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교육이 말하는 순환 + 연구실(제안서의 일부)

ARTICLE 2021-08-31

1 Overview

‘00의 시대’라는 말은 때론 거창하게 들린다. 전환이 화두로 등장하면서 이념과 구조가 바뀌는 변화의 시대를 말했고, 기술과 과학이 산업의 키워드로 등장하면서 빅데이터가 구조적 변화를 가져올 때는 데이터 테크놀로지 시대가 도래한다고 들떠서 말한다. 다행히도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등장하는 단어의 조합은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인류문명이 산업자본과 결합하면서 환경은 급격히 황폐화의 가속이 붙었다. 우리는 또 다른 시대를 맞이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어감의 시대다. 기후위기시대나 에너지고갈시대가 그렇다. 변화가 아니라 위기이며, 부족이 아니라 고갈이다. 분명 누군가는 이런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은 정치적 도구로 사용 중이라 말할 것이며, 인간의 기술은 여전히 대안을 찾아낼테니 기다리라 말할 것이다. 하지만 다수의 과학자가 건조하고 냉소적으로 이 상황을 전하고 있으며 체감할 정도의 변화를 목격하는 이 시대에 예술과 예술교육은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해야 한다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예술일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역사에서 때론 강렬한 영감을 주기도 했지만, 영적 소통이나 신앙의 증거로 종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통찰의 시선으로 사회에 말을 걸며 날카로운 비판을 상징과 은유의 코드로 풀어냈다. 지금 우리시대의 예술은 그래서 지구의 재앙에 대한 경고를 담기도 하고 인식의 프레임을 전환하려 노력한다. 생태와 환경에 대한 주제의식이 예술의 한 영역이나 장르로 파고들기 보다, 이 시대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예술가의 작업은 선언이 되기도 하고 액티비즘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한다. 예술교육은 이 시대에 무엇을 할 것인가.

2 순환/지구력

지구를 살리는 00, 소소한 실천. 이런 식의 글귀 또는 주장을 간혹 만나게 된다. 지구를 소유한 것이 인간이라는 오만함은 아닐까하는 논리적 의심과, 작은 실천이 아니고 작정하고 실천해도 모자라는 것이 ‘위기’에 대한 태도여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한다. 순환은 그저 자연스러움으로 회귀에 대한 실현계획을 만들어가는 키워드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속되며, 냉정하리만큼 모든 것을 소비하고 다시 자원이 되는 시스템으로 수십만년 유지해왔다. 그 생태계 안에서 인간이 존속해 왔으나, 그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끊으면서 지금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생태에 득이 되는 소멸과 조합의 과정을 사멸과 해체에 가까운 물질로 변환시켜가며 에너지를 생산하고 사용하고 버려왔다. 모든 것이 인간에게 독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공중위생은 획기적으로 나아졌으며 수명이 연장되기도 했다. 더구나 대륙을 넘나들며 교역과 문화교환으로 더 풍족(?)한 문화와 예술의 생태계가 생겼다. 하지만 순환을 가로 막은 대가가 따른다. 냉소적으로 표현하자면 지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을 말해야 하고, 소소한 실천과 소비방식의 패턴을 바꾸기 보다 생산과 필요의 균형을 만드는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있어야 한다. 순환랩에서 지칭하는 순환은 크게 세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1) 자원의 순환. 남김없이 사용하기 보다 필요에 대응하며, 자원은 어떻게 순환하는지 살펴보면서 이 시대의 예술교육 지향점을 찾는다. 2) 예술가의 경험순환. 인간은 문화를 전수한다. 경험이 순환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특정한 기술의 노하우등을 말하기 보다 예술가는 어떤 경험을 공동체에 전하고 있으며, 그 메시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구성원에게 공유할 가치를 탐색한다. 3) 회복(탄력)가능한 순환. 흔히 지속가능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이때 누가 지속할 것인가에 대한 주체를 모호하게 설정하면 곤란하다. 예술교육이 지구력과 회복력을 가지기 위해서 어떤 태도로 작업할 것인지 실천 연구와 실행을 병행해야 하는 시기다.

3 연구실/Lab/랩

랩은 연구소 또는 실험실이다. 그래서 랩에는 가설을 세운 설계자가 있고, 그 가설을 검증 또는 입증해 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학습결과를 얻는다. 얼마전에 내가 설계자로 일하던 랩을 나왔다. 더 이상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기지 않는 랩에서는 가설을 세울 필요가 없어져서다. 무늬만 랩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곳에서 일하려면 호기심과 지적욕구가 동기로 매개하지 않는 한 가능성은 0으로 수렴한다. 그렇다면 결론은 QUIT! 그래서 올해는 프로젝트에 가까운 랩을 운영하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 시작하는 랩은 본격 연구나 실험을 하는 랩을 지향하는 것이라기 보다 순환의 주제를 예술교육으로 해석하고/연구하고/실행하는 조금 다른 개념이 적용된다. 하지만 여전히 랩은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가설을 세우고 가능성을 향해가는 의미는 같다. 그래서 순환랩은 기존의 예술교육에서 교육자:학습자의 관계방식을 어느정도 빗겨가며 교육행위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구조를 제안한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교육자의 커리큘럼을 학습자에게 적용하기 보다는 학습자인 참여자는 랩의 연구원처럼 결합한다. 연구원 개인 또는 소규모의 집단은 연구주제를 설정하고 순환랩안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연구결과를 내놓는 방식이다. 순환랩은 총 6개의 랩으로 운영한다. 주제와 형식과 참여방식, 최종 퍼포먼스 형태가 모두 상이하기 때문에 같은 프레임으로 적용할 이유가 사라진다. 각 랩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인원수와 미팅방식등이 따로 정해지면 된다.

-------- 이후는 사업계획이므로 생략.

굴포천 낚시

ARTICLE 2021-08-11

자주 만나지 않아도 안부를 나누는 것 만으로도 친근감이 드는 사람이 있다.
나에게 윤종필작가가 그렇다.
작년에 주민들하고 판화작업을 진짜 신나게 하더니 전시를 열었다.
당연히 보러갔는데, 그 중 한 작품이 참 마음에 들었다.
오늘 집에 왔는데 문앞에 지관이 배달되어 있다.
뭔가 했는데 그 작품이다. 굴포천 낚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작품을 돈주고 사야 제맛이다.
선물이라고 우기지만 내가 뭔가 꼭 대가를 치루게 하고 말겠다.
윤종필 좋다. 만나서 얘기하면 진짜 낄낄대고 한참 웃고 헤어지곤 한다.

선택

ARTICLE 2021-08-09

살다보니 대부분의 선택은 A와 B중에 무엇을. 또는 A/B/C...n중에 무엇을 선택하기 보다 A를 취할 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86세가 된 할머니가 90세가 된 할아버지와 동거를 할 것인지 말것인지를 결정한다.
나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나이랑 상관없이 마음이 가는대로 해야 한다고 말해드렸다.
그 선택과 결정에서 왜 타인이 개입 하는가.
아들이 어쩌고, 며느리가 어쩌고, 주변인들의 시각이 어쩌고.
90세 할아버지가 느끼고 있는 연애감정이 부럽기만 하고,
동거를 결정하려는 할머니의 고민은 귀엽게 느껴지기만 한다.
여기서 타인은 그들의 결정에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
참 인간관계 쉽지 않다.
누군가에게 조언하고, 영향을 주고 싶어 안달이다.
나이들면서 나도 그러고 있을 때 깜짝 놀란적이 많다.
조언의 대가로 영향력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런건 진짜 무서운 일이다.

진로탐색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팀에게 보낸 레터

ARTICLE 2021-07-15

어떤 팀이 올해 청소년을 위한 진로탐색 프로그램을 준비중이다.
관습적으로 꿈을 묻는 방식이 과연 옳은 결정인지 걱정이 앞섰다.
꿈이 없다고 말하는 배경에 무엇인가 있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청소년기에 반드시 꿈과 희망을 가졌으리라고(또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은 판단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 팀과 세번의 회의를 했고, 레터를 보냈다.

그 레터의 일부다.

세 번의 회의를 거치면서 드는 생각을 정리합니다. 청소년과 이런 프로젝트를 함께 하고 싶다는 의지를 가진 많은 사람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에 대해서 먼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사회의 교육은 흔히 말하는 입시와 경쟁으로 요약되곤 합니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립니다. 대다수의 아동과 청소년이 포함된 공교육에서는 과도한 경쟁이 유발되거나, 대학입시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학교교육으로 우리가 사회교육의 범위를 너무 축소하게 되는 것은 틀립니다. 교육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공교육에서 입시와 경쟁을 말하게 됩니다.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비판속에서도 입시와 경쟁이 빠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 것까요. 한정된 자원과 기회의 획득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일 겁니다. 청소년기는 자기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임에 분명하지만,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는 것은 슬픈 현실입니다. 다양한 경험과 충분한 자기성찰의 시간을 제공하지 못하는 현실이 슬프다는 것입니다. 즉, 꿈을 가지기 힘든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이때 너의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는 것은 고약한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정해진 길 위에서 걷거나 뛰기도 바쁜데 어디로 가는 지 묻는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그 질문이 필요없진 않습니다. 다만, 어디로 향하는지 목적지를 정하고 난 뒤에 길을 나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선이 되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곤 합니다. 진로탐색이라는 언어가 그렇습니다. 다수의 진로탐색이 가리키는 것은 어떤 직업군에 자신이 포함되는 것이 합당한가를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다수의 꿈은 어떤 직업인이 될 수 있는가를 묻곤합니다. 현재 기회중인 동사형꿈이나 형용사형꿈이라는 것에서는 진로탐색이라는 어휘선택이 그리 적합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묻는 좋은 방법 중 하나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설

ARTICLE 2021-05-18

능력은 매력을 넘어서지 못한다. 능력은 매력의 일부다. 매력은 주관적이며 상호작용에서 발발하고 동작한다. 즉 고유하고 독창적이다.

바보상자의 귀환?

ARTICLE 2021-04-17

어떤 토론회에 갔는데 깊이 없이 함부로 떠드는 사람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예술교육 워크숍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이건 매체 같은걸 가르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이라는 말을 했다. 대체 그는 매체를 뭐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말을 할까 싶었다. 미디어교육의 현장은 테크놀로지와 문화현상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미디어교육이 새로운 매체를 소개한다는 뜻이 아니라 의사소통에 대한 기본적인 인간의 태도가 교육과정안에서 주요한 이슈가 되기 때문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play/놀이로 매체를 받아들인다. 반면 미디어교육자는 학습과제로 배우고 익혀 사용한다. 수용자의 개별 사용성에서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모든 매체가 보편성(universality)을 필수요건으로 적용하고 있지 못하는데 있다. 현재를 사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매체는 복합적이다. 신문은 옮겨서 편집할 수 있고 텍스트와 영상이 동시에 존재하는 매체다. 영상텍스트는 영화관과 TV를 통해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곳으로 이동하며 유통된다. 아이폰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디바이스의 출현은 수 백가지의 조합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미디어를 생산, 유통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단지 어린이와 청소년만의 문화는 아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장치로써 하나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지만, 미디어 소비의 측면에서는 개별 미디어로 존재하지 않는다. 디지털은 무한한 복제와 재구조화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단일양식의 생산과 소비로 설명할 수 없다. 이미 다매체 복합양식은 보편적이다. 예를들어 내가 만든 단편영화가 테스크탑에서 보여지게 할 것인가 휴대가능한 디바이스에서 보여지게 할것인가에 따라 화질, 자막, 앵글에 대한 설정을 다르게 만들게 된다. 미디어의 생산과 소비에서 비평과 분석을 넘어서 문화적 텍스트의 건강한 소비와 유통을 동시에 교육과정에서 다루어야 하는 시대에 들어선지 오래다.
청소년은 미디어의 적극적인 소비자인가-미디어생산자라는 측면은 고려해 볼 수도 없을 만큼 빈도수가 줄어들었다-를 생각해 보면 긍정하긴 힘들다. 그저 수동적인 소비자로만 보인다. 아무리 기준을 낮게 잡으려고 해도 그렇다. 능동적인 소비자는 권리의식과 미디어의 생산방식이나 사회적 기준에 대한 기본인식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사회의 청소년에게는 그 기준으로 볼 때 수동적인 소비자에 그친다. 그 이유가 청소년에게 있지 않고, 청소년이 처해있는 한국사회의 미디어문화 환경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안타깝다. 아쉽게도 이미 창작보다는 소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소비를 부추긴 것은 분명 소셜미디어다. 원치 않아도 노출되는 광고와 7-8초 내로 소비를 결정하게 만드는 자극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모든 재료는 본인이 제공하는 정보로 부터 나온다. 실로 무섭다. 습관을 누군가에게 통제당한다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 질문을 던지면 난 아니라고들 답하며 항변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지금 나의 생각이 진짜 내 생각이 맞는지 말이다.

프라이버시

ARTICLE 2021-04-08

https://www.apple.com/kr/privacy/docs/ADayintheLifeofYour_Data.pdf

이 링크는 애플의 프라이버시 정책을 스토리로 만든 문서다.
한마디로 "멋지다"
작년부터 모든 소셜미디어계정에서 탈퇴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내가 앱을 사용하는 동안 추적되고 있었다.
그 정보는 내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기업에게 팔려나갔다.
그리고, 내가 원하지 않는 광고와 최신정보로 돌아왔다.

내가 소셜미디어 계정을 날려버렸다고 했을 때, 지인들은 말했다. 이미 늦었다. 우리의 정보는 이미 공공재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하다.
최근 트래킹당하지 않고 살게 되니, 쓸데없는 정보가 훨씬 적게 들어온다.
정보가 생기면, 연관 정보에 시간을 또 들이게 되는 헛수고가 줄어준다.
한마디로 그들에게 놀아나지 않게 되는걸 체감한다.
소셜미디어만 삭제해도 이 정도 효과다.
하지만 여전히 신용카드를 쓰고, 특정 장소에서 걸핏하면 각종 앱을 열어 정보를 얻는다.
애플에서 이제 최대한 프라이버시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한거다.

며칠전 휴대폰 대리점을 하는 친구가 전화해서 아이폰에 대해 물었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잃어버린 손님이 새 전화기를 구매하면서 사진과 연락처를 옮겨달라고 했단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찾아서 로긴하라고 했더니...아이폰은 불편하다고 말했다.
그럼 안드로이드에서는 된다고?????
무슨 소린진 모르겠지만 그런게 가능했나보다.
파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이폰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싶다.
내심 '아이폰 쓰길 잘했다...휴우'를 반복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내 정보가 포함된 다른 사람의 정보가 아무 전화기로나 전송할 수 있다니...

아무튼 이번 업데이트 반갑다.
ios14.5를 기다리게 하는 구만.

3차산업혁명

ARTICLE 2021-04-05

2019년 언젠가 썼던 글. 기고글이었는데, 다른 주제를 먼저 써달라고 해서 그냥 묵혀 두었던 드래프트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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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단숨에 권력, 제도, 경제등 근복적인 것을 바꾸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다. 60년대의 끝자락에 태어난 나는 혁명이란 말은 입밖으로 꺼내기 힘든 금기/taboo에 가까운 단어였다. 흔하면 내성이 생긴다고나 할까. 어원과 뜻이 무엇인지 보다 유머코드가 적용되면 입에 담기 힘들었던 단어와 문장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곤 한다. 한 예로 "엽기"가 그렇다. 엽기란 괴이하고 비이성적인 상황이나 환경등을 따라다니는 행동을 말한다. 그래서 공포스런 뉘앙스다. 허나 1990년대 인터넷에서 아주 사소한 일에 엽기적이라는 과장은 유머로 쓰이기 시작했다. 물론 흔치 않은 복식이나 기이한 행동과 범죄에 따라 붙은 수식어인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서서히 엽기의 강도가 낮아지고 무감각해진다. 엽기토끼나 엽기떡볶이가 생겨나고, 반어적 표현으로 쓰이거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면 엽기(적)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진짜 엽기적 행각에는 엽기라는 말을 쓰기 어려워졌다. 본래 그 어휘의 뜻이 표현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혁명이 그렇다. 금기시 되던 이유는 이데올로기와 관련 있었다지만, 혁명은 본래 근본이 뒤 흔들려 전환될 때를 지칭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수시로 혁명이고 혁신이다. 쉽게 무너진다면 이미 근본적인 것일리 없다. 지금은 혁명이나 혁신은 아무데나 가져다 붙여 놓아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한국인의 입맛에 단순당인 설탕을 쏟아부어서 인기를 끄는 장사꾼이 등장하자 요식업계는 "혁명(?)이 일어나고, 혁신(?)적인 사업가의 모델이 된다"고 써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말이다.

산업혁명. 이건 산업이 근본적으로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도구나 장치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면서 엄청난 생산량의 증가를 불러왔다. 쉴새없이 노동해도 최대생산량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다가 근본적인 변화를 주도한 대량생산이 가능케 한 혁명. 그게 산업혁명이다. 구조와 환경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말장난에 가까운 유행이 지나가곤 있지만 4차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무려 4차다. 하지만 참 근본없이 불쑥 튀어나온 말이다. 2016년 다보스포럼에서 클라우스 슈밥이 스피치에 섞어 뱉은 말이다. 생각을 다시 해보자. 단숨에 근본적인 것을 어떻게 바꾸게 되었는가. 미국의 제러미 러프킨은 2011년 3차산업혁명이란 책을 썼다. 디지털혁명에 대한 언급이 주로 이루고 있으며, 4차산업혁명이 지칭하는 거의 대부분이 겹친다. 갑분싸라고 하나? 느닷없다고 해야 하나. 클라우스 슈밥이 4차산업혁명이란 말을 꺼낸게 2016년이다. 어떤 의도가 감지되지 않는가. 이에 대해 제러미 러프킨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표현은 잘못됐다는 내용으로 긴 글을 쓰기도 했다. 최근 3차 산업혁명이 폭발적인 속도로 진행된 건 맞지만 여전히 3차 산업혁명의 시대다. 이 단어를 처음 소개한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WEF) 회장은 마케팅 목적에서 이런 단어를 썼고, 우리 모두를 혼란스럽게 했다. 한국 정부나 기업에 어떤 표현을 쓰라고 강제할 순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전히 3차산업혁명에 대한 포럼과 강연을 연다. 혁명을 마구 들먹이며 사용하면서 규제를 풀어달라고 주장하고, 이슈몰이와 더불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그들의 유명세가 자본을 긁어 모으는 사이 혁명은 무감각해진다. 5년사이 혁명이 한 시대(era)를 건너뛰어도, 유행으로 재화를 얻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태도다. 그저 누군가 이용가치가 남아 있는 어휘와 문장이 있다면 얼마든 복붙(copy&paste)하겠다는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수작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자본의 이동을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 만들어진 의도된 사건이다.

제러미 러프킨의 [3차산업혁명]은 동의할 수 있는 언어로 채워진 저서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수평적 분산자본의 시작, 재편된 노동과 시장의 가능성, 화석연료의 종말로 시작하는 새로운 에너지 등등. 여전히 그 역시 혁명일까를 의심과 검증의 시간적 여유도 없이 급하게 등장한 4차산업혁명이라니. 여전히 걸핏하면 써먹는 말이 되어버렸다. 이거야 말로 혁명이다. 근본을 뒤집어 놓았으니 말이다.

예술교육에 몇 년전부터 4차산업혁명의 망령이 돌아다니다 최근에는 좀비가 되었다. 령은 손에 잡히지 않아서 무시할 수 있었지만, 좀비는 위해를 가한다. 융합교육이 4차산업혁명의 시대를 대비한다고 떠들어대거나, 뉴미디어로 예술행위를 하면 새로운 시대를 여는 패러다임이라고 말한다. 아동과 청소년에게 기술과 과학과 예술이 공존하는 세계에 신앙심을 갖고 따르면 미래를 대비하는 것 처럼 떠드는 것 처럼 영혼없고 근본없는 표현이 또 있을까. 장르간 컨버전스가 굳이 요구되지 않는 순수예술이 있지만, 이미 융합없는 예술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매체의 속성을 종단(전수되는)하고 테크놀로지의 범용적 가능성을 횡단(수평성)한다. 한마디로 종횡무진이 딱 맞는 말이다. 누가? 아티스트가 그렇다. 단지 새로운 공산품을 조립하면서 뉴미디어 아트라 우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가운데에서도 이미 수 많은 아티스트는 테크놀로지와 지식과 정보를 순환시켜가며 자연스럽고 적극적으로 크로스오버를 실행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회로도 읽고, 코딩하고, 센서와 와이어리스 컨트롤러를 보면 "앗!@@ 4차산업혁명 시대의 융합교육이다"라고 외치는 이유가 무엇인가.

혹시 신상품을 좋아하고, 낯선 단어를 말하면 섹시하다고 착각하고, 인싸 흉내를 내고 싶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자. 근본없는 어휘를 주워들고 힙스터가 되었다는 착각은 버릴 때가 이미 지났다.

지름길이 싫다.

ARTICLE 2021-03-28

공공성? 모두를 위한다고 자주 떠든다. 참 허망한 말이다. 그럴리 없기 때문이니 빈말은 멈추어야 하는데 그럴싸해 보이고 싶을 때 관용구처럼 쓰더라. 공동체안에서 가족, 동료, 이웃들과 삶을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가 보이지 않는 배려를 통해 공생하며 살아왔다. 공동체는 그 당연한 배려를 다른 이름으로는 희생이라 부르기도 했고, 또 다르게는 협업이라 부르기 한다. 우리사회의 마을공동체에서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자기 집에 있는 식기를 꺼내와 팔을 걷어붙이고 모여들던 아주머니들을 상상할 수 있었고, 손님맞을 준비는 가족과 더불어 이웃사람이 함께 힘써 해결해 내는 모습이 그려졌지다. 물론 이제는 거의 볼 수 없다. 현재 이런 풍경은 특별한 것이어서 다큐멘터리나 영화속에 등장한다. 낡은 것이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사적영역에의 침범을 두려워하는 현대인의 생활상이라고 접어두자면 중대한 가치를 놓치게 됩니다. 현대인에게 이런 관계의 문제는 이웃을 경계하고, 공동체의 성원을 의심하고,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에 감정이입하여 사회를 두렵게 만들게 됩니다. 이 공동체의 든든한 지원은 인간의 삶에서 필수조건에 해당되므로, 사회적 시스템으로써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재화의 교환으로 대체된다. 돈을 주고 사야하거나 그와 유사한 거래로 변해왔다는 뜻이다. 관계방식으로 자연스럽게 해결되던 문제가 재화와 사회적 권위를 갖지 못하면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이전되었다. 이때 재화와 힘을 갖지 못한 공동체 성원이 느끼는 것이 분노와 상실감이다.
문화와 예술은 한 인간의 태생적 배경이 되어버린 계급적 습속에 근거하여 존재하는 이른바 "경험"영역에 있다. 문화는 환경이며 예술은 경험재다. 생성조건이 온전하여 자연발생하는 환경이어야 하며, 이전의 경험속에 추론한 행위라고 설명해야 가장 근사치에 닿는다. 한 개인은 물리적 독립조건을 충족시키면 정의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농축된 문화적 산물이다. 그렇기에 문화와 예술교육은 개인의 문화/예술적 성장을 중심에 두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시작된다. 하지만 사회적 분노와 상실감이 배경으로 존재하는 한, 개인의 성장에 교육이 종사할 순 없다. 안타깝다고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현재 드러나는 모습이 그렇다.

다원성이 용해된 사회를 상상하자. 모두들 자신이 우리사회를 가장 잘 들여다 보고 해석하고 있다고 강하게 믿고 있다. 그 때문인지 병리현상이나 사회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해결책을 가졌다고 내세우기 급급하다. 하지만 사회적 항상성이 어느 시점에 정상작동할 것인지 기다리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전혀 다른 관점으로는 사회는 자정능력을 가진 유기체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구경꾼을 자처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힘을 보탠적이 없으면서 정작 자신에게 고통과 사회적 소외가 가해지기 전까지는 무감각하게 반응하는 건 그리 먼곳에서 찾아야 보이는 풍경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해 낼 자신은 없다. 단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하고 있는 개인과 사회의 모습을 아주 잠깐 멈춰서 반복적 사고를 통해 성찰해야 할 기점을 놓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깝다. 오늘의 문화교육/예술교육이 이해관계에서 우위에 선 집단이 만든 변명의 수단이 되지 않길 바랄 수 밖에.

문화교육 수퍼바이저로 일하면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 지름길을 알려달라는 요구다. 참 싫다. 차곡 차곡 길을 보며 걷는 것의 가치를 설득하는 것이 꽤나 어렵다.

예술교육은 결핍의 보상이 아니다.

ARTICLE 2021-03-26

언제부턴가 문화/예술교육은 사회적 결핍을 보상하는 체계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공공재를 사용하면서 부터 더욱 무게가 실렸다. 어떤 공공기관의 예술교육포럼에서 들은 이야기는 동의가 되지도 않고 오히려 충격적이었다. 소득수준과 학력은 문화향유능력과 비례곡선을 그린다고 말했다. 과연? 문화와 예술의 향유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문화콘텐트 소비 능력"으로 놓고 보면 그렇다. 전시를 관람하고,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는 횟수가 늘어날 수록 미적 탐색능력이 높아지고 문화적인 사람이 된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화교육과 예술교육의 포인트는 1)누구와 공연을 볼 것인가. 즉, 관계방식과 관계의 질에 대한 문제다. 2)전시를 보고 난 후에는 어떤 경로로 집에 오는가. 부모의 손에 이끌려 갔다오는 것과 친구와 다녀오는 것, 또는 단체버스에서 무엇인지도 모르는 작품을 구경하고 다시 그 단체로 내려서 집으로 향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행위를 둘러싼 그라운드의 차이가 전시에 대한 감흥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안내한다. 3)문화와 복지가 뒤섞여 콘텐트 선택의 주체가 누구인지 헷갈리는 경우는 없는가. 복지로 문화와 예술을 바라보게 되면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최소한 남들만큼은 우리도 한다는 시각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때 문화소비의 주체가 모호해 진다. 각종 문화와 예술을 개별 콘텐트로 떼어놓고 상상하는 낡은 사고방식은 단체로 관람을 시켜주면 문화예술의 향유자권리가 지켜지는 것이라고 보는 도식적 사고를 만들어낸다. 극단적으로는 도곡동에 사는 개인으로서 청소년은 문화예술의 적극적인 소비자라고 전제하거나, 농산어촌의 분교에 다니며 농사가 주업인 부모를 둔 청소년은 TV이외의 문화수용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가정해선 안된다는 말이다. 학교에 다니면서 강둑을 걷고, 바람의 냄새로 하루를 점치는 문화적 환경은 도시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며, 문화적 다양성이 허용되는 거리를 걸거나, 표현매체로써 오브제의 예술성을 경험하는 것은 도서산간지역에서 경험할 수 없다는 차이. 즉, 환경의 차이에 가깝다. 촌스러움이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바라볼 때 이질감을 표현하는 말이다. 촌에사는 사람이 촌느낌이 나면 자연스럽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비하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예술교육은 자연스러움을 얼만큼이나 존중하고 있었는가 말이다. 그러니 도시에서 하듯 프로그램을 뿌리기 시작한다. 오히려 결핍은 도시의 밀도를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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