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행

JOB SOUND 2021-03-21

6600만년전 소행성의 충돌.
확률로 치면 2000만년에 한번의 충돌시기를 두번을 건너뛴 행운의 땅.
진화에 동의하거나 아니거나 인간이 지구에서 사는 건 분명 요행이다.
우주는 온갖 이벤트의 합인데, 한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왕년

Buscant 2021-03-18

뭐 왕년이라면 리즈시절과 동급으로 취급하지만...사실 왕년은 예전에와 같은 뜻이다.
위켄드 왕년에 파인애플 시절이다.

청소년을 위한 창작공간을 상상하는 사람에게.

ARTICLE 2021-03-18

10대, 청소년의 창작공간

1 청소년과 청소년교육의 현재

현재 청소년은 자율적인 판단과 행동이 힘들다. 누군가로 부터 정해진 스케줄에 움직여야 하고, 장래희망은 직업과 연관된 그 무엇인가를 제출해야 하는 상황이다. 자기만의 시간을 위해서는 허락을 받아야 하는 현실에서 자율성이란 그저 아이디어에 그친다. 모든 상황은 청소년을 자신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포장되어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것에 대한 면죄부가 생기곤 한다. 청소년은 내일의 주인공이 아니라 오늘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저 언어유희에서 그쳐버린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모두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의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유예시킨 것에 대한 성찰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능력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가진 능력이 필요해 졌으며 더욱 분화될 것은 분명하다. 합리적 판단이나 정의로운 인간행동을 제약하기도 하는 규범과 질서 등은 사회적으로 요구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능력이 있다. 노동능력을 기본으로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리터러시 능력과 정보를 운용하는 능력이 필요해졌다. 우리는 개인의 모든 행동과 행위가 노동과 생산성으로 연결되는 사회에서 살아왔다. 한국사회의 다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리터러시와 정보습득 능력은 제도 속 교육을 통과하면서 주입교육이라는 오명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그 꼬리표를 떼내지 못한채로 21세기에 들어섰고 학력은 높아졌지만 교육의 질이 낮아졌다는 평가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 아동과 청소년에게 요구되는 능력(이른바 social skill)은 무엇일까. 타자의 존재와 이유를 감각적으로 느끼고 행동하는 이해와 경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누군가를 지배하는 권위욕망에서 벗어나, 타자와 함께 경험영역을 넓히려는 의지를 배우는 것이 우선이다. 이 능력은 창의적 발상과 창작공간안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이다. 조립식 키트를 조작하고 혼자만의 장난감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협업은 필수적이다. 공감능력을 배가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이 존재한다. 그 방법론의 절대다수는 리더십의 다른 측면으로 강조되면서 상품화 되었다. 누군가를 지배하기 위한 공감방법론이 등장했다는 뜻이다. 품고 있는 야심이 외부세계와 만나는 순간 공감력은 사라진다. 아동과 청소년에게 공감능력은 다름 아닌 평등한 구조와 환경에서 만나는 협업과정이 존재하는 놀이판이어야 가능하다. 비정형성이 보장되고 자유로운 놀이의 상황이 일상이 된다면 자연스럽게 얻어낼 수 있다.

2 창작공간에 초대하는 작업자

여기서 말하는 작업자는 예술을 기반으로 하는 작가, 공학도의 각종 실험, 대화를 기초로 하는 스토리텔러와 행위자를 포함한다. 특정한 장르 기반 전업작가나 판매용 소품을 제작하는 메이커등을 지칭하지 않는다. 워크숍에서는 장르에서 자유롭고, 다양한 물리적 재료를 만지고 조작하며, 상황에 적응하면서 무엇인지 모르는 곳을 향해서 달리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실패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작업하는 사람을 말한다. 무엇인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허무하다. 시간과 공간으로 부터 제약은 당연한 것이어서 작업자의 철학과 관점이 중요하다. 단지 테크니션을 초대할 것이라면 누가 무엇을 어떻게 디자인하는가에 대한 중심이 빠져버리고, 인문학을 이야기하자면 조작가능한 다양한 장치들이나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 작업자들은 이 공간에 위치하면서 본인이 가장 “꽂혔던” 그 무엇인가로 부터 시작한다. 그것이 작업자의 청소년기와 닿아 있길 바라야 한다. 작업자의 현재를 보면 생산적인 공정에서 부터 온 것이 아니라 무모한 시도나 각종 실패의 경험이 쌓여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작업자 마다 다르겠지만 갑자기 무엇인가 해보겠다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나를 행동하게 만들었던 영감이 이번 워크숍의 가장 큰 재료가 되어야 한다. 매력적으로 보였던 재료, 쓸모없는 것을 반복적으로 만들어가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작업자를 유혹했던 순수한 끌림과 나의 감각을 진동시켰던 것이 워크숍에서 다루어야 하는 작업이다.

3 파일럿 프로젝트의 구상

예측가능한 프로젝트는 금세 시들해진다. 그리고 예측 가능하다면 이미 프로젝트로써의 성격을 잃고 만다. 하지만 다수의 청소년관련 교육및 작업세팅에서는 프로그램과 프로젝트를 구분하고 있지 않다. 창작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경험 또는 실험으로 얻어야 하는 정보와 내용이 있다. 1)워크숍에서 따른 적정인원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2) 창작자가 적합한가 교육자가 적합한가 3) 재료와 예산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분배하면서 운영할 것인가 4) 프로젝트 결과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 등. 단 하나인 이 공간과 이곳의 사람들이니까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형식을 찾아내야 한다. 즉, 실험설계와 실행은 필수라는 뜻이다. 파일럿을 게을리 하고 예측가능한 프로그램을 구매-판매하는 행위가 일어난다면 창작공간으로 기능하기 힘들다.

4 창의력교육의 허구성

교육상품을 판매하거나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서 창의력 교육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재료를 탐색하고, 스스로 선택한 행위자가 되었을 때 창의적인 발상과 행동으로 이어질 뿐이다. 제공한 창의력 훈련으로 창의적인 인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때 작업자(교육행위자/설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장 문화적인 환경을 세팅하는 것과, 창의적 발상을 방해하지 않도록 피해주는 것 이외에는 거의 없다. 아동/청소년은 창의적인 발상으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내재하고 있다. 교육이 동기를 제공하기 보다 완성된 교육과정안으로 아동/청소년을 견인하고 있기 때문에 발현할 수 없었던 창의력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창의력은 교육되는 것이 아니라 내재한다. 그 신뢰가 기반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각종 장치를 마련했으면, 그에 따른 교육과정을 설계했기 때문에 창의적 발상을 제한 했다. 모든 아동과 청소년은 창의적이다. 무작위 재료(radomized material/stuff)를 제공해 주었때 주도적 발상을 구현하려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난다. 또한 이런 각 재료들의 조합은 테크놀로지와 결합할 수 있으며, 그 결합은 작업자와의 협상 또는 협업으로 행동화한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사회의 아동/청소년일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인식하자. 전인적 교육과정을 지향하고 있지만 여전히 정규교육과정의 순위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다. 학교를 벗어난 활동. 즉 방과 후라는 한계를 여전히 갖고 있고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좋을법한”선택지다.

우리사회는 공정한가?

JOB SOUND 2021-03-18
  1. 우연히 뉴스를 보니 작년에 우리 사회는 공정한가에 대한 질문에 53%가 불공정하다고 답했단다.
    모두 어려운 이 전염병창궐 시기에 터진 또 하나의 사건.
    LH. 또 한번 불공정에 화르르 분노할 사람이 많겠다.
    아마 불공정하다고 답하는 비율이 급상승했을 듯.
    "조사하면 다 나와" 이런 유행어 같은거 예전에 있지 않았나?
    분노의 핵심은 조사해서 나왔는데 또 불공정하게 가진자는 아무렇지 않게 산다는 것.
    조사는 분노와 분열만 만들더라는 말이지.
    아무튼 그런 공정성의 이슈가 최고로 민감(해결의 실마리는 당근 가진것들이 꼬아놓은)한 시기.
    문제는 공정하기 위해서 모든 곳에 민감해지고 날카로와진 것이지.
    그렇게 찾을 수 있는 공정성이 아닌곳에도 온갖 장치와 빠져나갈 구멍을 서류로 채우고 있는 시간 낭비들이 허다하다.

  2. 어딘가 서류에 서명 해본 경험이 한번 쯤 있을게다.
    읽을 수도 없는 글자크기가 빼곡히 젹혀 있는 수십페이지의 약관.
    용어정의가 되어 있지 않은 단어와 문장의 조합.
    질문과 대답을 얻고 학습하려면 평생이 걸릴 것 같은 답답함이 느껴지는 그런 서류들 말이다.
    그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다는 건, 내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의 다른 말이란 걸 알면서도 서명한다.
    서명하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얻는다. 나는 그 함정에 걸리지 않기만 바랄 수 밖에.
    다시말해 요행을 바라며 사는 밖엔 없더라. 이런데 애국심이 어쩌고 하면 좀 화난다.

태극기

JOB SOUND 2021-03-17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가지면 태극기를 자꾸 꺼내곤 한다.
뱃지나 스티커. 자랑...
근데 태극기 부대의 등장 후 그거만 보면 일단 소름끼치는데, 그 얘기는 차마 못 꺼내겠다.

일단 메모(순환/탄력/기반)

JOB SOUND 2021-03-17
  • 생태나 환경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의 이미지 속에 너무 한정적인 편견이 작동하는 듯. 생태, 에콜로지는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상태를 뜻하고.
    환경은 자연환경을 지칭하고 되니 인간이 자연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모든 조건을 말함.
    원래의 뜻은 그러한데, 교육사업으로 풀면 반복하여 생태/환경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게 되는 듯 하다.
  • 사업은 그래서 생태적이지 않은 방향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대량생산과 소비구조이니 생태나 환경문제에 인간이 나설 수 있는 것은 금지시키는 정부의 정책이다. 국제사회는 이미 이에 대한 대응을 하고 있으나, 이미 구조화한 산업구조에 (임금노동자의)생존이 달려있어서 딱 두가지. 아주 강력한 금지조치이거나 타노스적 발상이 남은 듯하다.
  • 즉,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하려는 의지를 담아 캠페인과 운동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임에도 생태환경을 말하면 개인의 문제를 지적하고 작은 실천 따위를 거론 하면서 죄의식을 심어주는 방식은 옳지 않은 태도다. 비닐소비를 줄이세요. 일회용을 쓰지 맙시다. 포장재를 최소화합시다. 등등이다. 비닐은 생산량 자체를 줄이고 비용을 지불하도록 제도화하지 않는한 줄어들지 않고, 일회용기나 포장등은 제품의 유통과 연관되어 있다 그 역시 제도우선이다. 개인이 쓰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생산 자체가 줄지 않는 이유다. 공포를 심어준다해도 소용없다는건 이미 검증된것 아닐까.
  • 대안을 제안하고 정책과 제도에 개입해야 한다는 실천을 한 파타고니아 같은 기업의 사례로 알 수 있다.
  • 삼겹살은 싸서 먹었던 일종의 쓰레기(?)고기인데, 많은 사람이 찾으니 고급음식으로 둔갑하고 비싸진다. (갑자기 연관성 없는 것 같은데...이런 현상의 반복은 생태환경운동과 거의 유사하다)
  • 이런 이유로 생태/환경이라는 표제를 달고 교육사업을 운영했을 때 구체적인 실천을 권하게 되니 반생태/비환경적인 프로그램이 계속 생산되는 듯 하다. 생태와 환경은 이미 그 자체로 독립적인 어휘로 사용해야 한다.
  • 순환/써클/탄력/리질리언스/바탕/그라운드...이런 개념으로 전환하는 방법이.

문화기반시설연구

ARTICLE 2021-03-17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책기반 사업운영을 위한 기반시설 연구를 본격적으로 했다. 문화기반시설 연구에 쓴 원고의 일부. 최종 원고에는 정치적(?)으로 약간 수정되었지만, 이 내용이 드래프트였다.


2장 3절 / 문화예술교육 정책 추진을 위한 핵심주체로서 문화기반시설의 방향과 역할

문화기반시설의 방향과 역할은 각 시설의 설립취지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에서 사업수행의 원칙을 점검하는 것이 우선과제이며, 존립근거가 된다. 문화기반시설의 이미지는 문화와 예술이 핵심어가 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역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반시설에 대한 평가와 논의 구조에서 문화예술교육의 수행거점이 확보되었다고 보는 것은 많은 오류를 낳을 가능성이 짙다. 도서관은 고유의 역할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는 것이 필요하고, 문화의집은 설립초기부터 교육기능이기보다는 이용시설에 가깝다는 것이 예가 될 수 있다. 또한 그 시설을 위탁운영하고 경우와 설치 및 관리되고 있는가에 따라 기능적 평준화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즉, 문화기반시설은 하나의 독립적 성격을 띠고 있는 개별역량을 중심으로 분류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1)인구의 수, 2) 지역 문화자원이나 인프라, 3) 수혜대상자의 물리적/심리적 접근성, 4) 네트워크 구조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5)자원활용능력, 6)시설운영주체 스스로 문화예술교육의 전문성에 대한 인식 등을 고려해야 한다. 도서관, 문화원, 문화의집등이 동일한 이름이나 브랜드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기능과 사업수행에 있어서 위의 1)-6)에 따라 내용적 차이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문화기반시설이 이미 확보되어 있는 가운데 문화예술교육의 내용적 터미널이 되는 것은 당연히 문화기반시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문화예술교육을 브랜드로 상정하고 통일된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추론은 섣부르다. 문화기반시설이 자기역량강화를 위한 노력을 못하거나 안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보다는 지금 현재 무엇을 해낼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 유효할 것이다.

4장 1절 / 사회문화예술교육 활성화를 위한 문화기반시설의 조건

문화적 결핍과 소외가 인간의 삶의 질과 무관하지 않다는 발상이 문제해결을 위한 정책적 대안을 마련하는 것에 그칠 때 사회문화예술교육의 내용적 결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문화기반시설의 이용자가 문화적 소외를 대도시를 기준으로 비교한다거나, 지역사회의 이해정도와 해석을 위한 노력을 시설운영주체가 자발적으로 하고 있지 않을 경우 문화결핍과 소외의 문제를 희석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기반시설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고 실행하고 검증받는 것이 중심이 아닐 것이다. 시설은 일종의 지역 내 문화환경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문화기반시설로 존재한다는 것이 프로그램을 보급하는 시설이라고 생각하는 운영자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설립취지나 운영하고 있는 사업의 최종 목적은 프로그램보급이 아니라 문화환경을 구성하는 더 큰 목적을 수행하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럼에도 사업내용이 설립취지와 사업목적과는 이질적으로 프로그램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한계가 생긴다. 사회문화예술교육이 실행되기 위한 문화적 태도가 필요하다. 사례연구에서 문화예술교육의 주 대상자가 사회문화예술교육이 지향하는 문화결핍과 소외의 대상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인, 장애인, 문화적 접근성이 어려운 농산어촌의 아동 청소년 등이 그 대상이 된다. 하지만 대부분 문화기반시설에서는 소외계층의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필요성에 대한 확신은 가지고 있지만 대상자를 모집하는 것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다. 가장 수고를 덜 들이고 모집할 수 있는 대상을 확보하거나, 시설이용자들의 중복 수강 등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주요 이용시간대가 농산어촌의 경우 노동시간에 해당되는 경우에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전업주부와 방과 후의 아동에 국한된다. 마치 문화기반시설이 아동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 전문기관처럼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사회문화예술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대상자가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지역에서 사회문화예술교육을 시도할 때 사람이 모집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다. 이는 그 대상자들이 문화소외의 상황에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우선되어야 한다. 만약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홍보했을 때 대도시처럼 사람들이 모여든다면 이미 소외계층이나 소외지역의 대상자가 아닐 것이다. (물론 대도시의 경우라고 해도 소외계층의 대상인구수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많은 대상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양한 시도들이 있기 때문에 사회문화예술교육을 수행하는데 있어 훨씬 수월한 모집 및 모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다시 말해 대도시의 사례를 빌어 프로그램을 세팅하고 운영하거나, 대상인원의 적정수가 너무 많아서 스스로 실망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사회문화예술교육을 지역 문화기반시설에서 운영하기 위해서는 시설자체를 문화환경으로 만드는 노력이 동시에 시도되어야 한다.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대상은 문화적 욕구 또는 지적 호기심이 있다고 전제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문화예술교육의 대상자군은 문화적 욕구를 발견해 내기에는 시간을 할애하기 어렵거나 물리적 접근성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개인의 힘으로 문화예술교육에 다다르기 힘들다는 것을 염두하고, 문화환경으로써 시설의 모습을 상정하는 노력을 함께 해야 한다.

4장 2절 / 시설 유형별 활성화 모델 개발(문화원, 문화의집, 문예회관 등)

사회문화예술교육을 실행하는 중심이 되는 거점은 이용시설로의 편의성이 아니라 시설의 설립목적인 사회문화예술교육사업과 어울리는 것이 우선 검토되는 것이 필요하다. 즉, 박물관 미술관이 사회문화예술교육을 통하여 시설의 정체성을 구현하고자 시도하지 않고 있는 경우에 동일선상에서 바라볼 수 없다. 오히려 문화원과 문화의집에서 기획한 내용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협력하는 사업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다. 시설의 독자적 성격이 분명하다면 사회문화예술교육 중심의 활동을 활성화하기에는 힘들다고 보인다. 시설을 분류할 때 문화예술교육의 전문성을 별개로 놓고서라도 교육프로그램의 코디네이션능력이나 교육기획력을 갖추고 있는 인적구성이 되어 있는가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일단 현재 문화예술교육의 전문성으로 별개로 놓아야 하는 이유는, 각 시설이 문화예술교육수혜기관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문화원, 문화의집, 문예회관, 도서관등 문화기반시설은 각자의 사업영역에서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이라고 독자적으로 개발하거나 수행하려는 취지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문화적 서비스이거나 예술 또는 예술교육의 범용적 수혜, 시설이용자 수의 양적 확대등을 목적으로 문화예술교육을 하나의 사업으로 바라본다. 드러나고 있는 사업의 내용을 살펴보았을 때 문화예술교육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 문화원 / 문화원은 지역문화 활성화방안에 대한 논의구조를 선행 검토하고 있으며, 시설이 확보되었을 때 최우선으로 결정하고 수행하는 사업내용은 지역문화에 대한 이해다. 따라서 지역사회의 문화적 자원과 역사적 보존가치를 가지는 유, 무형의 문화자원에 대한 발굴 및 보급이 사업이 된다. 이런 사업은 교육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업을 하더라도 교육사업이 함께 구성된다. 내용적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원칙에서 그러하다.

  • 문화의집 / 이용시설로의 가치를 충분히 실현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대다수의 문화의집은 지극히 한정적인 인적구성을 가지고 있다. ‘양질의 프로그램을 보급하는’ 것 보다는 문화공간으로 지역사회에 문화적 자극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프로그램으로 가능할 것이라고 보기에는 종사자의 수가 부족하다. 특히 군단위의 작은 규모에서 고립감을 느끼고 있는 경우에 프로그램이 많아진다고 해서 발전하는 것은 없다. 문화의집을 드나들 수 있는 통로를 개척하는 것이 우선과제다.

  • 도서관 / 중소도시를 포함해서 가장 접근성이 좋고 정체성이 분명하다. 더구나 책을 읽는다는 문화적 행위가 가지는 한국사회의 긍정적인 태도가 도서관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도하기 보다는 특화된 독서문화와 정보습득이 가능한 공간이 된다. 사서의 기본업무가 도서를 분류하고 정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낡은 개념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으며, 정보에 접근하는 과정에 통로역할과 독서와 도서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문화기획이 업무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생산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인적자원과 공간의 결합형태로 볼 수 있다.

  • 문예회관 /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는 공간이 분명하지만 교육기획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문화향수권리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자생적 기획을 하려는 의지를 발견하라는 권유는 시설의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주된 관점은 문화향수권확대라기 보다는 관객개발에 가깝다. 물론 관객개발차원에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행하면서 문화향수권에 대한 가치를 발견해 냈다면 그건 부가이윤이 된 것이므로 막을 이유가 없고 권장해야 한다. 하지만 문화예술교육을 중심사업의 하나로 보고 있지 않다.

  • 박물관, 미술관 / 국공립과 사립이 동시에 존재한다. 또한 문화와 예술, 교육이 동시에 그 기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취약점이다.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도 박물관과 미술관의 콘텐츠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우선이지 지역민의 상황과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와 고려가 중심에 놓여 있지 않다. 그런 이유로 지역에서는 일정수준의 경계나 이질감이 있을 수 있다.

  • 평생학습관 / 관점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문화예술교육적 성격을 가진 프로그램이 가장 많이 유통되고 소비되는 공간이다. 평생학습 담론의 시작점이 문화예술교육보다 먼저 시작되었다는 점도 그렇지만 평생학습의 시각에서 문화예술교육은 이미 떼어놓고 바라보긴 어렵다. 그런 이유로 평생학습관에서 운영하고 있는 각종 프로그램은 양질의 교육프로그램은 적은 비용을 들여서 수혜받을 수 있고, 학습권에 대한 보장이 동시에 담론화되고 있기 때문에 문화예술교육이 활성화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 구민회관/여성회관/마을회관 / 이용시설로 충분히 역할을 하고 있다. 이용자 수가 줄어든다는 것은 시설의 낙후되거나 다른 이용시설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활성화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 보다는 보다 효율적 공간이용의 개념으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 기타 / 사회복지관과 청소년시설 / 사회복지나 청소년활동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시설이어서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사회복지관의 이용자가 대부분 사회문화예술교육의 대상자라고 본다면 복지관과 연관된 사업내용과 보다 전략적 제휴방식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청소년시설은 청소년이 이용하지 않는 시간대를 활용하여 문화강좌들이 있지만 상업적 문화센터와 차별성을 갖는 것은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청소년시설의 운영비마련을 위한 것에 가장 가깝다. 그래서 사회문화예술교육사업과 연계한다면 유효한 시설이 될 수 있다. 사회복지관과 청소년시설에는 대부분 전문성을 가진 교육기획자가 일하고 있다는 강점도 살릴 수 있다.

예술교육단체는 왜 사라졌을까

ARTICLE 2021-03-16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이 10년이 넘어간다. 정책이나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소위 문화계와 예술계의 지형이 변화한 것도 사실이다. 변화는 곧 전진하거나 발전한 것과 등치시켜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문화교육이나 예술교육은 어떤 교육 행위자를 양산하게 되었는가. 그 행위자는 누구인가가 궁금해진다. 우리사회에서 형식교육과는 어느 정도 무관하거나 대안적 성격을 가진 개인과 단체가 부각되었다. 예술과 놀이로부터 시작하여 미학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이 건강한 문화적 경험을 만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전국의 문화예술인이 매개가 되어 교육행위가 일어났다. 시키는 사람은 없었으나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었기에 자발적이었다고 할 수 있고, 세인의 관심이 폭발적일 순 없었다 해도 커뮤니티에서는 삶의 궤적만으로도 존경의 대상이 되는 행위자(또는 행위자군)가 문화예술교육의 장으로 진입했다. 진입경로야 모두 다르겠으나 이미 꾸준히 문화예술교육에 포커스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붐업이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고민의 대상이 되곤 했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교육자의 절대수가 준비되지 않았고, 정책이나 사업은 공공의 장에서 펼쳐지게 되므로 다수를 만족시켜야 하는 임무를 부여 받거나 기준이 다른 평가를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교육자가 없는데 교육행위는 일어날 수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은 사실 아직도 해갈되진 않았다. 피교육자에 대한 이해를 바탕에 두지 않고 운영되고 있는 문화예술교육을 목격할 때 이런 생각을 지우기란 힘들다. 아동, 청소년, 장애인등으로 구분되는 대상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 놓여있는 피교육자인가에 따라 드러나는 삶의 모습을 인식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다. 문화예술교육은 기능교육이 아니라고 틈틈이 또는 전면에 내세워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다니지만 어디 그러한가. 여전히 피교육자에 대한 배려없는 집체교육을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고, 반문화적인 환경에서 비문화적인 교육자가 문화적인 예술교육을 행하고 있는 상황도 자주 드러나곤 한다. 교육자의 절대수가 부족할 만큼 정책과 사업은 양적으로 팽창했다. 때론 양적확산의 결과가 질적 성장을 불러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문화예술교육이라 불릴만한 단체들이 자기모습을 정돈하고, 기존의 사업이 두 세배로 늘어나면서 더욱 활동이 잦아지는 경우를 보게 된 것은 매우 흐뭇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어느 순간. 문화예술교육행위자가 자기가 속한 지역사회이거나, 문화와 환경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어도 되거나, 굳이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혼자 살아남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 가장 큰 함정에 뛰어들게 된 모양새다. 문화예술교육자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거나, 전문성 여부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때 예술을 기능으로 훈련시키는 훈련프로그래머는 최소한 아니다 라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세련된 언어로 포장하는 것 보다는 조금 더 거칠고 날것에 가까운 실체를 마주하는 것이 필요 할 것이다. 문화예술교육 행위자는 피교육자에 대한 폭 넓은 관심과 이해를 중심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도시거나 농산어촌이거나 모두 마찬가지다. 모든 개인은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과 조건, 생태, 문화로부터 자극받으며 그와 연관된 관계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생존을 위한 근거가 되기도 하며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문화예술교육자는 피교육자 개인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그 개인이 놓은 환경의 보편과 특수를 동시에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문화예술교육행위가 일어나는 시점은 그 관심사(때로는 문제해결이기도 하다)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또한 교육전문성을 위한 노력이 수반된다. 문화예술교육이 강조될 때는 이미 교육자가 교육받은 내용자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접근방법이 부정된 것에 가깝다. 교육자가 깨닫게 된 예술적 상상력이나 실천능력이 긴 시간의 노력으로 얻어졌다면, 보다 정리되고 간결한 교육과정을 생산해야 하는 책임이 생긴다. 문화예술교육 전문성은 전문예술가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풍부한 삶의 질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나 더 서술하자면,작업자군의 연대를 상상해야 한다. 개인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단기 아르바이트의 수준을 생각하고 있다면 위의 두 가지 어느 하나도 만족시키긴 어렵다. 그런 이유로 교육자는 작게는 공동체나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려 노력해야하고 크게는 전국의 네트워크망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필요해진다.

문화예술교육 단체가 늘지만 줄어들었다? 이런 모순을 말하게 되다니 한숨이 나온다. 각종 펀드와 지원이 생기면 그 자본의 흐름을 따라 비대해진 조직의 거품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상된 결과다. 하지만 문화예술교육이 확대되지만 단체가 아니라 개인강사가 양적으로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기형적인 모습이다. 특정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배정받은 지역과 지역민을 대상으로 각종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모습은 어이없다고 밖엔 생각되지 않는다. 정책과 사업은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기뻐 날뛰기 위해 치러야하는 값이 있다. 환경과 대상에 대한 이해, 자발적인 전문성훈련, 교육자간의 연대를 지불해야 한다.

다수의 선택

JOB SOUND 2021-03-16

어느 정치학 교수 왈.
“다수가 손을 들어주어 대표를 선출한다는 건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최악을 막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모두가 최악을 선택한 꼴이 되었으니 잘잘못을 논할 사람 또한 줄어든 셈이다.
다수가 선택한 것이 다수를 위한 것이라는 착각.

기술과 예술 / 먼지와 공기청정기

JOB SOUND 2021-03-16
  1. 꽤 오래전 우연히 보게된 독립영화 속 한 장면이다.
    30대에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고 60세가 훌쩍 넘어 퇴직했다.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묻는다. "자네, 30년 넘게 자동차를 만들었군"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이렇게 답한다. "음. 30년 넘게 자동차를 만들었는데, 자동차를 만들 줄 몰라. 난 뭘하며 산거지?"
    무슨 영화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 때 주인공 할아버지와 친구의 대화가 잊혀지질 않는다.

  2. 복잡하고, 세분화되고, 뭔가 끝없이 정의내리는 사회에 살 수록 우리는 원래 한몸이어야 하는 개념들을 나눠놓고 좋아한다.
    분해하고 나면 다시 조립할 수 없는 개념까지 찢어 놓곤 한다.
    기술과 예술이 그렇다.
    얼마전 예술가가 가진 기술로 예술행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한국의 행정용어로는 그 행위자체보다 결과에 치중한다.
    납품해야 하는 생산물로 취급하니 그 세계에선 예술이 사라져야 거래가 가능하다.

  3. 구글이 카드박스를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
    가구나 가전제품도(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했던...?) 튼튼하게 만들고 오래 사용하는 걸 권장하지 않는다.
    하물며 IT기기(뭐 이런 용어로 그냥 퉁치지. 설명 복잡하니)는 어떻겠나.
    구글은 VR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골판지를 접어서 사람들에게 사용성을 테스트했다. 그 사이 글래스 따위를 계속 만들어냈지만, 인간은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다는 증거가 속속 나왔고 구토와 충돌 사고 위험이 끝없이 따라다녔다.
    거의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상현실의 가능성을 못찾아냈다.
    심지어 몰입감 최상의 게임이나 포르노 시장에서도 파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4. 며칠 째 미세먼지 경보가 울리고, 아이콘은 방독면을 쓰고 있다.
    마음껏 심호흡 할 수 있는 곳은 실내 밖엔 없다.
    참 웃기긴 한다.
    미세먼지가 문제가 되니 공기청정기를 판다.
    그 공기청정기를 만들어내느라 공장을 돌린다.
    더 더 더 더 더 공기가 더러워져야 누군가는 부자가 된다.
    미세먼지는 결국 나도 일으킨것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어진다.
    결론은...우린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절반 훨씬 넘게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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