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ARTICLE 2021-08-09

살다보니 대부분의 선택은 A와 B중에 무엇을. 또는 A/B/C...n중에 무엇을 선택하기 보다 A를 취할 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86세가 된 할머니가 90세가 된 할아버지와 동거를 할 것인지 말것인지를 결정한다.
나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나이랑 상관없이 마음이 가는대로 해야 한다고 말해드렸다.
그 선택과 결정에서 왜 타인이 개입 하는가.
아들이 어쩌고, 며느리가 어쩌고, 주변인들의 시각이 어쩌고.
90세 할아버지가 느끼고 있는 연애감정이 부럽기만 하고,
동거를 결정하려는 할머니의 고민은 귀엽게 느껴지기만 한다.
여기서 타인은 그들의 결정에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
참 인간관계 쉽지 않다.
누군가에게 조언하고, 영향을 주고 싶어 안달이다.
나이들면서 나도 그러고 있을 때 깜짝 놀란적이 많다.
조언의 대가로 영향력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런건 진짜 무서운 일이다.

진로탐색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팀에게 보낸 레터

ARTICLE 2021-07-15

어떤 팀이 올해 청소년을 위한 진로탐색 프로그램을 준비중이다.
관습적으로 꿈을 묻는 방식이 과연 옳은 결정인지 걱정이 앞섰다.
꿈이 없다고 말하는 배경에 무엇인가 있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청소년기에 반드시 꿈과 희망을 가졌으리라고(또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은 판단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 팀과 세번의 회의를 했고, 레터를 보냈다.

그 레터의 일부다.

세 번의 회의를 거치면서 드는 생각을 정리합니다. 청소년과 이런 프로젝트를 함께 하고 싶다는 의지를 가진 많은 사람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에 대해서 먼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사회의 교육은 흔히 말하는 입시와 경쟁으로 요약되곤 합니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립니다. 대다수의 아동과 청소년이 포함된 공교육에서는 과도한 경쟁이 유발되거나, 대학입시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학교교육으로 우리가 사회교육의 범위를 너무 축소하게 되는 것은 틀립니다. 교육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공교육에서 입시와 경쟁을 말하게 됩니다.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비판속에서도 입시와 경쟁이 빠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 것까요. 한정된 자원과 기회의 획득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일 겁니다. 청소년기는 자기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임에 분명하지만,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는 것은 슬픈 현실입니다. 다양한 경험과 충분한 자기성찰의 시간을 제공하지 못하는 현실이 슬프다는 것입니다. 즉, 꿈을 가지기 힘든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이때 너의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는 것은 고약한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정해진 길 위에서 걷거나 뛰기도 바쁜데 어디로 가는 지 묻는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그 질문이 필요없진 않습니다. 다만, 어디로 향하는지 목적지를 정하고 난 뒤에 길을 나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선이 되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곤 합니다. 진로탐색이라는 언어가 그렇습니다. 다수의 진로탐색이 가리키는 것은 어떤 직업군에 자신이 포함되는 것이 합당한가를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다수의 꿈은 어떤 직업인이 될 수 있는가를 묻곤합니다. 현재 기회중인 동사형꿈이나 형용사형꿈이라는 것에서는 진로탐색이라는 어휘선택이 그리 적합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묻는 좋은 방법 중 하나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설

ARTICLE 2021-05-18

능력은 매력을 넘어서지 못한다. 능력은 매력의 일부다. 매력은 주관적이며 상호작용에서 발발하고 동작한다. 즉 고유하고 독창적이다.

바보상자의 귀환?

ARTICLE 2021-04-17

어떤 토론회에 갔는데 깊이 없이 함부로 떠드는 사람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예술교육 워크숍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이건 매체 같은걸 가르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이라는 말을 했다. 대체 그는 매체를 뭐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말을 할까 싶었다. 미디어교육의 현장은 테크놀로지와 문화현상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미디어교육이 새로운 매체를 소개한다는 뜻이 아니라 의사소통에 대한 기본적인 인간의 태도가 교육과정안에서 주요한 이슈가 되기 때문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play/놀이로 매체를 받아들인다. 반면 미디어교육자는 학습과제로 배우고 익혀 사용한다. 수용자의 개별 사용성에서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모든 매체가 보편성(universality)을 필수요건으로 적용하고 있지 못하는데 있다. 현재를 사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매체는 복합적이다. 신문은 옮겨서 편집할 수 있고 텍스트와 영상이 동시에 존재하는 매체다. 영상텍스트는 영화관과 TV를 통해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곳으로 이동하며 유통된다. 아이폰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디바이스의 출현은 수 백가지의 조합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미디어를 생산, 유통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단지 어린이와 청소년만의 문화는 아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장치로써 하나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지만, 미디어 소비의 측면에서는 개별 미디어로 존재하지 않는다. 디지털은 무한한 복제와 재구조화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단일양식의 생산과 소비로 설명할 수 없다. 이미 다매체 복합양식은 보편적이다. 예를들어 내가 만든 단편영화가 테스크탑에서 보여지게 할 것인가 휴대가능한 디바이스에서 보여지게 할것인가에 따라 화질, 자막, 앵글에 대한 설정을 다르게 만들게 된다. 미디어의 생산과 소비에서 비평과 분석을 넘어서 문화적 텍스트의 건강한 소비와 유통을 동시에 교육과정에서 다루어야 하는 시대에 들어선지 오래다.
청소년은 미디어의 적극적인 소비자인가-미디어생산자라는 측면은 고려해 볼 수도 없을 만큼 빈도수가 줄어들었다-를 생각해 보면 긍정하긴 힘들다. 그저 수동적인 소비자로만 보인다. 아무리 기준을 낮게 잡으려고 해도 그렇다. 능동적인 소비자는 권리의식과 미디어의 생산방식이나 사회적 기준에 대한 기본인식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사회의 청소년에게는 그 기준으로 볼 때 수동적인 소비자에 그친다. 그 이유가 청소년에게 있지 않고, 청소년이 처해있는 한국사회의 미디어문화 환경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안타깝다. 아쉽게도 이미 창작보다는 소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소비를 부추긴 것은 분명 소셜미디어다. 원치 않아도 노출되는 광고와 7-8초 내로 소비를 결정하게 만드는 자극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모든 재료는 본인이 제공하는 정보로 부터 나온다. 실로 무섭다. 습관을 누군가에게 통제당한다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 질문을 던지면 난 아니라고들 답하며 항변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지금 나의 생각이 진짜 내 생각이 맞는지 말이다.

프라이버시

ARTICLE 2021-04-08

https://www.apple.com/kr/privacy/docs/ADayintheLifeofYour_Data.pdf

이 링크는 애플의 프라이버시 정책을 스토리로 만든 문서다.
한마디로 "멋지다"
작년부터 모든 소셜미디어계정에서 탈퇴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내가 앱을 사용하는 동안 추적되고 있었다.
그 정보는 내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기업에게 팔려나갔다.
그리고, 내가 원하지 않는 광고와 최신정보로 돌아왔다.

내가 소셜미디어 계정을 날려버렸다고 했을 때, 지인들은 말했다. 이미 늦었다. 우리의 정보는 이미 공공재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하다.
최근 트래킹당하지 않고 살게 되니, 쓸데없는 정보가 훨씬 적게 들어온다.
정보가 생기면, 연관 정보에 시간을 또 들이게 되는 헛수고가 줄어준다.
한마디로 그들에게 놀아나지 않게 되는걸 체감한다.
소셜미디어만 삭제해도 이 정도 효과다.
하지만 여전히 신용카드를 쓰고, 특정 장소에서 걸핏하면 각종 앱을 열어 정보를 얻는다.
애플에서 이제 최대한 프라이버시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한거다.

며칠전 휴대폰 대리점을 하는 친구가 전화해서 아이폰에 대해 물었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잃어버린 손님이 새 전화기를 구매하면서 사진과 연락처를 옮겨달라고 했단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찾아서 로긴하라고 했더니...아이폰은 불편하다고 말했다.
그럼 안드로이드에서는 된다고?????
무슨 소린진 모르겠지만 그런게 가능했나보다.
파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이폰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싶다.
내심 '아이폰 쓰길 잘했다...휴우'를 반복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내 정보가 포함된 다른 사람의 정보가 아무 전화기로나 전송할 수 있다니...

아무튼 이번 업데이트 반갑다.
ios14.5를 기다리게 하는 구만.

3차산업혁명

ARTICLE 2021-04-05

2019년 언젠가 썼던 글. 기고글이었는데, 다른 주제를 먼저 써달라고 해서 그냥 묵혀 두었던 드래프트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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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단숨에 권력, 제도, 경제등 근복적인 것을 바꾸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다. 60년대의 끝자락에 태어난 나는 혁명이란 말은 입밖으로 꺼내기 힘든 금기/taboo에 가까운 단어였다. 흔하면 내성이 생긴다고나 할까. 어원과 뜻이 무엇인지 보다 유머코드가 적용되면 입에 담기 힘들었던 단어와 문장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곤 한다. 한 예로 "엽기"가 그렇다. 엽기란 괴이하고 비이성적인 상황이나 환경등을 따라다니는 행동을 말한다. 그래서 공포스런 뉘앙스다. 허나 1990년대 인터넷에서 아주 사소한 일에 엽기적이라는 과장은 유머로 쓰이기 시작했다. 물론 흔치 않은 복식이나 기이한 행동과 범죄에 따라 붙은 수식어인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서서히 엽기의 강도가 낮아지고 무감각해진다. 엽기토끼나 엽기떡볶이가 생겨나고, 반어적 표현으로 쓰이거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면 엽기(적)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진짜 엽기적 행각에는 엽기라는 말을 쓰기 어려워졌다. 본래 그 어휘의 뜻이 표현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혁명이 그렇다. 금기시 되던 이유는 이데올로기와 관련 있었다지만, 혁명은 본래 근본이 뒤 흔들려 전환될 때를 지칭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수시로 혁명이고 혁신이다. 쉽게 무너진다면 이미 근본적인 것일리 없다. 지금은 혁명이나 혁신은 아무데나 가져다 붙여 놓아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한국인의 입맛에 단순당인 설탕을 쏟아부어서 인기를 끄는 장사꾼이 등장하자 요식업계는 "혁명(?)이 일어나고, 혁신(?)적인 사업가의 모델이 된다"고 써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말이다.

산업혁명. 이건 산업이 근본적으로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도구나 장치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면서 엄청난 생산량의 증가를 불러왔다. 쉴새없이 노동해도 최대생산량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다가 근본적인 변화를 주도한 대량생산이 가능케 한 혁명. 그게 산업혁명이다. 구조와 환경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말장난에 가까운 유행이 지나가곤 있지만 4차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무려 4차다. 하지만 참 근본없이 불쑥 튀어나온 말이다. 2016년 다보스포럼에서 클라우스 슈밥이 스피치에 섞어 뱉은 말이다. 생각을 다시 해보자. 단숨에 근본적인 것을 어떻게 바꾸게 되었는가. 미국의 제러미 러프킨은 2011년 3차산업혁명이란 책을 썼다. 디지털혁명에 대한 언급이 주로 이루고 있으며, 4차산업혁명이 지칭하는 거의 대부분이 겹친다. 갑분싸라고 하나? 느닷없다고 해야 하나. 클라우스 슈밥이 4차산업혁명이란 말을 꺼낸게 2016년이다. 어떤 의도가 감지되지 않는가. 이에 대해 제러미 러프킨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표현은 잘못됐다는 내용으로 긴 글을 쓰기도 했다. 최근 3차 산업혁명이 폭발적인 속도로 진행된 건 맞지만 여전히 3차 산업혁명의 시대다. 이 단어를 처음 소개한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WEF) 회장은 마케팅 목적에서 이런 단어를 썼고, 우리 모두를 혼란스럽게 했다. 한국 정부나 기업에 어떤 표현을 쓰라고 강제할 순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전히 3차산업혁명에 대한 포럼과 강연을 연다. 혁명을 마구 들먹이며 사용하면서 규제를 풀어달라고 주장하고, 이슈몰이와 더불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그들의 유명세가 자본을 긁어 모으는 사이 혁명은 무감각해진다. 5년사이 혁명이 한 시대(era)를 건너뛰어도, 유행으로 재화를 얻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태도다. 그저 누군가 이용가치가 남아 있는 어휘와 문장이 있다면 얼마든 복붙(copy&paste)하겠다는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수작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자본의 이동을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 만들어진 의도된 사건이다.

제러미 러프킨의 [3차산업혁명]은 동의할 수 있는 언어로 채워진 저서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수평적 분산자본의 시작, 재편된 노동과 시장의 가능성, 화석연료의 종말로 시작하는 새로운 에너지 등등. 여전히 그 역시 혁명일까를 의심과 검증의 시간적 여유도 없이 급하게 등장한 4차산업혁명이라니. 여전히 걸핏하면 써먹는 말이 되어버렸다. 이거야 말로 혁명이다. 근본을 뒤집어 놓았으니 말이다.

예술교육에 몇 년전부터 4차산업혁명의 망령이 돌아다니다 최근에는 좀비가 되었다. 령은 손에 잡히지 않아서 무시할 수 있었지만, 좀비는 위해를 가한다. 융합교육이 4차산업혁명의 시대를 대비한다고 떠들어대거나, 뉴미디어로 예술행위를 하면 새로운 시대를 여는 패러다임이라고 말한다. 아동과 청소년에게 기술과 과학과 예술이 공존하는 세계에 신앙심을 갖고 따르면 미래를 대비하는 것 처럼 떠드는 것 처럼 영혼없고 근본없는 표현이 또 있을까. 장르간 컨버전스가 굳이 요구되지 않는 순수예술이 있지만, 이미 융합없는 예술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매체의 속성을 종단(전수되는)하고 테크놀로지의 범용적 가능성을 횡단(수평성)한다. 한마디로 종횡무진이 딱 맞는 말이다. 누가? 아티스트가 그렇다. 단지 새로운 공산품을 조립하면서 뉴미디어 아트라 우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가운데에서도 이미 수 많은 아티스트는 테크놀로지와 지식과 정보를 순환시켜가며 자연스럽고 적극적으로 크로스오버를 실행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회로도 읽고, 코딩하고, 센서와 와이어리스 컨트롤러를 보면 "앗!@@ 4차산업혁명 시대의 융합교육이다"라고 외치는 이유가 무엇인가.

혹시 신상품을 좋아하고, 낯선 단어를 말하면 섹시하다고 착각하고, 인싸 흉내를 내고 싶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자. 근본없는 어휘를 주워들고 힙스터가 되었다는 착각은 버릴 때가 이미 지났다.

지름길이 싫다.

ARTICLE 2021-03-28

공공성? 모두를 위한다고 자주 떠든다. 참 허망한 말이다. 그럴리 없기 때문이니 빈말은 멈추어야 하는데 그럴싸해 보이고 싶을 때 관용구처럼 쓰더라. 공동체안에서 가족, 동료, 이웃들과 삶을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가 보이지 않는 배려를 통해 공생하며 살아왔다. 공동체는 그 당연한 배려를 다른 이름으로는 희생이라 부르기도 했고, 또 다르게는 협업이라 부르기 한다. 우리사회의 마을공동체에서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자기 집에 있는 식기를 꺼내와 팔을 걷어붙이고 모여들던 아주머니들을 상상할 수 있었고, 손님맞을 준비는 가족과 더불어 이웃사람이 함께 힘써 해결해 내는 모습이 그려졌지다. 물론 이제는 거의 볼 수 없다. 현재 이런 풍경은 특별한 것이어서 다큐멘터리나 영화속에 등장한다. 낡은 것이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사적영역에의 침범을 두려워하는 현대인의 생활상이라고 접어두자면 중대한 가치를 놓치게 됩니다. 현대인에게 이런 관계의 문제는 이웃을 경계하고, 공동체의 성원을 의심하고,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에 감정이입하여 사회를 두렵게 만들게 됩니다. 이 공동체의 든든한 지원은 인간의 삶에서 필수조건에 해당되므로, 사회적 시스템으로써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재화의 교환으로 대체된다. 돈을 주고 사야하거나 그와 유사한 거래로 변해왔다는 뜻이다. 관계방식으로 자연스럽게 해결되던 문제가 재화와 사회적 권위를 갖지 못하면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이전되었다. 이때 재화와 힘을 갖지 못한 공동체 성원이 느끼는 것이 분노와 상실감이다.
문화와 예술은 한 인간의 태생적 배경이 되어버린 계급적 습속에 근거하여 존재하는 이른바 "경험"영역에 있다. 문화는 환경이며 예술은 경험재다. 생성조건이 온전하여 자연발생하는 환경이어야 하며, 이전의 경험속에 추론한 행위라고 설명해야 가장 근사치에 닿는다. 한 개인은 물리적 독립조건을 충족시키면 정의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농축된 문화적 산물이다. 그렇기에 문화와 예술교육은 개인의 문화/예술적 성장을 중심에 두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시작된다. 하지만 사회적 분노와 상실감이 배경으로 존재하는 한, 개인의 성장에 교육이 종사할 순 없다. 안타깝다고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현재 드러나는 모습이 그렇다.

다원성이 용해된 사회를 상상하자. 모두들 자신이 우리사회를 가장 잘 들여다 보고 해석하고 있다고 강하게 믿고 있다. 그 때문인지 병리현상이나 사회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해결책을 가졌다고 내세우기 급급하다. 하지만 사회적 항상성이 어느 시점에 정상작동할 것인지 기다리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전혀 다른 관점으로는 사회는 자정능력을 가진 유기체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구경꾼을 자처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힘을 보탠적이 없으면서 정작 자신에게 고통과 사회적 소외가 가해지기 전까지는 무감각하게 반응하는 건 그리 먼곳에서 찾아야 보이는 풍경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해 낼 자신은 없다. 단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하고 있는 개인과 사회의 모습을 아주 잠깐 멈춰서 반복적 사고를 통해 성찰해야 할 기점을 놓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깝다. 오늘의 문화교육/예술교육이 이해관계에서 우위에 선 집단이 만든 변명의 수단이 되지 않길 바랄 수 밖에.

문화교육 수퍼바이저로 일하면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 지름길을 알려달라는 요구다. 참 싫다. 차곡 차곡 길을 보며 걷는 것의 가치를 설득하는 것이 꽤나 어렵다.

예술교육은 결핍의 보상이 아니다.

ARTICLE 2021-03-26

언제부턴가 문화/예술교육은 사회적 결핍을 보상하는 체계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공공재를 사용하면서 부터 더욱 무게가 실렸다. 어떤 공공기관의 예술교육포럼에서 들은 이야기는 동의가 되지도 않고 오히려 충격적이었다. 소득수준과 학력은 문화향유능력과 비례곡선을 그린다고 말했다. 과연? 문화와 예술의 향유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문화콘텐트 소비 능력"으로 놓고 보면 그렇다. 전시를 관람하고,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는 횟수가 늘어날 수록 미적 탐색능력이 높아지고 문화적인 사람이 된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화교육과 예술교육의 포인트는 1)누구와 공연을 볼 것인가. 즉, 관계방식과 관계의 질에 대한 문제다. 2)전시를 보고 난 후에는 어떤 경로로 집에 오는가. 부모의 손에 이끌려 갔다오는 것과 친구와 다녀오는 것, 또는 단체버스에서 무엇인지도 모르는 작품을 구경하고 다시 그 단체로 내려서 집으로 향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행위를 둘러싼 그라운드의 차이가 전시에 대한 감흥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안내한다. 3)문화와 복지가 뒤섞여 콘텐트 선택의 주체가 누구인지 헷갈리는 경우는 없는가. 복지로 문화와 예술을 바라보게 되면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최소한 남들만큼은 우리도 한다는 시각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때 문화소비의 주체가 모호해 진다. 각종 문화와 예술을 개별 콘텐트로 떼어놓고 상상하는 낡은 사고방식은 단체로 관람을 시켜주면 문화예술의 향유자권리가 지켜지는 것이라고 보는 도식적 사고를 만들어낸다. 극단적으로는 도곡동에 사는 개인으로서 청소년은 문화예술의 적극적인 소비자라고 전제하거나, 농산어촌의 분교에 다니며 농사가 주업인 부모를 둔 청소년은 TV이외의 문화수용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가정해선 안된다는 말이다. 학교에 다니면서 강둑을 걷고, 바람의 냄새로 하루를 점치는 문화적 환경은 도시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며, 문화적 다양성이 허용되는 거리를 걸거나, 표현매체로써 오브제의 예술성을 경험하는 것은 도서산간지역에서 경험할 수 없다는 차이. 즉, 환경의 차이에 가깝다. 촌스러움이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바라볼 때 이질감을 표현하는 말이다. 촌에사는 사람이 촌느낌이 나면 자연스럽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비하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예술교육은 자연스러움을 얼만큼이나 존중하고 있었는가 말이다. 그러니 도시에서 하듯 프로그램을 뿌리기 시작한다. 오히려 결핍은 도시의 밀도를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더라.

미디어작업과 교육워크숍

ARTICLE 2021-03-21

이 글은 미디어교육워크숍을 열면서 썼던 글.

“방법론으로부터”의 자유

1 이해는 되나 놀라운 미디어경험

대학생을 대상으로 스토리텔링과 영상편집 강의가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각자의 작품을 만드는 시간이다. 어느 학생이 나와서 묻는다. "선생님...혹시 이 노래 아세요?" 라면서 콧노래로 흥얼거린다. 익숙한 멜로디다. 하지만 제목은 모르겠다. 그러자 다시한번 콧노래를 불렀다. "이거요...딴따라 라라라라 따라라라라 딴따라 라라라라 라라라..."

누구나 이 멜로디를 들으면 알만한 곡이다. 그런데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 곡을 사용하고 싶다 해도 제목을 알아야 쓰지. 그런 비슷한 느낌의 곡을 찾아볼까라고 말하던 중, 그 학생은자기 컴퓨터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후...활짝 웃으면서 나를 불렀다. "선생님...찾았어요!!!" "검색창에 그냥 딴따라 라라라라 따라라라라 딴따라 라라라라 라라라...라고 쳤더니 나왔어요. 하하하" 한참을 웃었다. 놀랍기도 했고. 멜로디를 텍스트로 찾다니 정말 놀라운 일 아닌가. 그 텍스트로 유추해서 제목을 알려준 사람도 그렇지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재미있고 “딴따라...”를 검색해서 찾아냈다는 것도 즐거웠다. 그 학생이 찾았던 곡은 Steve Baracatt의 "The whistler's song"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나누어 주고 싶은 마음이 모여, 우리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있다는 사소한 증거다.

2 김치찌개 맛있게 끓이는 방법

김치찌개를 맛있게 끓이고 싶다. 매운 음식을 잘 못 먹지만 간혹 김치찌개가 생각나는 경우가 있다. 아주 강한 불에 찌개를 끓여야 맛있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영업용 가스렌지를 사는 것은 오버라고 생각된다. 나의 방법은 대충 이렇다. 김치를 송송 썬다 -> 김치위에 들기름을 충분히 붓고...불위에 올린다. -> 바글바글 소리가 날때 한번 휘 저어준 다음. -> 아주 살짝 탄내가 나면...물을 붓는다. -> 보글 보글 끓었을 때 필요하면 약간의 소금으로 간을 하고 -> 양파와 참치캔 하나를 넣고 한번 더 끓인다. 끝. 그렇지만 아무리 위의 방법을 써도 김치가 맛이 없으면 제 맛이 안난다. 미디어교육 워크샵을 기획하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워크샵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을 '가장 전달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 버리는 게 구체적인 방법론이더라. 편집을 아무리 잘해도, 에프터 이펙트로 화려하게 마무리해도, 색보정으로 세련된 감각을 입혀도. 좋은 작업을 위해서는 최초의 작업(원본인 촬영분)이 갖는 아우라를 벗어나는 법이 없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하나? 김치찌개의 맛은 김치에 달려있다고 말해야 할까?

3 로이 디즈니의 말

꽤 오래전에 월트 디즈니사의 로이 디즈니가 한국에 다녀갔다. 그때 어떤이가 질문했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로이 디즈니의 대답은 “우선 첫째로 스토리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답은 “둘째는...스토리입니다. 그리고 셋째, 스토리입니다”

청소년을 위한 창작공간을 상상하는 사람에게.

ARTICLE 2021-03-18

10대, 청소년의 창작공간

1 청소년과 청소년교육의 현재

현재 청소년은 자율적인 판단과 행동이 힘들다. 누군가로 부터 정해진 스케줄에 움직여야 하고, 장래희망은 직업과 연관된 그 무엇인가를 제출해야 하는 상황이다. 자기만의 시간을 위해서는 허락을 받아야 하는 현실에서 자율성이란 그저 아이디어에 그친다. 모든 상황은 청소년을 자신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포장되어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것에 대한 면죄부가 생기곤 한다. 청소년은 내일의 주인공이 아니라 오늘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저 언어유희에서 그쳐버린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모두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의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유예시킨 것에 대한 성찰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능력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가진 능력이 필요해 졌으며 더욱 분화될 것은 분명하다. 합리적 판단이나 정의로운 인간행동을 제약하기도 하는 규범과 질서 등은 사회적으로 요구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능력이 있다. 노동능력을 기본으로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리터러시 능력과 정보를 운용하는 능력이 필요해졌다. 우리는 개인의 모든 행동과 행위가 노동과 생산성으로 연결되는 사회에서 살아왔다. 한국사회의 다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리터러시와 정보습득 능력은 제도 속 교육을 통과하면서 주입교육이라는 오명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그 꼬리표를 떼내지 못한채로 21세기에 들어섰고 학력은 높아졌지만 교육의 질이 낮아졌다는 평가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 아동과 청소년에게 요구되는 능력(이른바 social skill)은 무엇일까. 타자의 존재와 이유를 감각적으로 느끼고 행동하는 이해와 경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누군가를 지배하는 권위욕망에서 벗어나, 타자와 함께 경험영역을 넓히려는 의지를 배우는 것이 우선이다. 이 능력은 창의적 발상과 창작공간안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이다. 조립식 키트를 조작하고 혼자만의 장난감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협업은 필수적이다. 공감능력을 배가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이 존재한다. 그 방법론의 절대다수는 리더십의 다른 측면으로 강조되면서 상품화 되었다. 누군가를 지배하기 위한 공감방법론이 등장했다는 뜻이다. 품고 있는 야심이 외부세계와 만나는 순간 공감력은 사라진다. 아동과 청소년에게 공감능력은 다름 아닌 평등한 구조와 환경에서 만나는 협업과정이 존재하는 놀이판이어야 가능하다. 비정형성이 보장되고 자유로운 놀이의 상황이 일상이 된다면 자연스럽게 얻어낼 수 있다.

2 창작공간에 초대하는 작업자

여기서 말하는 작업자는 예술을 기반으로 하는 작가, 공학도의 각종 실험, 대화를 기초로 하는 스토리텔러와 행위자를 포함한다. 특정한 장르 기반 전업작가나 판매용 소품을 제작하는 메이커등을 지칭하지 않는다. 워크숍에서는 장르에서 자유롭고, 다양한 물리적 재료를 만지고 조작하며, 상황에 적응하면서 무엇인지 모르는 곳을 향해서 달리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실패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작업하는 사람을 말한다. 무엇인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허무하다. 시간과 공간으로 부터 제약은 당연한 것이어서 작업자의 철학과 관점이 중요하다. 단지 테크니션을 초대할 것이라면 누가 무엇을 어떻게 디자인하는가에 대한 중심이 빠져버리고, 인문학을 이야기하자면 조작가능한 다양한 장치들이나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 작업자들은 이 공간에 위치하면서 본인이 가장 “꽂혔던” 그 무엇인가로 부터 시작한다. 그것이 작업자의 청소년기와 닿아 있길 바라야 한다. 작업자의 현재를 보면 생산적인 공정에서 부터 온 것이 아니라 무모한 시도나 각종 실패의 경험이 쌓여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작업자 마다 다르겠지만 갑자기 무엇인가 해보겠다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나를 행동하게 만들었던 영감이 이번 워크숍의 가장 큰 재료가 되어야 한다. 매력적으로 보였던 재료, 쓸모없는 것을 반복적으로 만들어가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작업자를 유혹했던 순수한 끌림과 나의 감각을 진동시켰던 것이 워크숍에서 다루어야 하는 작업이다.

3 파일럿 프로젝트의 구상

예측가능한 프로젝트는 금세 시들해진다. 그리고 예측 가능하다면 이미 프로젝트로써의 성격을 잃고 만다. 하지만 다수의 청소년관련 교육및 작업세팅에서는 프로그램과 프로젝트를 구분하고 있지 않다. 창작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경험 또는 실험으로 얻어야 하는 정보와 내용이 있다. 1)워크숍에서 따른 적정인원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2) 창작자가 적합한가 교육자가 적합한가 3) 재료와 예산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분배하면서 운영할 것인가 4) 프로젝트 결과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 등. 단 하나인 이 공간과 이곳의 사람들이니까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형식을 찾아내야 한다. 즉, 실험설계와 실행은 필수라는 뜻이다. 파일럿을 게을리 하고 예측가능한 프로그램을 구매-판매하는 행위가 일어난다면 창작공간으로 기능하기 힘들다.

4 창의력교육의 허구성

교육상품을 판매하거나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서 창의력 교육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재료를 탐색하고, 스스로 선택한 행위자가 되었을 때 창의적인 발상과 행동으로 이어질 뿐이다. 제공한 창의력 훈련으로 창의적인 인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때 작업자(교육행위자/설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장 문화적인 환경을 세팅하는 것과, 창의적 발상을 방해하지 않도록 피해주는 것 이외에는 거의 없다. 아동/청소년은 창의적인 발상으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내재하고 있다. 교육이 동기를 제공하기 보다 완성된 교육과정안으로 아동/청소년을 견인하고 있기 때문에 발현할 수 없었던 창의력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창의력은 교육되는 것이 아니라 내재한다. 그 신뢰가 기반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각종 장치를 마련했으면, 그에 따른 교육과정을 설계했기 때문에 창의적 발상을 제한 했다. 모든 아동과 청소년은 창의적이다. 무작위 재료(radomized material/stuff)를 제공해 주었때 주도적 발상을 구현하려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난다. 또한 이런 각 재료들의 조합은 테크놀로지와 결합할 수 있으며, 그 결합은 작업자와의 협상 또는 협업으로 행동화한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사회의 아동/청소년일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인식하자. 전인적 교육과정을 지향하고 있지만 여전히 정규교육과정의 순위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다. 학교를 벗어난 활동. 즉 방과 후라는 한계를 여전히 갖고 있고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좋을법한”선택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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