되었다.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이 동시에 존재하고, 복제와 재구성이 자유롭게 구현된 형식이다. "대중예술의 정수"라고 까지 말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으나, 노란잠수함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서 "평화"의 세계관에 대한 스토리가 존재한다. 솔리드컬러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알록달록하여 언뜻 보기에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했나 싶다가도, 그 내용의 깊이는 상당한 수준에 있다. 시즌7은 비틀즈에 대한 찬양이 아니다. 대중예술이 무엇인지 해석하고 현재 우리가 어떤 문화와 예술환경에서 예술을 누리거나 소비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지점을 제시하고자 함이다. 우락부락의 방식에 근거하여 그 모든 내용은 자연스러운 놀이로 전환되고, 다양한 카피와 재구성 재생산을 통하여 대중예술의 "개념"이 용해된 캠프가 될 수 있다.

비틀즈의 노란잠수함(yellow submarine)을 검색해 본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비틀즈의 명반인데 정작 비틀즈의 원본 앨범재킷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더 많은 이미지는 대중이 커버한 다양한 아트워크들을 만날 수 있다. 또 하나의 예술세계가 펼쳐졌다는 말이다.

시즌8. 두 번째 호기심

어린이는 궁금하다. 왜 구름은 하늘에 떠 있을까가 궁금하기도 하고, 꽃은 왜 들판에 피어 있는지도 궁금하다. 사람과 사물...크게는 자연의 존재방식에 대한 궁금증에 해당된다. 답이 없어서 더 궁금해 지기도 하고, 답을 알아도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엄마의 뱃속에서 9달을 넘게 살았다는 것이 신기하지만 어떻게 된건지 속시원히 알려주는 사람도 만나기 쉽지 않다. 모든 인간은 개성을 가지고 성장한다. 모든 인간이 다 다르듯 궁금증의 주제나 범위도 다르다. 궁금증의 촉발은 호기심으로 부터 시작한다. 나와 타자가 왜 다른지 알기 위해서는 타자에 대한 호기심이 충족하면서 알게된다. 그래서 "왜........?"라고 반복하여 묻는다. 이번 주제인 "호기심"은 무조건 어른들을 알고 있을것이라고 생각하며 무턱대고 질문을 던지는 어린이에서 벗어나는 시기에 대한 이야기다. 어린이는 지적호기심을 갖게 되는 때가 있다. 어린이는 자신의 세계관이 형성되는 시간을 만나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호기심을 발동시킨다. 어른들과 개념어로 대화하기 시작하면서 가속화되지만, 그보다는 경험과 학습을 통한 지적 능력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된다. 반복적으로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10세를 전후로 하여 논리를 쌓아가며 호기심이 생기는 것. 즉, 나의 궁금증이 어디에서 왔을까를 궁금해 하는 때가 "두 번째 호기심"이다. 아티스트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가는 과정이 있다.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소통을 시도한것이라고 축소시켜 생각해 본다면, 어떤 호기심을 충족시키면서 예술세계가 만들어졌는가를 기억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 기억은 고스란히 예술교육이 될 것이라고 확신다. 쓸데없는 일을 벌이고 실수하면서 만들었던 다양한 경험과 기억이 아티스트를 세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티스트의 세계관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의 집합이다. 즉, 그 경험적 환경을 어린이에게 제안하는 것이 예술교육을 출발이라는 관점으로 캠프는 기획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숲으로 초대된 10여명의 어린이들에게 아티스트는 어떤 예술적 호기심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캠프는 완성된다. 아티스트는 무엇을 궁금해 했는가. 질문을 던져보자.

Woodstock Music and Art Fair

ARTICLE 2020-12-20

2차세계대전 이후 베이비붐 세대는 윗세대에게 낭만을 비판받았다. 몸을 부비며 강렬하게 싸우던 젊은이는 사라졌고, 꽃을 들고 낙원으로 도피하려는 모습이 곱게 읽혔을리 없었다. 안일한 히피들의 무절제만 눈에 보였을 것이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으니 그들이 생존을 위한 투쟁을 알겠냐며 코웃음을 쳤다. 베트남전이 발발하고 원치 않은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친구와 가족의 시신이 도착했을 때도, 기성세대는 평화를 말하기 보다 승리로 애국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 혼란의 시기에 일어난 아름다운 저항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1969년 8월 15일 우드스탁 페스티벌. 먼나라 미국의 이야기다.

우드스탁의 2박 3일은 평화를 말하는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다. 사상과 이념을 말하기 보다, 무엇하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는 옹졸한 사회안에서 만든 거대한 일탈이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Joe Coker가 1969년 우드스탁에서 With A Little Help Of My Friends를 부르는 영상을 보곤한다. 몇 년 전 그의 명이 다하기 직전인 나이 일흔에도 공연에서 이 노랠 불렀다. 무대에선 백발의 노인이 서있었지만 난 언제나 우드스탁의 공연장이미지가 오버랩되곤했다. 그리고 평생 뮤지션으로 사는 동력이 우드스탁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하곤 한다. 긴 시간의 축적으로 만들어진 초월적 순간이나 상황에는 농도짙은 감동과 뭉클함이 있다. 하지만,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 주는 특별함이나 어린시절에 경험한 강렬한 기억이 있다. 그건 한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두고 두고 자양분이 되는 것이 아니던가.

컬쳐뱅크_키친_드래프트

ARTICLE 2020-12-19

1 커뮤니티

한국사회에서 다수의 인간이 누리는 물리적 공간 “집”과 “지역”의 선택은 경제력에 달려있다. 어느 지역에 살 것인가 뿐 아니다. 집의 규모와 모양새 역시 그렇다. 서울에 살기 위해서는 교통체증을 견뎌야 하고, 포화상태의 문화를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한다. 휴식 또는 쉼이란 개념으로써 집이 아니라 보유하고 있는 재산이나 재화가 우리 삶의 물리적 공간을 만들어 낸다. 이런 상황에서 커뮤니티에 대한 개념을 근대이전의 마을공동체에 대입하거나 모델로 삼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공지원에서 커뮤니티가 개인화된 현재의 삶과 경제력에 따른 근거지 선택을 간과한 채, 공동체의 복원을 이상향처럼 말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미 우리는 빈곤포르노그라피의 천박한 상품성을 인식하는 사회로 진입했고, 젠트리피케이션이 단지 힙스터가 버리고간 문화가 아니라 부동산투기의 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렇다면 현재 커뮤니티를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인가. 복원의 대상인가 새로운 조합인가. 이러한 논의를 조금 더 진전시키면서 단지 “정이 넘치는” “훈훈한” “즐거운” 등의 수식어가 붙지 않아도 커뮤니티에서 나의 필요에 따라 뭉치고 흩어지고, 사생활을 지킬 수 있고, 남아돌지 않아도 충분하게 나눠가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관건이다.

2 한국사회의 가옥구조

가옥구조를 들여다 보면, 가족 구성원이 모일 수 있는 곳은 거실과 식탁이다. 최근들어 거실에 TV를 없애고 원탁을 들여놓아 대화 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반면, 식탁은 어느 순간 가사노동이 홀로 고립된 상황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의도로 오픈 되었다. 그 덕분에 주방과 식탁이 같은 곳에 위치하고 거실과의 경계도 모호해졌다. 안방에 모여서 밥을 먹는 드라마 속 장면 처럼 주방과 분리된 식사 장면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덕분에 식탁에 모여 앉는 시간은 정해진 약속이 아니라 효율적으로 배를 채우는 문화로 바뀐다. 현대인의 바쁜 삶에서 빨리 먹고 빨리 치운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모이기 보다는 각자의 쪼개진 스케줄을 맞추느라 주방과 식탁이 효율이 넘치게 디자인된 것이다. 이때 식탁은 터미널의 기능은 하지만, 의사소통의 기능이 없다. 이때 정해진 룰이 아닌데도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 모습을 버즈아이뷰로 보는 것이 필요할 듯.

3 비건의 도시락

우리 사회에 채식을 선택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채식주의는 일종의 환경운동이며 비건은 한개인에게 사회에 던지는 선언과 같다. 채식전용 식당을 찾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채식을 위해서라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식사자리를 피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더욱 힘들어진다. 단지 극단적인 채식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어딜가든 자극적인 양념과 과한 당류가 식당에서 제공되니 피하는 것이 더 힘들다. 최근들어 회사내부에서 음식이 다양해졌다고 하지만, 결국 공장에서 대량생산으로 만들어지다보니 선택의 폭은 점점 줄어들 수 밖에 없다. 혼자 만들어야 하는 도시락은 개인에게는 버겁다. 한끼를 준비하기 위해 재료를 사는 것 부터 다양한 메뉴를 만들 수도 없다. 만약 당뇨식이라면 어떨까. 신장투석 중이라면 염도의 조절은 필수다. 이런 식사를 준비하고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기 위한 아침모임이 있다면 충분히 이용할 만한?

4 생일 또는 파티

언제부턴가 생일파티를 식당을 찾게 되었다. 물론 편의성에서는 식당에서 밥먹고 헤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바쁜 현대인(참 지겨운 표현이다)에게 편의성 보다 좋은 것은 없다. 신경쓰지 않아도 돈내면 누군가 해주니 얼마나 편리한가. 그럼 사람들은 이 키친을 이용할 필요는 없다. 바쁜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커뮤니티 키친을 이용할 이유는 없다. 생일상을 마련해 주고 같이 장보는 것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흔쾌히 내주는 부모에게 이 키친은 유용하다. 자녀의 생일이면 미역국을 끓이고 따뜻한 쌀밥을 지어 김치와 함께 한끼를 먹고 맛있는 디저트를 나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 공간이 집이라면 불가능할 수 있다. 여러명이 앉기도 불편하고, 주방이 좁다면 유용하지 않으려나?

5 레시피

레시피는 온라인에 흔하다. 지금은 먹고 싶은게 있으면 웹에서 검색을 하고, 흔하디 흔한 블로그를 뒤진다. 읽기도 귀찮다면 유튜브를 본다. 참 편리한 방법이다. 그래서 어른들에게 묻지 않는다. 커뮤니티안에서 레시피를 모아보는 것은 이런 편리함을 뒤로 하고 키친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써놓은 흔적의 결과를 모으는 작업이다. 효율적인 레시피는 일단 스킵.

공부방운동과 지역아동센터_인력양성에 대한 제안의 일부

ARTICLE 2020-12-19

서울을 중심으로 도시화되면서 노동문제와 노동자문제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연쇄적으로 발생한 것은 빈부의 격차였고, 슬럼화는 특정한 지역에서 생겼다. 도농간의 격차는 말할 것도 없지만 도시내의 상대적 빈곤으로 인한 차이가 가속되었다. 70년대와 80년대에 지불능력의 유무에 따른 교육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문해교육을 기반으로 했지만 결국 지식으로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한 야학등의 시도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빈곤지역의 아동/청소년의 보육과 교육을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공부방운동이라 할 수 있다. 지역의 공부방을 정부지원사업(교육 또는 복지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 중 하나로 현재의 지역아동센터라고 사업명으로 자리를 잡았다.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사업은 행정의 프레임안으로 들어와 설치 및 운영을 위한 시스템을 갖춘것이 성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기존의 공부방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과정이 설계되지 않았다.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는등 가치지향을 가졌던 인적자원이라기 보다는 일터로 바라보는 실무인력이 대거 유입된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즉, 공부방 또는 지역아동센터는 정부지원사업을 수행해 내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로 자리하게 되었다거나, 규정에 근거하여 움직이는 바람에 지역(동네)마다 다른 형식과 내용을 수용하는 것에는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지역아동센터가 구성되면서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면서 현재 공부방이 설립되었던 시기의 사회적 분위기와 사뭇 달라진 것은 분명하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교육의 문제는 세분화되었지만 변화한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대응하려는 인력이 양성되고 있다기 보다는 행정과 실무를 중심으로 인력이 양성되고 있다.

위와 같은 문제를 안고 있을 때 이 문제에 대응해야 하는 것은 결국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는 사람의 몫이다. 그래서 협회가 존재하고, 재교육프로그램이 생산되었다. 사회복지실무자의 각종 연수라거나, 아동/청소년문제를 직접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개입하여 강좌들을 개설했다. 인력양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대응방식 역시 정부주도 사업의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커리큘럼에 근거하여 강좌를 듣고, 수료증을 발급받았다고 하더라도 결론적으로는 경험영역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우리사회 아동/청소년과 관련한 시설 및 단체에 내재하는 인력양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조금 다른 관점과 방법으로 인력(성장)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는 것을 제안하는 것은 가능하다. 처음부터 조직을 만들어서 사업을 실행하는 것으로 승부를 낼 수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찾아보는 것 부터 시작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될것이다. 하지만 현재 운영중인 지역아동센터의 존립근거나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지원사업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굳이 해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내적 동기를 찾아내고 변화의 동기나 사업방법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안하는 것은 결국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리더의 경험을 설계하는 방식을 택할 수 있다.

(후략)

컨퍼런스 [예술강사의 發]에서 예술강사에게 보낸 레터_2014

ARTICLE 2020-12-12

7년전일이다. 예상컨데 지금 문화예술강사를 주제로 컨퍼런스를 기획하라면 또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심이 사라져서 잘 모르긴 하지만, 훨씬 더 경직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라지만 2014년에 이런 레터를 보낼 수 있었던건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술강사에게 듣고 싶었습니다.

어느 순간 예술강사는 예술교육을 소비하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수요를 채워주는 도구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은 몸, 붓, 렌즈, 악기, 무대등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려고 합니다. 예술세계를 혼자만의 것으로 가둬두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술가가 예술을 가르치는 행위는 당연한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지쳐버린 예술강사를 만나게 된겁니다. 강사연수를 통해서 예술강사를 만나면 ‘저 어쩔 수 없이 여기 앉아 있거든요’라는 얼굴이 보였습니다. 경로를 설명할 수 없지만 다양한 회의자리에서 만났을 때 그들의 얼굴에는 행복은 커녕 불안과 분노가 더 많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예술강사활동을 하는 개인을 보면 개성 넘치고, 열정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컨퍼런스를 준비하면서 열정과 행복이 넘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예술가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문화부와 문화예술교육 진흥원과 강사들이 맺고 있는 행정과 평가를 비롯한 이해관계의 불편함이 있습니다. 더구나 수천명의 강사는 집단으로 읽히기 쉽습니다. 집단은 한 개인과 다른 캐릭터를 갖게 됩니다. 문화예술강사 집단의 캐릭터는 서로를 불신하게 만드는 행정적 구조안에 들어 있습니다. 몸의 언어를 문서로 작성해야 하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미지의 언어를 커리큘럼으로 만들라는 요구는 있었지만, 무엇이 적합한 단어인지 찾아가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더구나 매 수업은 일지를 요구했고 동어반복이 지루하고 힘들어질 때면 평가기준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무엇을 했는지 어떤 대화가 학생들과 오고갔는지가 중요하기 보다는 문서 작성하느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겁니다. 그렇게 점수로 환산되어 원하는 지역의 원하는 학교에 원하는 수업시수를 가지게 되는 구조 안에 스스로 편입된 것입니다. 지식을 공유하기 힘든 구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다른 강사보다 평가에서 우위를 차지하지 않으면 손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양질의 교육과정과 방법론을 자유롭게 공유할 수 없었을 겁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높은 평가 점수를 받은 예술강사의 범례가 공개되거나, 강좌를 개설해서 지불이 완료된 가공된 정보였습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모든 학교가 그렇지 않았겠으나,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이해는 둘째 치더라도 최소한 학교에 온 예술가로도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예술강사가 수업준비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학교는 소수였고, 수업에서 사용해야 하는 장비나 재료조차 관리되지 않는 현실이 무겁게 느껴진겁니다. 어느 순간 평가에 의해 이리 저리 휘둘리는 자기 모습에 환멸이 느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나열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문제를 발견했지만 어디서 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모르게 된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최소한 7년이상 방치해둔 것입니다. 이 컨퍼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방법론은 강사연수나 개설되는 다양한 강의에서 다룹니다. 강사들의 처우나 행정적 지원 문제는 공청회나 간담회, 설명회등을 통해서 다뤄야 합니다. 그 몫이 있습니다. 컨퍼런스에서는 “예술가로 살아온 강사 당신은 누구세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학교나 사회복지시설과 단체등에서 직접 피교육자를 만나는 문화예술교육의 최전방(?)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높은 평가점수를 득한 커리큘럼을 가지거나, 검증된 방법론으로 교실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커리큘럼과 방법론이 그 교사가 이해한 것이고 체화된 것이어야 합니다. 교육의 질의 교사의 질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더구나 행복한 예술가가 강의할 때 교실과 학생이 행복해지는 명료한 관계를 잊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컨퍼런스에서 교육방법론과 예술강사사업에 대한 각종 행정적 불만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한 이유는 “예술가인 당신을 들려주세요. 우리는 당신이 어떻게 현재를 사는지가 궁금합니다”라는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이 현재를 사는 이야기는 귀납적으로 현재의 한국사회 예술강사를 이야기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식공유 발표를 하는 예술강사가 공통적으로 기획자인 저에게 했던 질문은 “정말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요?”였습니다. 교육과정 개발도 아니고, 새로 만든 방법론도 아니고, 문제해결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어도 말해도 되는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고, 문제를 개발(!)해서는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믿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과가 물리적으로 쥐어지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 힘든 것이 예술가와 예술강사의 삶입니다. 하지만 예술가와 예술강사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 예술교육의 장에서 만나게 될 어린이/청소년/노인/장애인이 접하는 예술에 대한 태도에 가장 근접한 것입니다. 예술의 시작에서 느낀 초보의 설렘과 호기심이 살아있게 환경을 만드는 사람들이 예술강사라고 생각합니다.

Llamado

ARTICLE 2020-12-11

무슨 포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멤버가 "가서 발표하고 월세 벌어오라"고 해서 발표에 참여했다. 야마도를 만들면서 가졌던 생각을 짧게 정리한 글.


발표를 위한 자료를 그대로 싣는 것을 원치 않아 짧은 글을 씁니다. 발표내용과 무관하진 않지만 이 내용을 포럼에서 발표할 것은 아닙니다.

이웃 어린이의 예술교육

대림동에 2004년 이사왔으니 올해로 9년째 이 집에 살고 있다. 옆집엔 부부와 세자녀가 살고 있었다. 아저씨는 밝은 성격에 얼굴에 웃는 주름이 크게 보일 만큼 멋진 사람이고, 아주머니는 낯을 조금 가리시고 쑥스러움이 많은 분이지만 막상 마주할 땐 늘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분이다. 아들 둘에 딸아이 한명이다. 이사왔을 당시 막내가 태어났다. 세째아이로 딸이었다. 태어난지 한달이 되었다고 했으니 아마 요맘때가 생일일게다. 그 아이는 지금 아홉살이 되었다. 이집에 살면서 가장 즐겁고 신나는 기억은 옆집 아이들이었다. 아침이면 세명이서 밝게 웃으며 복도(오래된 아파트의 전형인 복도식이다)를 뛰어다니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이들 웃는 소리로 아침이 시작된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어느날은 꼬마가 오빠들 학교가는데 따라나가며 데려가 달라고 우는 소리. 어느날은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와서 기승전결 없는 이상한 논리를 심각하게 펼치기도 하고, 또 어느날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소꿉놀이를 하느라 돗자릴 펴고 누워있었다. 친구들과 누워 자는 시늉을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마나 서로 깔깔대고 웃었는지 모른다. 길에서 마주칠때면 내가 바쁜 걸음으로 주차장을 가로질러가는 꽁무니에 자전거를 타고 따라와 인사를 했다. 동네 아이들이 "아는 아저씨야?"라고 하자 "아저씨 아냐. 오빠(?)야!"라는 말이 들렸고, 나는 뒤를 보며 손을 흔들고 사라졌었다.

몇년 전 왁자지껄하는 소리와 함께 옆집에 피아노가 들어왔다. 큰 아이가 피아노레슨을 시작하고 도-미-솔을 벗어나지 않던 소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꽤 근사한 동요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느날 아침엔 아이의 연주에 감동받으며 일어나기도 했다. 조금씩 악보를 보고 제대로 소리가 나기 시작하는 그 아침을 잊을 수 없다. 서서히 피아노 연주는 나아지고 있었다. 어느날 밤, 집에 돌아왔을 때 Michael Jackson의 billie jean이 들렸다. 현관 문을 열고 나서서 연주를 들었다. 다음날 큰 아이를 길에서 마주쳤다. “마이클 잭슨을 어떻게 알아? 피아노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곡이야?”라고 물었을 때 "아뇨...제가 좋아서 듣고 그냥 쳐본거에요"라고 큰 아이가 대답했다. 내가 집에 있는 인기척을 느끼고 들어간 그 아이는 그날 저녁에 들으라는 듯 Smooth Criminal을 연주했다. 옆집에서 은근히 들리는 아이의 연주를 보이스레코더에 담았다. 또 그 다음날은 엄마와 같이 문을 빼꼼 열고는 마이클 잭슨이 좋다며 활짝 웃었다. 아파트가 삭막하다고? 이런 이웃이 있으면 삭막할 틈이 없다.

막내인 여자아이는 14층에 사는 아이와 단짝이다.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계단에서 그 둘은 자주 앉아서 놀았다. 놀이의 도구는 참 간소했지만 늘 실속 있었다. 문구점에서 파는 제품화된 장난감이 아니었다. 나무젓가락, 휴지, 고무찰흙, 손전등을 자주 가지고 놀곤 했다. 참 다양한 놀이가 가능했다. 14층 꼬마가 언니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한 두살 정도 어린것 같았다. 어느날이었다. 계단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는 모양이다.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불쑥 나가지 않고 주춤하고 섰다. 아마 14층 아이가 한글을 못 읽기 때문에 읽어주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곰세마리가 한집에 있어 아빠곰 엄마곰 아기곰” 약속시간때문에 더 있지 못하고 엘리베이터쪽으로 걸어나가자 반갑게 인사한다. 나도 인사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아이들이 보고 있는 동화의 표지에 눈길이 갔다. 표지에 곰이 있었다. 아마 그림동화속의 주인공이 곰이었나보다. 동화책을 읽어준다면서 곰세마리 노래를 같이 부르고 시작하는 이 명장면을 목격하다니 참 운도 좋다.

어느날 차곡 차곡 정리된 박스를 복도에 내다 놓았다. 일요일에 버리려고 정리하나 보다 싶었는데, 그 옆에 점점 쌓여갔다. 이상하다 싶어서 물었더니 이사가기로 했다고 전한다. 방은 두칸인데 아이들은 셋이고 이제 모두 초등학생이 되었으니 좁을만도 하다. 조금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갈거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둘째 아이였다. 둘째는 잘 생긴데다가 쿨하다. 막내동생이 오빠오빠 부르면서 길에서도 꼭 손을 잡고 다니는데, 약간 어색해 하면서도 동생손은 놓지 않는다. 정작 옆집은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을 이런 이웃과의 행복의 순간이 끝나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날 이후로 조금씩 물건들이 버려지고, 다시 나왔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하더니 어느날은 소파가 복도에 나와 있었다. 둘째가 앉아 있다.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내놓은 거실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책을 읽는다. 말을 걸었다. "여기에 의자가 있었으면 참 좋았었겠다. 완전 낭만 적인데"라고 말했다. 둘째의 대답은 "그렇죠 뭐"였다. 집에 들어가서 과자 한 봉지를 가져다 먹으라고 건네주었다. 조심스럽게 받더니 감사합니다 라고 말한다. 정말 이 공간에 저런 푹신한 의자가 있었다면 꽤 재밌는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겠다고 생각하며 또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결국 아이들이 이사갔다. 막내 아이는 태어나 처음하는 이사를 맞이하게 될것이다. 집안에 신발신고 들어가고, 신문지 깔고 중국음식을 먹는 첫번째 경험 말이다. 둘째는 짐이 다 옮겨진 후에 새로 생긴 자기 방을 보면서 시크하게 쳐다 보고는 책본다고 의자에 앉아 있을테고, 큰 아이는 오늘 학원 안가도 된다는 말에 신나 자전거 타고 동네를 한바퀴 돌거다. 아이들에게 삶의 환경이 바뀌는 이 경험이 앞으로 일어나게 될 또 다른 상황에 대한 적응력을 만들어 주게 될것이 분명하다. 지나다니면서 이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을 생각하니 계단에서 시멘트의 냉기가 느껴진다.

생각해 봤으면 하는 것이 있다. 우선 이 아이들의 예술교육과 예술행위는 자연스럽고 적극적이다. 빛나는 성과를 만든 예술가에 의해 탄생했다기 보다 일상에 근거하고 있으며, 스스로 만들어낸 놀이다. 일상속의 예술활동이 준거집단을 중심으로 시작하고 매끄러운 크로스오버가 일어나는 비선형적인 또래의 놀이속에 담겨 있다. 이웃은 어떠한가. 아이들이 뛰는 소리에 경고를 하고 싸움을 벌이는 현실은 물리적 공간의 한계가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문제다. 이런 자연스러운 일상속 예술행위의 현장은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대부분의 가정에서, 이웃에서, 우리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 감각을 깨우는 것이 우선이다.

예술과 거리가 먼 지역일수록 예술행위가 재미있다.

대림동(특히 대림2동)은 이주노동자 인구가 많다. 아침이면 직업소개소에 줄을 서있는 풍경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고, 큰 규모의 소매점은 없으나 중국인을 위한 식료품점이나 음식점이 많다. 마치 상해의 뒷골목 같기도 하고, 시끌벅적한 시장을 지날 때면 우리말로 된 간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9년째 살면서 서서히 익숙해 질 법도 한데 여전히 신기한 것 투성이다. 거리가 변하는 것도 그렇고 새로 상점이 오픈하면 다들 몰려들어 구경하는 것도 즐겁다. 사진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간혹 사람들에게 동네를 찍자는 제안을 하곤 한다. 그때 내가 찍는 동네는 너무 낯선 풍경이 많아서 스스로 놀라곤 했다. 심지어 중국인민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길에서 걸어다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런 특별한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예술적으로 보이진 않는 동네다. 시쳇말로 좀 없어보이거나 딱히 뭐가 없어 보였다. 지식인들이 모여서 문화적인척 하며 모여든 마을같지도 않고, 최신의 것이 소비되는 곳도 아니다. 흔한 별다방 콩다방이 없는 곳이다. 그래서 그저 그런 일상이 있겠거니 하고 살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동네의 모습이 하나 둘 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된 고급스런 다방이 있다. 고풍스런 의자에 장인이 만들었을 법한 고급 커피잔에 에스프레소를 파는 곳이었다. 장사가 잘되고 안되고를 떠나 그 다방의 존재자체가 눈에 들어왔다. 어울리지 않을 법한 곳에 근사한 커피숍이었다. 또한 극단의 연습실이 보였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아직 간판은 그대로 있다. 아마 이곳을 연습실 삼아 공연을 연습했을 곳이었다. 주택가 골목 안쪽 다세대주택의 지하공간이었다. 역시 그 간판의 존재만으로도 기분이 새로와졌다. 그야말로 없는 게 없었다. 삼청동에나 있을 흑백사진을 취급하고 있는 사진관, 명동이나 가로수길에 있을 법한 최고급 앰프와 오디오를 취급하는 가게, 홍대에서나 볼 수 있는 DIY 가구를 제작 공방, 이대앞에서나 만날 수 있는 수선집이나 맞춤 정장을 파는 곳도 있다. 수시로 생겼다 사라지는 각종 아틀리에들도 많았고, 관악기를 배울 수 있는 밴드연습실도 있었다. 대림동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동네가 이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작정하고 만들어진 인위적 커뮤니티인 아파트숲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이 지역사회고 그것이 동네다.

역시 생각해 봤으면 하는 것이 있다.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참 많이들 지도를 그린다. 문화지도를 그린걸 참 많이 봤다. 그 지도는 특정 시간에 특정 인물들과 특정 콘텐트를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이다. 그 지도는 얼마나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정보는 업데이트 되는가 생각해 봐야 한다. 문화와 예술이 담긴 지도는 정주성을 가진 지역민에 의해 구전되며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런 시도가 얼마나 있는가 말이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런 지도는 의미없는 것은 아니었을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

대림동에서 이런 문화적/예술적 생태를 감지하면서 동네친구들과 예술적으로(?) 작정하고 놀기 시작했다. 중국인 상점에 구경가고, 밤마실 나와 수다떨고, 새로 음식점이 오픈하면 동네사람의 의무감으로 팔아주러 가기도 했다. 도반생활을 하자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관심사에 근거해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고, 음식을 나눠먹으며 일상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예술행위는 자연스럽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거의 모두 매일 그림을 그리고, 향이 좋은 차를 나눠 마시며, 거의 매일 악기를 연주하고 공연했다. 사진을 찍고 함께 보며 하우스 콘서트를 열고, 사소한일을 거창하게 만들어 낄낄대며 문화가 공유되기 시작했다. 충분한 콘텐트가 만들어지자 담을 그릇이 필요해졌다. 그 그릇의 이름이 “야마도”다. 워낙 즉흥적으로 함부로 지은 이름이어서 의미따윈 없다. 대신 대림동을 서식지로 문화와 예술을 나누는 부족이 생겼는데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공간이 필요해진 것이다. 문화와 예술이 넘나들기 위해서는 하드웨어가 먼저일리가 없다. 그 필요를 절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가능한 것이 공간이다.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않기 때문에 문화예술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아하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돌파구를 스스로 찾게 되어 있다고 믿는다. 발표에서는 이 과정에 무엇이 개입했는지를 말로 전하려고 한다.

부산과학관 (2020/코로나로 떠나보낸 프로젝트)

ARTICLE 2020-12-08

부산과학관

(1) 창의성의 기본성질

인간은 누구나 창의와 창작의 욕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아동과 청소년은 창의 욕구를 흉내 또는 모방으로 시작합니다. 누군가로 부터 배운다는 것은 이미 그 방법을 따라 하는 행위의 시작입니다. 모방을 통해 방법을 찾아낸 이후가 본격적으로 자기의 방법을 찾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다른 축으로 설명하자면 가르치는 행위는 잘 모방하도록 설계하고 난 이후 스스로 자기 방법을 찾아낼 수 있도록 기다리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이는 최소한 창의력을 실험하는 집단에서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잘 가르치고 잘 배우면 창의력이 신장될 것인가에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사회는 언제부턴가 창의적인 인재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범한 사고와 행동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각종 교육과정안에는 창의력신장을 위한 커리큘럼이 생겨났습니다. 성공인가 실패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적인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면 그 보완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 핵심에는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창의환경입니다. 언어적 창의력을 가진 사람과 수학적 창의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단지 그것이 두드러져 보일 순 있지만 실제로는 통합되어 있습니다.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풀거나, 다양한 기술력을 응용하여 문명에 박차를 가하는 것 역시 창의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교육에서 그 환경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생산방식의 새로운 혁명을 이야기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창의성은 더욱 중요한 화두가 되었습니다. 테크놀로지와 과학은 삶의 양식을 바꾸게 되었지만 과연 교육이 전환의 시대에 걸맞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지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도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원리를 탐구하고, 실험을 반복하면서 지식과 노하우가 쌓여갑니다. 그런데 교육은 최종 결과를 흉내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현실입니다. 결국 양질의 교육콘텐트는 잘 흉내 내는 것이 최종 목표가 되어가는 겁니다. 창의성과 거리가 생긴것입니다.

도구와 재료에 대한 반응방식을 실험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아동/청소년은 현재 우리사회의 문화에서 가장 도구로 부터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세대입니다. 더구나 공교육과 사교육을 포함하여 창작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는 패키지로 쌓여진 재료만을 사용하여 실험이 통제됩니다. 즉, 도구와 재료를 충분히 탐색하는 과정이 거의 생략된 상태로 교사의 방식을 따라하고 끝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부산과학관의 파일럿 프로그램은 우선 도구와 재료에 대한 탐색은 어떤 형식에 담아야 가능할 것인지 실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창의환경에 구축을 위한 기초가 될 것입니다.

(2) 프로그램

소리는 진동_Piezo Microphone 사운드아티스트는 다양한 소리의 영역을 탐구합니다. 그렇게 예술이 되기도 하지만, 실험이 반복되면서 새로운 소재를 만나기도 합니다. 피에조마이크는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지만, 어떻게 응용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창작해 낼 수 있는 도구입니다. 여기서 도구는 마이크가 아닙니다. 피에조마이크로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매질(媒質)을 찾아내야 합니다. 매질은 너무도 다양한 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재료를 거의 가리지 않습니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것부터 창작품까지 아우릅니다. 이때 작업자(교사/강사)는 표현하고 있은 메시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고, 조합방식에 대해 함께 고민하면서 워크숍을 만들어 갑니다.

패턴과 반복_Image Phenomemon 프렉탈은 과학과 예술 모두가 탐구하는 영역입니다. 모든것은 패턴을 가지고 있으면 반복되고, 그것이 분산되지만 분산의 조합이 반복되는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망델브로 집합은 통계학 뿐 아니라 예술의 영역에서도 그 집합의 자기유사성질의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그 예술적 영감은 이미 일상속에서 다양한 패턴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다양한 재료의 관찰을 통해서 어떤 패턴을 가진 물질을 찾아내거나, 의도적으로 반복과 패턴의 상황을 조작해 내거나, 조합한 패턴에 움직임을 가했을 때 일어나는 미학적 가능성을 작품으로 담아내는 워크숍입니다.

(3) 도구와 재료

1) 철물점 철물점은 도구와 사람이 있는 물리적 공간입니다. 지금까지의 교육장면에서 도구와 재료는 철저히 통제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창의환경이라면 지금 사용하지 않지만 언젠가 쓰게 될 도구를 상상하는 것이 필요하거나, 같은 재료를 다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도구가 존재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철물점에는 철물점을 운영하는 작가(철물점사장님이라고 부릅니다)가 상주하면서 이 도구와 재료에 대해 상의하는 것이 가능해야 합니다. 도구/재료와 사람은 철물점의 기본 요소입니다.

2) 워크숍에서 주로 사용하게 될 도구와 재료의 예

나무, 종이, 플라스틱, 인두, 납, 초, 석탄, 숯, 쇠망치, 끌, 컴퓨터, 줄자, 끈, 드라이버, 구리, 저항, 수조, 물 등등. (워크숍의 세부계획에 따라 재료가 달라지거나 추가됩니다. 워크숍을 안내할 때도 주로 사용하게 될 재료에 대한 소개를 전면에 내세울 예정입니다. 최종 작업을 상상하기 보다, 도구와 재료에 어떤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가 이번 파일럿에 주요한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4) 작업자

사운드아티스트 / 정만영 / 부산 애니메이션작가 / 탁영환 / 전주

Methodology workshop_2009

ARTICLE 2020-12-07

교육 방법론에서 보는 Cause-Effect 

 짚으로 만들어진 공예품들은 농경문화에서 온 선물과 같은 예술이다. 먹고 살기 위한 벼농사는 짚더미를 만들어내고, 그 짚더미는 멍석을 만들어낸다. 멍석은 노동과 생산성의 부산물이지만 놀이와 결합하고 있으며, 대화의 장이기도 했다. 농경사회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발전한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장인의 예술과 놀이를 이해하게 된다.  통합방법론, 통합교육이 자주 언급 되지만 교육은 통합방법론을 선택하지 않은 적이 없다. 문화예술교육에서 장르를 뛰어넘고자 하는 시도는 때로는 지극히 관념적이어서 언어자체에 매몰되어 버리는 경우가 발견되곤 한다. 농경문화에서 짚풀이 예술이 될 경우를 생각해 보자. 부산물이 쌓여 여물 혹은 퇴비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가 또 다른 생산성이 생긴 경우다. 하지만 놀라운 예술적 발견이 가능했던 것은 인간의 탐미성이 "용도로써 그릇과 방석"이 아니라, "문화로써 식기와 돗자리"를 만들어낸 것. 결과물 그 자체에 그치지 않고 예측불가능한 어떤 요소가 결합하면서 문화와 예술의 삶으로 통합되는 경험과 결과를 만들어냈다.

practice : 예측가능한 결과란, (통제가능한 변수를 포함한)원인이 결과로 나타날 것을 추론하여 가설을 정교화시키는 과정.

일맥상통 - 경계에서 바라보기

전혀 다른 두 세계의 연관성을 찾는 연습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회가 세분화되고, 부분을 인식하며 살게 종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통합적 관점을 갖는 것이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연속성의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인과관계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다.  두루마리 휴지를 보며 나무를 연상하는 것은 단 하나의 힌트로 유추가 어렵지 않다. 재료를 상상하는 학습이 되어 있기 때문. 하지만 한단계만 이질적 경계만 넘어가면 통합적 사고를 불러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휴지와 물의 연관성은 쉽게 찾지 못한다.

practice : 팀별로 두개의 단어쌍을 가지고 닮은 점을 찾아냅니다. 신발-의자 / 카페-학교 / 도서관-운동장 / 거울-지팡이 / 컴퓨터-식탁 / 

조금 다른 방식의 연관성을 찾는 건 가능할까? 메소돌로지의 연관성을 위한 사고의 연습이다. 뜨개질과 분식.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뜨개질은 실을 재료로 삼는다. 원래의 모양새와 완전히 다르게 가공되지만 실 자체로의 쓰임은 지극히 한정적 이다. 하지만 "뜨개질"이란 행위로 옷을 지을 수 있다. 분식은 곡식을 재료로 삼는다. 곡식을 분쇄하여 밀가루 쌀가루 등을 만든다. 마찬가지로 원래의 모양새와 완전히 다르게 가공되지만 가루 자체로의 쓰임은 지극히 한정적이다. 하지만 "반죽"이란 행위로 음식을 만들 수 있다. 프로세스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모든(진짜로 모든)배움/학습/가르침등의 연관성을 찾아보자. 이질적으로 인식되는 두 세계는 프로세스에서 닮은 점이 있듯, 이질적으로 분리되던 교육방법론 역시 원리와 가공의 프로세스에서 닮은 점을 발견해 낼 수 있다. 통합은 이 두 세계의 경계에서 바라보며 원리를 터득하는 과정이다. 

지역활동(?)가를 만나 인터뷰 한 후에 쓴 원고의 일부

ARTICLE 2020-12-06

우리는 쉽게 공동체를 말합니다. 흔히 공동체는 의식을 공유하는 집단을 지칭합니다. 그것은 미래나 운명을 같이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공동체는 그런 거창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너무 쉽게 입에 오르내립니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가 가진 생각을 가장 잘 이해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만, 자신이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첫번째 어른이 부모였다는 것을 잊기 쉽습니다. 즉, 모두가 다르게 성장하는 객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합으로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가 형성될것이라는 신념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결국 허상을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먼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상상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주거지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었을까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내 고장 내 마을이기 때문에 지키고하는 사람이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지금 거주의 결정을 내리는데 중요한 요인은 경제력입니다.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재산의 정도에 따라 대부분 결정되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입니다. 안타깝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경제적 수준에 따라 주거를 결정하고, 살다보니 적응하고 익숙해 져서 정주성이 형성되곤 합니다. 지역사회에서 나고 자랐다 해도 이주를 결정하는 가장 큰 이유 역시 경제력에 의해 좌우되기 쉽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떠나서 새로운 문화적 경험을 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당연한 욕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속해있는 지역사회가 순수하게 자기주도적인 결정이라고 보긴 어려워집니다.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어쩔 수 없이 지금의 지역을 선택한 사람도 꽤 많을 것이며, 언제든 부의 정도에 따라 지역을 옮기고 싶어하는 욕구 역시 적은 수가 아닐 것입니다. 감추지 않고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지역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사업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업이란 형식을 빌어야 하기 때문에 따뜻한 사람들의 마음씨를 키우거나, 부족한 것을 메우면서 애향심을 북돋아야 한다고 말할 수 밖엔 없기 때문입니다.

공공지원사업이 되는 순간 실체로서 공동체는 드러나기 힘들고, 사업체로서 공동체가 더 부각되기 쉽습니다. 더구나 지원사업의 형태가 행정에서 주도하는 것으로 보일 때 훨씬 강회됩니다. 공공성이 가진 함정은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환상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다수의 만족을 따를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합니다. 이제는 익숙한 개념이 되어버린 님비NIMBY나 핌피PIMFY가 집단의 크기와 이익에 대한 문제이며 다수의 만족이라는 이유로 공공성이 훼손되는 것을 목격하곤 합니다. 결국 다양한 개인의 집합이라는 명제와 모두의 이익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사업의 구성과 참여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와 연관된 다양한 지원사업에서도 필요와 요구가 다양하기 때문에 유형화한 사업형태를 최종 목표로 삼거나, 단기간의 사업으로 성과를 드러내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부터 자유로와져야 합니다. 행정기관과 함께 해낼 수 있을까를 의심하면서 지역사회에서 공동체활성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등장했습니다. 대부분의 활동가는 이미 지역공동체에서 선의를 가지고 일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것 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들 입을 모아 말합니다. 그 행동은 사람들을 모으고, 생각을 공유하며, 함께 하니 즐겁다는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래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지원사업을 만나게 되었을 때 조금 더 확장하여 다양한 일을 지역에서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다른 누구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고 필요에 의해 행동을 결정한 사람들을 우리는 활동가라고 칭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최상위의 가치는 물적보상이 아니라 가치를 알아채는 동료가 늘어나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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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공동체, 커뮤티니, 평생교육, 마을등의 이름으로 활동가를 양성하는 교육이 많습니다. 이름을 조금씩 달리 쓸 뿐이지 교육과정에서 다루는 것은 거의 비슷합니다. 모든 교육프로그램이 다 달라야 하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양성교육이 비슷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 양성교육으로 양성이 되는가에 대한 문제는 다릅니다.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활동가가 단지 여가활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살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삶의 태도를 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양성교육은 어떻게 할것인가에서 어떻게 살것인가로 변화하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매우 어려운 시도라고 생각하고, 오래 걸릴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일 생겼을 때 반창고 붙이는 방식에 신물이 난 활동가들이 떠나지 않기 위한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활동가가 자율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과로 부터 자유로와져야 합니다. 공공의 비용을 들였기 때문에 그에 응당한 성과를 내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은 행정기관만이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활동으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성과가 아니더라도 활동가는 다양한 시도와 실패를 통해서 성장합니다. 즉, 성과로 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은 다양한 활동가의 경험을 축적하게 만드는 일종의 양식장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결국 공동체활성화는 공동체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을 남겼는가에 초점이 맞춰질 수 밖엔 없습니다. 사업성과로 축제가 만들어지고, 공원과 텃밭이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애정을 가진 지역사회의 참여자가 없다면 생명력에는 한계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공동체활동을 이해하는게 너무 어려웠다고 말은 공동체활동은 특정한 범주로 정의하거나, 옳거나 그른것에 판단이 단지 사업평가등으로 내려지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자주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사업이 조금이라도 확장되면 사업을 자꾸 분류하여 지원부서가 바뀌거나, 같은 내용의 사업이 다른 이름으로 둔갑하여 늘어납니다. 사업이 확장되면 그때가 가장 큰 위기 입니다. 예를 들어 50년전통의 맛집이라고 해서 찾아가던 곳이 갑자기 프렌차이즈가 되면 그 맛과 멋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결국 고유성이 사라지면 형식이 남고, 형식이 내용을 따라가기 힘들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니까요. 운영하는 사업이 활성화 단계를 거쳐 가능성이 보이면 무조건 확장하려 하지만, 그 고유성을 어떻게 지키면서 더 많은 참여를 독려할 수 있을지 우선 고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럴 때에도 공동체활동을 어떻게 할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에서 어떻게 살것인가를 이야기 해야 합니다.

노인이 행복한 나라

ARTICLE 2020-12-05

사람들마다 여행방식에 대한 여러가지 분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행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누구와 함께 가는가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갑자기 훌쩍 떠나는 여행이 있는 반면 철저히 준비해서 가는 사람도 있다. 커뮤니티와 노인에 대한 글을 쓰면서 여행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는 지난 여름 캘리포니아를 여행하면서 느낀 것을 쓰려고 하는 의도다. 나의 여행스타일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다니는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지내는 여행”이다. 대체로 이곳 저곳을 구경하며 낯선 환경속에 나를 노출시키고는 무엇을 느끼는지 살피는 것이 다니는 여행이다. 비용을 생각하며 하나라도 더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신기한 물건을 만져보는 것이 그렇다. 그런데 이런 여행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즉석요리를 먹고난 느낌 같다. 재료의 맛을 느끼기 어렵고 입으로는 잘 들어가지만 배가 부를 뿐 나에게 영양소를 제공해 줄 것 같은 느낌이 아닌 것 같달까. 그래서 난 대부분의 여행지에 도착하면 한 곳에 주로 머물며 매일 같은 거리를 걷는다거나 단골 식당을 만든다거나 하는 여행지의 일상적 경험에 주목한다. 캘리포니아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머물면서 동네를 산책하고, 도서관에서 책 읽고,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주일이 지나면서 묘하게 이곳의 문화적 특징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공간에서 적응하느라 생긴 호기심이 사라질 무렵 놀라운 것이 보이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주말이 되면 개인의 차고를 이용한 장이 열린다. Garage sale또는 Yard sale이라고 말하는 중고시장은 집집마다 열리기도 하지만 마을에 조금 더 큰 규모로 열리기도 한다. 집에서 안쓰는 물건을 내놓고 파는 것이니 대단한 것은 아니겠으나 생각보다 훨씬 더 작고 사소한 것이 거래된다. 차고에 쌓여 있던 1960년대 어느날의 신문 한부는 2불에 팔리고, 쓰다 남은 기저귀는 협상가능한 가격으로 팔린다. 오래된 가구는 상태에 따라 값이 매겨졌다.

도서관에서는 거의 매월 도서관 재단이 후원하는 행사가 있었다. 주로 헌책을 교환하거나 구매할 수 있다. 이곳에 오는 사람은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 토요일 오전에 시작해서 오후 3시까지 열리는 이 헌책장터는 재미있는 이벤트가 있었다. 오후 1시부터는 5불을 내고 자신이 가져온 가방에 갖고 싶은 책을 한 가득 가져갈 수 있다. ‘그럼 여행용 가방을 하나 가져와서 싹 쓸어가는 사람이 있을텐데...’라는 생각은 이곳의 문화적 태도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매 주말이 되면 도시마다 농산물 직거래 장 Famers market이 열린다. 도시라고 하기 보다는 작은 규모의 마을 장터의 느낌이다. 토요일 또는 일요일에 다운타운의 한 블럭을 이용하여 가까운 곳에 사는 농부들이 농산물을 직접 가져오와 팔거나 가공식품을 만들어 내놓는다. 보통 오전에 시작해서 오후 3시정도에 장이 마감하니 이들이 이 시장에 나오는 것이 생계수단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유통시장은 따로 존재하지만 동네 장터에 나오는 것이 즐거워 보이는 이유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신선한 야채나 과일도 사고 공원에서 가족이나 친구와 점심을 먹으며 주말을 보낸다. 물론 장이 서는 곳에는 크지 않은 규모의 아티스트 무대가 열린다.

문화적인 모든 곳에는 왠지 모를 여유와 뭉클함 같은 것이 있었다. 한국에도 장터가 열리고, 무대가 있고, 공원도 있고, 축제도 있지 않은가. 단지 나는 외국여행 중이니 이런 모든 것이 신기하게 보여서 느끼는 것과는 달랐다. 이유를 알아냈다. 커뮤니티의 문화콘텐트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노인이다. 우리에게도 있는 장터는 동네에 있다기 보다 문화적인 거리에 자주 등장하고, 무대는 홍대나 대학로에 나가야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이 젊은이들의 문화다. 그 차이였다. 야드세일도, 장터도, 거리공연도, 도서관 재단의 행사도 대부분 노인들이 주도적으로 그 일을 해낸다. 심지어 20년이 넘게 진행된다는 마을축제도 진행자부터 스탭까지 대부분이 노인이다. 노인들이 주도하는 문화와 예술의 장에 세대차이를 느끼는 젊은이들은 외면하고 오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축제에서 공연하는 사람들의 절반은 20대/30대다.

축제에 모인 가족들 사이사이에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함께 있고, 20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축제를 즐긴다. 그냥 자연스러운 풍경속에 모든 세대가 공존한다. 이 모든 문화와 예술을 주도하는 노인들의 움직임으로 보면서 느꼈던 것이 뭉클함의 실체였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희망을 정의하는가. 모두에게 평등한 권리를 준다고 약속하는 사람이 희망을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책의 대안을 가지고 있어서 당신의 미래에 희망을 선물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사기에 우리는 수 없이 속으면서 희망을 말하고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번 캘리포니아 여행은 커뮤니티의 문화를 주도하는 노인과 지역사회를 만나게 된 것 같다. 문득 지금까지 함부로 사용하던 희망이란 단어를 설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은 윗세대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 살때 자연스럽게 생긴다. 노인이 행복한 모습이 지역사회에 노출되면 그 마을이 행복하다. 지금까지 마을의 행복은 어린이의 밝은 웃음속에 들어있다는 추상적인 상상만 하면서 살아왔던 내가 스스로 한심해 졌다. 복지제도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서비스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지역사회에 머물지 않았으면 한다. “노인의 행복”이라는 키워드가 “커뮤니티의 희망”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우리사회의 노인의 모습은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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