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훨씬 더 유명해지고, 연주도 더 깊어진 베이시스트.
애덤 벤 에즈라.
이때 참 참신했었다.
이스라엘 사람인데 아마 아랍어가 모국어 인듯.
컴투게더 노래에 이런 억양은 매력 뿜.
지금은 훨씬 더 유명해지고, 연주도 더 깊어진 베이시스트.
애덤 벤 에즈라.
이때 참 참신했었다.
이스라엘 사람인데 아마 아랍어가 모국어 인듯.
컴투게더 노래에 이런 억양은 매력 뿜.
나쁜 일이 있거나, 우울하거나, 화가 나는 때 넥타이를 맨다.
전에는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넥타이 매고 나타나면 긴장했다.
최근 몇 년간 넥타이를 맬 일이 없었다.
당분간 자주 하게 될 것 같다.
넥타이를 하면 몸을 형식 안에 가두는 느낌을 만든다.
스스로 답답하게 만들면서 정돈하려는 것일까?
긴장하려는거다.
나한테 정돈은 간혹 필요하긴 하지만 발전이나 성장 방향이 아니라 멈추겠다는 싸인인 셈이다.
에일리언 1편은 1979년에 만들어졌으나, 한국에선 1987년에 영화관에 걸렸다.
하지만 80년대 초반부터 베타/VHS 비디오테이프에 조악한 번역자막을 포함한 해적판이 돌아다녔다.
데크 두 데크로 녹화하면서 화질이나 음질 모두 형편없는 수준이었지만, 에일리언은 이미 꽤 많은 이들 사이에서 유명한 영화였다.
괴물 나온다 하여 친구네 집에 몰려가서 처음본게 84년.
인간을 숙주로 삼아 튀어나오는 에일리언의 모습에 열광? 하면서 죽인다...를 연발했다.
아무 생각없이 그냥 괴물나와서 좋아했던 10대시절을 지나 영화관에서 에일리언을 봤을 때는 조금 다른 문화적 충격이 있었다.
나만 그런게 아니었나보다.
물론 리들리스콧의 브레이드 러너는 지금도 나한테는 인생영화인게 분명할 정도로 좋아하는 감독이지.
그런데 에일리언은 브레이드 러너 처럼 철학적 명상이 가능하게 하는건 아닌데도 각종 호기심이 발동했다.
10년전에 프로메테우스가 나왔을 때 참 반가왔다.
흔히 재밌어? 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재밌어. 라는 단답이 가능하지만 전혀 리들리 스콧 답지 않은 엉성함에 많이 실망한건 사실이다.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것이 하나 있다.
전에는 신이라고 하면 나에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먹구름을 뚫고 나오는 빛이나 머리주변에서 오라를 내뿜는 예수같은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우주선에서 내린 대머리라는 점.
무슨 크리스챤이 이런가 싶지만, 난 예수를 이미지로 그리기 힘들다.
그건 마치 심술궂게 생긴 사람을 지칭하면서 놀부같이 생겼다. 콩쥐 닯지 않았냐...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난 놀부와 콩쥐를 본적이 없는데 누굴 닮았다 말하는게 이상하게 생각된다.
근데 영화는 감정이입하면서 보니까, 가장 신 답게 보였던 것 같다.
이러다 사이언톨로지 교리도 뒤져보는 거 아닌가 싶다. 현혹되는건 한순간이니...프후후.
이 글은 미디어교육워크숍을 열면서 썼던 글.
1 이해는 되나 놀라운 미디어경험
대학생을 대상으로 스토리텔링과 영상편집 강의가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각자의 작품을 만드는 시간이다. 어느 학생이 나와서 묻는다. "선생님...혹시 이 노래 아세요?" 라면서 콧노래로 흥얼거린다. 익숙한 멜로디다. 하지만 제목은 모르겠다. 그러자 다시한번 콧노래를 불렀다. "이거요...딴따라 라라라라 따라라라라 딴따라 라라라라 라라라..."
누구나 이 멜로디를 들으면 알만한 곡이다. 그런데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 곡을 사용하고 싶다 해도 제목을 알아야 쓰지. 그런 비슷한 느낌의 곡을 찾아볼까라고 말하던 중, 그 학생은자기 컴퓨터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후...활짝 웃으면서 나를 불렀다. "선생님...찾았어요!!!" "검색창에 그냥 딴따라 라라라라 따라라라라 딴따라 라라라라 라라라...라고 쳤더니 나왔어요. 하하하" 한참을 웃었다. 놀랍기도 했고. 멜로디를 텍스트로 찾다니 정말 놀라운 일 아닌가. 그 텍스트로 유추해서 제목을 알려준 사람도 그렇지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재미있고 “딴따라...”를 검색해서 찾아냈다는 것도 즐거웠다. 그 학생이 찾았던 곡은 Steve Baracatt의 "The whistler's song"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나누어 주고 싶은 마음이 모여, 우리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있다는 사소한 증거다.
2 김치찌개 맛있게 끓이는 방법
김치찌개를 맛있게 끓이고 싶다. 매운 음식을 잘 못 먹지만 간혹 김치찌개가 생각나는 경우가 있다. 아주 강한 불에 찌개를 끓여야 맛있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영업용 가스렌지를 사는 것은 오버라고 생각된다. 나의 방법은 대충 이렇다. 김치를 송송 썬다 -> 김치위에 들기름을 충분히 붓고...불위에 올린다. -> 바글바글 소리가 날때 한번 휘 저어준 다음. -> 아주 살짝 탄내가 나면...물을 붓는다. -> 보글 보글 끓었을 때 필요하면 약간의 소금으로 간을 하고 -> 양파와 참치캔 하나를 넣고 한번 더 끓인다. 끝. 그렇지만 아무리 위의 방법을 써도 김치가 맛이 없으면 제 맛이 안난다. 미디어교육 워크샵을 기획하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워크샵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을 '가장 전달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 버리는 게 구체적인 방법론이더라. 편집을 아무리 잘해도, 에프터 이펙트로 화려하게 마무리해도, 색보정으로 세련된 감각을 입혀도. 좋은 작업을 위해서는 최초의 작업(원본인 촬영분)이 갖는 아우라를 벗어나는 법이 없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하나? 김치찌개의 맛은 김치에 달려있다고 말해야 할까?
3 로이 디즈니의 말
꽤 오래전에 월트 디즈니사의 로이 디즈니가 한국에 다녀갔다. 그때 어떤이가 질문했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로이 디즈니의 대답은 “우선 첫째로 스토리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답은 “둘째는...스토리입니다. 그리고 셋째, 스토리입니다”
2015년. 홀트에서 작곡수업을 했다. 전복남 아저씨는 단어와 짧은 문장으로 대화하는 분이었다.
농담하다 좀 밀리싶으면 "야. 너 이리와"라고 했다. 그 발음은 이우와.
또 누가 놀린다 싶으면 "엿먹어"라고 했다. 그 발음은 연머.
이 곡의 작사/작곡은 전복남 아저씨. 가사는 "야...이우와...연머...."
마지막날 밴드를 초대해 작곡가가 노래를 주고 밴드가 불렀다.
정말 즐거운 콘서트였다.
6600만년전 소행성의 충돌.
확률로 치면 2000만년에 한번의 충돌시기를 두번을 건너뛴 행운의 땅.
진화에 동의하거나 아니거나 인간이 지구에서 사는 건 분명 요행이다.
우주는 온갖 이벤트의 합인데, 한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1 청소년과 청소년교육의 현재
현재 청소년은 자율적인 판단과 행동이 힘들다. 누군가로 부터 정해진 스케줄에 움직여야 하고, 장래희망은 직업과 연관된 그 무엇인가를 제출해야 하는 상황이다. 자기만의 시간을 위해서는 허락을 받아야 하는 현실에서 자율성이란 그저 아이디어에 그친다. 모든 상황은 청소년을 자신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포장되어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것에 대한 면죄부가 생기곤 한다. 청소년은 내일의 주인공이 아니라 오늘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저 언어유희에서 그쳐버린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모두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의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유예시킨 것에 대한 성찰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능력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가진 능력이 필요해 졌으며 더욱 분화될 것은 분명하다. 합리적 판단이나 정의로운 인간행동을 제약하기도 하는 규범과 질서 등은 사회적으로 요구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능력이 있다. 노동능력을 기본으로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리터러시 능력과 정보를 운용하는 능력이 필요해졌다. 우리는 개인의 모든 행동과 행위가 노동과 생산성으로 연결되는 사회에서 살아왔다. 한국사회의 다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리터러시와 정보습득 능력은 제도 속 교육을 통과하면서 주입교육이라는 오명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그 꼬리표를 떼내지 못한채로 21세기에 들어섰고 학력은 높아졌지만 교육의 질이 낮아졌다는 평가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 아동과 청소년에게 요구되는 능력(이른바 social skill)은 무엇일까. 타자의 존재와 이유를 감각적으로 느끼고 행동하는 이해와 경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누군가를 지배하는 권위욕망에서 벗어나, 타자와 함께 경험영역을 넓히려는 의지를 배우는 것이 우선이다. 이 능력은 창의적 발상과 창작공간안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이다. 조립식 키트를 조작하고 혼자만의 장난감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협업은 필수적이다. 공감능력을 배가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이 존재한다. 그 방법론의 절대다수는 리더십의 다른 측면으로 강조되면서 상품화 되었다. 누군가를 지배하기 위한 공감방법론이 등장했다는 뜻이다. 품고 있는 야심이 외부세계와 만나는 순간 공감력은 사라진다. 아동과 청소년에게 공감능력은 다름 아닌 평등한 구조와 환경에서 만나는 협업과정이 존재하는 놀이판이어야 가능하다. 비정형성이 보장되고 자유로운 놀이의 상황이 일상이 된다면 자연스럽게 얻어낼 수 있다.
2 창작공간에 초대하는 작업자
여기서 말하는 작업자는 예술을 기반으로 하는 작가, 공학도의 각종 실험, 대화를 기초로 하는 스토리텔러와 행위자를 포함한다. 특정한 장르 기반 전업작가나 판매용 소품을 제작하는 메이커등을 지칭하지 않는다. 워크숍에서는 장르에서 자유롭고, 다양한 물리적 재료를 만지고 조작하며, 상황에 적응하면서 무엇인지 모르는 곳을 향해서 달리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실패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작업하는 사람을 말한다. 무엇인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허무하다. 시간과 공간으로 부터 제약은 당연한 것이어서 작업자의 철학과 관점이 중요하다. 단지 테크니션을 초대할 것이라면 누가 무엇을 어떻게 디자인하는가에 대한 중심이 빠져버리고, 인문학을 이야기하자면 조작가능한 다양한 장치들이나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 작업자들은 이 공간에 위치하면서 본인이 가장 “꽂혔던” 그 무엇인가로 부터 시작한다. 그것이 작업자의 청소년기와 닿아 있길 바라야 한다. 작업자의 현재를 보면 생산적인 공정에서 부터 온 것이 아니라 무모한 시도나 각종 실패의 경험이 쌓여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작업자 마다 다르겠지만 갑자기 무엇인가 해보겠다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나를 행동하게 만들었던 영감이 이번 워크숍의 가장 큰 재료가 되어야 한다. 매력적으로 보였던 재료, 쓸모없는 것을 반복적으로 만들어가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작업자를 유혹했던 순수한 끌림과 나의 감각을 진동시켰던 것이 워크숍에서 다루어야 하는 작업이다.
3 파일럿 프로젝트의 구상
예측가능한 프로젝트는 금세 시들해진다. 그리고 예측 가능하다면 이미 프로젝트로써의 성격을 잃고 만다. 하지만 다수의 청소년관련 교육및 작업세팅에서는 프로그램과 프로젝트를 구분하고 있지 않다. 창작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경험 또는 실험으로 얻어야 하는 정보와 내용이 있다. 1)워크숍에서 따른 적정인원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2) 창작자가 적합한가 교육자가 적합한가 3) 재료와 예산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분배하면서 운영할 것인가 4) 프로젝트 결과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 등. 단 하나인 이 공간과 이곳의 사람들이니까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형식을 찾아내야 한다. 즉, 실험설계와 실행은 필수라는 뜻이다. 파일럿을 게을리 하고 예측가능한 프로그램을 구매-판매하는 행위가 일어난다면 창작공간으로 기능하기 힘들다.
4 창의력교육의 허구성
교육상품을 판매하거나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서 창의력 교육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재료를 탐색하고, 스스로 선택한 행위자가 되었을 때 창의적인 발상과 행동으로 이어질 뿐이다. 제공한 창의력 훈련으로 창의적인 인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때 작업자(교육행위자/설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장 문화적인 환경을 세팅하는 것과, 창의적 발상을 방해하지 않도록 피해주는 것 이외에는 거의 없다. 아동/청소년은 창의적인 발상으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내재하고 있다. 교육이 동기를 제공하기 보다 완성된 교육과정안으로 아동/청소년을 견인하고 있기 때문에 발현할 수 없었던 창의력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창의력은 교육되는 것이 아니라 내재한다. 그 신뢰가 기반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각종 장치를 마련했으면, 그에 따른 교육과정을 설계했기 때문에 창의적 발상을 제한 했다. 모든 아동과 청소년은 창의적이다. 무작위 재료(radomized material/stuff)를 제공해 주었때 주도적 발상을 구현하려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난다. 또한 이런 각 재료들의 조합은 테크놀로지와 결합할 수 있으며, 그 결합은 작업자와의 협상 또는 협업으로 행동화한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사회의 아동/청소년일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인식하자. 전인적 교육과정을 지향하고 있지만 여전히 정규교육과정의 순위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다. 학교를 벗어난 활동. 즉 방과 후라는 한계를 여전히 갖고 있고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좋을법한”선택지다.
우연히 뉴스를 보니 작년에 우리 사회는 공정한가에 대한 질문에 53%가 불공정하다고 답했단다.
모두 어려운 이 전염병창궐 시기에 터진 또 하나의 사건.
LH. 또 한번 불공정에 화르르 분노할 사람이 많겠다.
아마 불공정하다고 답하는 비율이 급상승했을 듯.
"조사하면 다 나와" 이런 유행어 같은거 예전에 있지 않았나?
분노의 핵심은 조사해서 나왔는데 또 불공정하게 가진자는 아무렇지 않게 산다는 것.
조사는 분노와 분열만 만들더라는 말이지.
아무튼 그런 공정성의 이슈가 최고로 민감(해결의 실마리는 당근 가진것들이 꼬아놓은)한 시기.
문제는 공정하기 위해서 모든 곳에 민감해지고 날카로와진 것이지.
그렇게 찾을 수 있는 공정성이 아닌곳에도 온갖 장치와 빠져나갈 구멍을 서류로 채우고 있는 시간 낭비들이 허다하다.
어딘가 서류에 서명 해본 경험이 한번 쯤 있을게다.
읽을 수도 없는 글자크기가 빼곡히 젹혀 있는 수십페이지의 약관.
용어정의가 되어 있지 않은 단어와 문장의 조합.
질문과 대답을 얻고 학습하려면 평생이 걸릴 것 같은 답답함이 느껴지는 그런 서류들 말이다.
그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다는 건, 내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의 다른 말이란 걸 알면서도 서명한다.
서명하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얻는다. 나는 그 함정에 걸리지 않기만 바랄 수 밖에.
다시말해 요행을 바라며 사는 밖엔 없더라. 이런데 애국심이 어쩌고 하면 좀 화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