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ango Reinhardt festival

Buscant 2020-12-06

2014년.
말그대로 올스타. 장고페스티벌에 온 아티스트에게 모여서 한곡 부탁하자...
놀라운 연주를.
버튼 아코디언 참 소리 좋다.

지역활동(?)가를 만나 인터뷰 한 후에 쓴 원고의 일부

ARTICLE 2020-12-06

우리는 쉽게 공동체를 말합니다. 흔히 공동체는 의식을 공유하는 집단을 지칭합니다. 그것은 미래나 운명을 같이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공동체는 그런 거창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너무 쉽게 입에 오르내립니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가 가진 생각을 가장 잘 이해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만, 자신이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첫번째 어른이 부모였다는 것을 잊기 쉽습니다. 즉, 모두가 다르게 성장하는 객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합으로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가 형성될것이라는 신념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결국 허상을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먼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상상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주거지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었을까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내 고장 내 마을이기 때문에 지키고하는 사람이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지금 거주의 결정을 내리는데 중요한 요인은 경제력입니다.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재산의 정도에 따라 대부분 결정되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입니다. 안타깝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경제적 수준에 따라 주거를 결정하고, 살다보니 적응하고 익숙해 져서 정주성이 형성되곤 합니다. 지역사회에서 나고 자랐다 해도 이주를 결정하는 가장 큰 이유 역시 경제력에 의해 좌우되기 쉽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떠나서 새로운 문화적 경험을 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당연한 욕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속해있는 지역사회가 순수하게 자기주도적인 결정이라고 보긴 어려워집니다.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어쩔 수 없이 지금의 지역을 선택한 사람도 꽤 많을 것이며, 언제든 부의 정도에 따라 지역을 옮기고 싶어하는 욕구 역시 적은 수가 아닐 것입니다. 감추지 않고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지역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사업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업이란 형식을 빌어야 하기 때문에 따뜻한 사람들의 마음씨를 키우거나, 부족한 것을 메우면서 애향심을 북돋아야 한다고 말할 수 밖엔 없기 때문입니다.

공공지원사업이 되는 순간 실체로서 공동체는 드러나기 힘들고, 사업체로서 공동체가 더 부각되기 쉽습니다. 더구나 지원사업의 형태가 행정에서 주도하는 것으로 보일 때 훨씬 강회됩니다. 공공성이 가진 함정은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환상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다수의 만족을 따를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합니다. 이제는 익숙한 개념이 되어버린 님비NIMBY나 핌피PIMFY가 집단의 크기와 이익에 대한 문제이며 다수의 만족이라는 이유로 공공성이 훼손되는 것을 목격하곤 합니다. 결국 다양한 개인의 집합이라는 명제와 모두의 이익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사업의 구성과 참여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와 연관된 다양한 지원사업에서도 필요와 요구가 다양하기 때문에 유형화한 사업형태를 최종 목표로 삼거나, 단기간의 사업으로 성과를 드러내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부터 자유로와져야 합니다. 행정기관과 함께 해낼 수 있을까를 의심하면서 지역사회에서 공동체활성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등장했습니다. 대부분의 활동가는 이미 지역공동체에서 선의를 가지고 일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것 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들 입을 모아 말합니다. 그 행동은 사람들을 모으고, 생각을 공유하며, 함께 하니 즐겁다는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래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지원사업을 만나게 되었을 때 조금 더 확장하여 다양한 일을 지역에서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다른 누구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고 필요에 의해 행동을 결정한 사람들을 우리는 활동가라고 칭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최상위의 가치는 물적보상이 아니라 가치를 알아채는 동료가 늘어나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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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공동체, 커뮤티니, 평생교육, 마을등의 이름으로 활동가를 양성하는 교육이 많습니다. 이름을 조금씩 달리 쓸 뿐이지 교육과정에서 다루는 것은 거의 비슷합니다. 모든 교육프로그램이 다 달라야 하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양성교육이 비슷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 양성교육으로 양성이 되는가에 대한 문제는 다릅니다.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활동가가 단지 여가활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살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삶의 태도를 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양성교육은 어떻게 할것인가에서 어떻게 살것인가로 변화하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매우 어려운 시도라고 생각하고, 오래 걸릴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일 생겼을 때 반창고 붙이는 방식에 신물이 난 활동가들이 떠나지 않기 위한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활동가가 자율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과로 부터 자유로와져야 합니다. 공공의 비용을 들였기 때문에 그에 응당한 성과를 내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은 행정기관만이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활동으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성과가 아니더라도 활동가는 다양한 시도와 실패를 통해서 성장합니다. 즉, 성과로 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은 다양한 활동가의 경험을 축적하게 만드는 일종의 양식장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결국 공동체활성화는 공동체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을 남겼는가에 초점이 맞춰질 수 밖엔 없습니다. 사업성과로 축제가 만들어지고, 공원과 텃밭이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애정을 가진 지역사회의 참여자가 없다면 생명력에는 한계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공동체활동을 이해하는게 너무 어려웠다고 말은 공동체활동은 특정한 범주로 정의하거나, 옳거나 그른것에 판단이 단지 사업평가등으로 내려지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자주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사업이 조금이라도 확장되면 사업을 자꾸 분류하여 지원부서가 바뀌거나, 같은 내용의 사업이 다른 이름으로 둔갑하여 늘어납니다. 사업이 확장되면 그때가 가장 큰 위기 입니다. 예를 들어 50년전통의 맛집이라고 해서 찾아가던 곳이 갑자기 프렌차이즈가 되면 그 맛과 멋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결국 고유성이 사라지면 형식이 남고, 형식이 내용을 따라가기 힘들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니까요. 운영하는 사업이 활성화 단계를 거쳐 가능성이 보이면 무조건 확장하려 하지만, 그 고유성을 어떻게 지키면서 더 많은 참여를 독려할 수 있을지 우선 고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럴 때에도 공동체활동을 어떻게 할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에서 어떻게 살것인가를 이야기 해야 합니다.

노인이 행복한 나라

ARTICLE 2020-12-05

사람들마다 여행방식에 대한 여러가지 분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행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누구와 함께 가는가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갑자기 훌쩍 떠나는 여행이 있는 반면 철저히 준비해서 가는 사람도 있다. 커뮤니티와 노인에 대한 글을 쓰면서 여행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는 지난 여름 캘리포니아를 여행하면서 느낀 것을 쓰려고 하는 의도다. 나의 여행스타일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다니는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지내는 여행”이다. 대체로 이곳 저곳을 구경하며 낯선 환경속에 나를 노출시키고는 무엇을 느끼는지 살피는 것이 다니는 여행이다. 비용을 생각하며 하나라도 더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신기한 물건을 만져보는 것이 그렇다. 그런데 이런 여행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즉석요리를 먹고난 느낌 같다. 재료의 맛을 느끼기 어렵고 입으로는 잘 들어가지만 배가 부를 뿐 나에게 영양소를 제공해 줄 것 같은 느낌이 아닌 것 같달까. 그래서 난 대부분의 여행지에 도착하면 한 곳에 주로 머물며 매일 같은 거리를 걷는다거나 단골 식당을 만든다거나 하는 여행지의 일상적 경험에 주목한다. 캘리포니아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머물면서 동네를 산책하고, 도서관에서 책 읽고,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주일이 지나면서 묘하게 이곳의 문화적 특징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공간에서 적응하느라 생긴 호기심이 사라질 무렵 놀라운 것이 보이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주말이 되면 개인의 차고를 이용한 장이 열린다. Garage sale또는 Yard sale이라고 말하는 중고시장은 집집마다 열리기도 하지만 마을에 조금 더 큰 규모로 열리기도 한다. 집에서 안쓰는 물건을 내놓고 파는 것이니 대단한 것은 아니겠으나 생각보다 훨씬 더 작고 사소한 것이 거래된다. 차고에 쌓여 있던 1960년대 어느날의 신문 한부는 2불에 팔리고, 쓰다 남은 기저귀는 협상가능한 가격으로 팔린다. 오래된 가구는 상태에 따라 값이 매겨졌다.

도서관에서는 거의 매월 도서관 재단이 후원하는 행사가 있었다. 주로 헌책을 교환하거나 구매할 수 있다. 이곳에 오는 사람은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 토요일 오전에 시작해서 오후 3시까지 열리는 이 헌책장터는 재미있는 이벤트가 있었다. 오후 1시부터는 5불을 내고 자신이 가져온 가방에 갖고 싶은 책을 한 가득 가져갈 수 있다. ‘그럼 여행용 가방을 하나 가져와서 싹 쓸어가는 사람이 있을텐데...’라는 생각은 이곳의 문화적 태도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매 주말이 되면 도시마다 농산물 직거래 장 Famers market이 열린다. 도시라고 하기 보다는 작은 규모의 마을 장터의 느낌이다. 토요일 또는 일요일에 다운타운의 한 블럭을 이용하여 가까운 곳에 사는 농부들이 농산물을 직접 가져오와 팔거나 가공식품을 만들어 내놓는다. 보통 오전에 시작해서 오후 3시정도에 장이 마감하니 이들이 이 시장에 나오는 것이 생계수단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유통시장은 따로 존재하지만 동네 장터에 나오는 것이 즐거워 보이는 이유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신선한 야채나 과일도 사고 공원에서 가족이나 친구와 점심을 먹으며 주말을 보낸다. 물론 장이 서는 곳에는 크지 않은 규모의 아티스트 무대가 열린다.

문화적인 모든 곳에는 왠지 모를 여유와 뭉클함 같은 것이 있었다. 한국에도 장터가 열리고, 무대가 있고, 공원도 있고, 축제도 있지 않은가. 단지 나는 외국여행 중이니 이런 모든 것이 신기하게 보여서 느끼는 것과는 달랐다. 이유를 알아냈다. 커뮤니티의 문화콘텐트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노인이다. 우리에게도 있는 장터는 동네에 있다기 보다 문화적인 거리에 자주 등장하고, 무대는 홍대나 대학로에 나가야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이 젊은이들의 문화다. 그 차이였다. 야드세일도, 장터도, 거리공연도, 도서관 재단의 행사도 대부분 노인들이 주도적으로 그 일을 해낸다. 심지어 20년이 넘게 진행된다는 마을축제도 진행자부터 스탭까지 대부분이 노인이다. 노인들이 주도하는 문화와 예술의 장에 세대차이를 느끼는 젊은이들은 외면하고 오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축제에서 공연하는 사람들의 절반은 20대/30대다.

축제에 모인 가족들 사이사이에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함께 있고, 20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축제를 즐긴다. 그냥 자연스러운 풍경속에 모든 세대가 공존한다. 이 모든 문화와 예술을 주도하는 노인들의 움직임으로 보면서 느꼈던 것이 뭉클함의 실체였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희망을 정의하는가. 모두에게 평등한 권리를 준다고 약속하는 사람이 희망을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책의 대안을 가지고 있어서 당신의 미래에 희망을 선물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사기에 우리는 수 없이 속으면서 희망을 말하고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번 캘리포니아 여행은 커뮤니티의 문화를 주도하는 노인과 지역사회를 만나게 된 것 같다. 문득 지금까지 함부로 사용하던 희망이란 단어를 설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은 윗세대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 살때 자연스럽게 생긴다. 노인이 행복한 모습이 지역사회에 노출되면 그 마을이 행복하다. 지금까지 마을의 행복은 어린이의 밝은 웃음속에 들어있다는 추상적인 상상만 하면서 살아왔던 내가 스스로 한심해 졌다. 복지제도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서비스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지역사회에 머물지 않았으면 한다. “노인의 행복”이라는 키워드가 “커뮤니티의 희망”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우리사회의 노인의 모습은 행복한가.

감기기운

JOB SOUND 2020-12-05

COVID-19 이슈는 어디서나 뜨겁다.
모두 한마디씩 거들고, 옳다 그르다로 싸움이 나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는데 감기기운이 있다.
으슬으슳하고 오싹 춥다.
요샌 기침 재채기만 해도 어디 다니기 눈치 보인다.
그냥 눈치만이 아니라 예의없는 존재? 그런 느낌이다.
감기면 안되는데...
일단 잘 쉬어야겠다.

영화 속 사진읽기_강의자료_Finding Vivian Maier

ARTICLE 2020-12-04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Finding Vivian maier)

역사책을 쓰고 있어서 사진이 필요했다는 다소 설득력 떨어지는 내레이션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빈티지 상점이나 경매장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찾는다. 그러다 우연히 네거티브 필름을 발견하고 집으로 가져온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리면서 수집으로 묘사한다. 영상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는 개연성이 떨어지고, 작가가 열심히 프린트 하면서 사회적 실험(미술관을 찾는다거나, 예술계의 태도를 겨냥한 발언을 한다거나)을 거듭하는 것이 진심으로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에 감동을 받은 다큐멘터리 작가의 시선이라기 느끼기는 힘들어 보인다. 다만 다큐멘터리를 잘 만들고자 하는 의식적 행동에 가까와 보인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사진과 예술에 대해서는 그렇다. 더구나 2009년 이후 디지털미디어가 다양한 형식(비형식, 탈형식을 포함한)을 실험하며 가속화하는 변화추이에 따라 “사진”을 바라보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몇 가지 질문이 생긴다.

예술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정 받아야 하는 문화적 텍스트인가?

현재의 이슈인 초상권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2차저작물이 만들어질 때 원저작자의 권리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면 이 영화는 “신상털기”에 해당한다. 작가는 어떤 윤리의식을 가져야 할까?

필름 한 롤이라고 해도 모두 공개하는 작가는 드물다. 셀렉팅의 예술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작업결과가 그녀의 작품이라고 말해도 될까?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비비안 마이어가 있는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가 있고, 사회적으로 약속한 범위가 있다. 이 모든 것은 혼재 되어있기 때문에 명문화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즉, 그것이 입장의 차이거나 그 시대에 통용되는 가치에 따른 다양한 “해석의 결과”다.

2018년 상상력발전소 기고글

ARTICLE 2020-12-04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흔한 투덜거림 중 하나가 일기예보다. 분명히 오늘 아침 예보로는 오후에 비가 온다고 했다. 그래서 우산을 챙겨나왔는데 쾌청하다. 우산 하나를 들고 다니는 것이 몸의 움직임에 엄청난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도 하루 종일 우산을 볼 때면 불평하게 된다. 기상을 예측한다는 건 인간의 생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다양한 방식으로 예측을 해왔다. 동물의 움직임을 보면서도 판단하고, 어젯밤 달무리의 모양새를 보면서도 다음날을 예상하곤 했다. 그만큼 날씨는 우리의 삶에 많은 것을 차지하기 때문에 흔하게 투덜거릴 대화의 소재가 된다. 최근들어 이 흔한 투덜거림이 더 많아졌다. 한국인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디지털디바이스에서 그 정보를 얻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하늘색이 바뀌면 날씨정보를 찾거나 앱을 열어 확인한다. 그리곤 기상정보 업데이트가 지금 자기 몸이 느끼고 있는 정보와 동일한지 확인한다. 어찌보면 좀 쓸데 없는 일이다. 물론 운항을 나가야 하는 파일럿이거나, 고기잡이 배의 선장이라면 꼼꼼히 체크한 기상정보와 수년간의 경험으로 오는 예측으로 판단을 내릴 것이다. 그런 이유로 기상정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우산을 하루 정도 들고 다녔다고 해서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일기예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어서 참고할 뿐이다. 예보 자체도 그렇게 구성되지 않는가. 하지만 기상정보를 손쉽게 얻기 시작하면서 달라진 것이 있다. 체감하는 것의 중요성을 잃어가는 느낌이랄까. 지금 춥다면 온도가 내려간 것이고, 저 멀리 하늘에 먹구름이 있다해도 비가 오지 않는다면 그저 흐린 날일 뿐이다. 햇살이 쨍쨍한데 오늘 비온다는 온라인 정보를 읽으면서 ‘일기예보란 믿음이 안가는군’이란 마음의 소리가 굳이 필요 없을텐데 말이다. 날씨예보에 오늘 흐리고 비가 온다고 써 있다 해도, 체감하는 자신이 느끼는 정보가 진짜다.

2018년 상상력발전소는 성수동에서 열렸다. 매해 열리는 행사(?)라지만 또 다른 환경을 탐색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상상력발전소의 주요컨셉은 이미 정해진 상황이어서 커미티가 결성되는 시점이 조금 늦었다는 생각을 했다. 반면 이런 성격의 전시와 파티에는 너무 큰 책임감 없이 참여하는 것이 즐겁기도 한 법이다. 전시를 설계하면서 가장 큰 이슈는 성수동일 수 밖엔 없다. 인간의 사유방식은 사고와 대화를 반복하면서 생기는 마찰과 충돌의 결과로 완성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성수동은 매력적인 곳인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더 필요했다고 욕심이 생기지만 어디서든 그 아쉬움은 남는다. 성수동은 오랜시간 쌓아올린 장인의 삶터가 아니던가. 상상력발전소가 지향하는 기본적인 가치는 예술이 작업자를 향하고, 장인이 예술가가 되며, 테크놀로지의 정점에 인간감성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수십년간 쌓아온 장인과 제작문화가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 예술이 조금 다른 관점으로 지역과 사람들을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어찌보면 진부한 발상이기도 하다. 여전히 지켜야 하는 것과 새로운 문화가 만나야 한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어서 그럴게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진부한 발상과 행동이 또 얼만큼의 시간을 견디며 쌓여질 것인가가 중요하다. 누군가는 뻔한 결론이니 그만 하자고 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상상력발전소의 새로운 방법론을 내 놓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공공의 지원이나 공공영역의 해석방식에도 특정한 사명감이 부여되길 바란다. 그래서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퍼포먼스와 관람객의 수로 몇 마디 평가로 방향이 전환되기에는 아까운 사업이라고 판단했다. 성수동의 수십년간의 역사가 지금의 모습으로 평가되길 바라지 않듯 상상력발전소 역시 인스턴트에 가까운 쓰고 버리는 시도에 그치지 않길 바라는 바람이 생긴다. 짧은 준비시간은 늘 좋은 핑계가 된다. 어차피 준비할 시간이 짧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과업이 있어 해내야 하는 것 보다는 자율적 판단으로 자신이 해야하는 이유를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이 참여한 사람들이 가져야 할 태도다. 2018년 상상력발전소도 짧은 준비시간에 촉박한 일정을 견뎌야 했다. 작가를 선정하고 준비하는 동안 성수동에 대해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역시 그런데도 참여해야 하는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결합한 것이 즐거운 일이었다. 결국 해내야 하는 이유는 없더라.

급변하는 사회, 달라진 문화, 적응하기 힘든 속도전쟁.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곧 들어왔다.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들어야 하는 소리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따라오는 이야기는 앞으로는 이렇게 될 것이라는 예측. 혁명이 다가온다고 선언하고, 대비하며 살아가라는 말을 쉽게 한다. 우리는 그 수 많은 미래예측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를 생각했으면 한다. 마치 일기예보를 보면서 현실과 비교하면서 맞네 틀리네를 말하는 모습으로는 오늘 나와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간다. 그 감각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생강

JOB SOUND 2020-12-04

언제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는지 얘기하다보면 간혹 재밌는 말들을 많이 한다.
대체로 감성적인 답이 많긴 하지만 그런건 너무 애매하고, 어렸을 때도 느낀 것이 대부분이어서 와 닿질 않는다.
이런 표현들이 재밌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서 시원하다고 말하는 자기를 볼 때.
국물에 들어있는 파를 건져내지 않을 때.
병원에 혼자 갈 수 있을때 등등.

난, 어렸을 땐 생강 근처에도 못갔다.
알싸하게 매운 향이 나에겐 너무 역했다.
여전히 생강 초절임도 못먹는다.
가끔 어떤 김치에 생강이 씹히면 그 이후는 식사 끝이다.
어른이 된다는게 뭘까를 생각했을 때 생강을 기준으로 잡았던 적이 있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나도 생강을 먹을 수 있게 될거야...'
그 기준에 의하면 난 아직 어른이 아니다.

오늘 인어공주랑 점심에 생강차를 마셨다. 어른에 가까워졌다.

***ma

JOB SOUND 2020-12-03

dilemma.
stigma.
trauma.
karma.
dogma.
plasma.
coma.
enigma.
charisma.
anathema.

-ma로 끝나는 단어는 공포스럽기도 하고 영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멋있는 발음을 내나?

라스코 동굴벽화를 보며

ARTICLE 2020-12-03

언젠가 라스코 동굴벽화를 보면서 몇 명의 아티스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라스코 동굴벽화가 인류가 그린 첫 번째 그림은 당연히 아니고 그 보다 몇만년 앞선 예술 행위는 각지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라스코 동굴벽화는 잘 알려진 그림이기도 하고, 표현방식이나 예술적 각성을 이야기하기에 적합하다. 우리의 대화는 어디서도 본적 없는 최초의 경험과 독립성을 가진 설렘에 대한 것이다. 현재 우리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라고도 하고,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라고도 하면서 역사 속 시각예술품을 보며 산다. 더구나 미디어는 각종 작품을 다채널로 재생산하며 우리 가운데 있다. 잠깐 그리는 행위를 생각해 보자. 무엇을 그릴까 관찰을 시작한다. 피사체에서 중심이 되는 선을 나의 감각으로 옮겨 넣는다. 그 작업이 쌓이는 과정이 수련이고, 그 반복 행위가 모여서 작가가 탄생한다. 라스코 동굴벽화를 그려 넣었을 그때, 비교할 그림도 없고 다른 그림을 본 경험이 없었을 그 상황은 표현의 자유가 극대화된다. 그들은 행위를 무엇이라고 정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실험적일 수 있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초기 인류가 남긴 드로잉은 잘 그리고 못 그린다 뿐 아니라 그 행위가 무엇인지조차 비교할 대상이 없었다. 즉, 지금의 행위에 온전히 집중하고 작업할 수 있으며 독립적이라는 의미다.

어정쩡과 황당사이

Buscant 2020-12-02

난 배웅이 어색하다. 특히 버스나 기차에서 인사를 다 마치고 플랫폼에 서 있을 때.
언제 돌아서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상한 몸짓을 계속하거나,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손짓을 하거나,
눈을 마주치는게 지루하거나.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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