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는 업데이트 되어야 가치가 있다.
영화보면 돈 받고 정보를 파는 양아치가 나온다.
충분히 그럴만 하다. 그 정보는 자기의 위험과 바꾼 것이니까.
그런데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 정보를 팔았을 때는 돈 뺏기고 얻어 맞곤 한다.
업데이트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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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말을 시작할 때 이쯤되면...으로 시작하면 상당히 공격적으로 말할 수 있다.
노무현대통령의 명대사인 "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지요"가 범례다.
그때 조금 더 공격적일 수 있었는데, 보는 눈이 너무 많았나 싶기도 하다.
어제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듣는데 뉴스에 코로나19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코로나19에 걸렸을 때 가장 우려되는 것은 이라는 질문에 가장 많은 수는 사회적 낙인이 걱정된다고 답했다.
바로 다음 질문인 방역과 인권보호 중에 무엇이 우선인가라는 질문에 가장 많은 수는 방역이 우선이라고...쩜쩜쩜....
이쯤되면 같은 사람들에게 나온 답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다중이...뭐 그런건가?
최근 회의중에 스스로 앞뒤가 안맞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쿨하게 가는 사람을 목격했다.
정말 관심이 1도 안가는 인물인지라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이쯤되면...으로 시작하고 싶었지만 입꾹.
7년전일이다. 예상컨데 지금 문화예술강사를 주제로 컨퍼런스를 기획하라면 또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심이 사라져서 잘 모르긴 하지만, 훨씬 더 경직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라지만 2014년에 이런 레터를 보낼 수 있었던건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술강사에게 듣고 싶었습니다.
어느 순간 예술강사는 예술교육을 소비하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수요를 채워주는 도구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은 몸, 붓, 렌즈, 악기, 무대등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려고 합니다. 예술세계를 혼자만의 것으로 가둬두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술가가 예술을 가르치는 행위는 당연한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지쳐버린 예술강사를 만나게 된겁니다. 강사연수를 통해서 예술강사를 만나면 ‘저 어쩔 수 없이 여기 앉아 있거든요’라는 얼굴이 보였습니다. 경로를 설명할 수 없지만 다양한 회의자리에서 만났을 때 그들의 얼굴에는 행복은 커녕 불안과 분노가 더 많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예술강사활동을 하는 개인을 보면 개성 넘치고, 열정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컨퍼런스를 준비하면서 열정과 행복이 넘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예술가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문화부와 문화예술교육 진흥원과 강사들이 맺고 있는 행정과 평가를 비롯한 이해관계의 불편함이 있습니다. 더구나 수천명의 강사는 집단으로 읽히기 쉽습니다. 집단은 한 개인과 다른 캐릭터를 갖게 됩니다. 문화예술강사 집단의 캐릭터는 서로를 불신하게 만드는 행정적 구조안에 들어 있습니다. 몸의 언어를 문서로 작성해야 하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미지의 언어를 커리큘럼으로 만들라는 요구는 있었지만, 무엇이 적합한 단어인지 찾아가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더구나 매 수업은 일지를 요구했고 동어반복이 지루하고 힘들어질 때면 평가기준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무엇을 했는지 어떤 대화가 학생들과 오고갔는지가 중요하기 보다는 문서 작성하느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겁니다. 그렇게 점수로 환산되어 원하는 지역의 원하는 학교에 원하는 수업시수를 가지게 되는 구조 안에 스스로 편입된 것입니다. 지식을 공유하기 힘든 구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다른 강사보다 평가에서 우위를 차지하지 않으면 손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양질의 교육과정과 방법론을 자유롭게 공유할 수 없었을 겁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높은 평가 점수를 받은 예술강사의 범례가 공개되거나, 강좌를 개설해서 지불이 완료된 가공된 정보였습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모든 학교가 그렇지 않았겠으나,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이해는 둘째 치더라도 최소한 학교에 온 예술가로도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예술강사가 수업준비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학교는 소수였고, 수업에서 사용해야 하는 장비나 재료조차 관리되지 않는 현실이 무겁게 느껴진겁니다. 어느 순간 평가에 의해 이리 저리 휘둘리는 자기 모습에 환멸이 느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나열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문제를 발견했지만 어디서 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모르게 된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최소한 7년이상 방치해둔 것입니다. 이 컨퍼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방법론은 강사연수나 개설되는 다양한 강의에서 다룹니다. 강사들의 처우나 행정적 지원 문제는 공청회나 간담회, 설명회등을 통해서 다뤄야 합니다. 그 몫이 있습니다. 컨퍼런스에서는 “예술가로 살아온 강사 당신은 누구세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학교나 사회복지시설과 단체등에서 직접 피교육자를 만나는 문화예술교육의 최전방(?)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높은 평가점수를 득한 커리큘럼을 가지거나, 검증된 방법론으로 교실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커리큘럼과 방법론이 그 교사가 이해한 것이고 체화된 것이어야 합니다. 교육의 질의 교사의 질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더구나 행복한 예술가가 강의할 때 교실과 학생이 행복해지는 명료한 관계를 잊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컨퍼런스에서 교육방법론과 예술강사사업에 대한 각종 행정적 불만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한 이유는 “예술가인 당신을 들려주세요. 우리는 당신이 어떻게 현재를 사는지가 궁금합니다”라는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이 현재를 사는 이야기는 귀납적으로 현재의 한국사회 예술강사를 이야기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식공유 발표를 하는 예술강사가 공통적으로 기획자인 저에게 했던 질문은 “정말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요?”였습니다. 교육과정 개발도 아니고, 새로 만든 방법론도 아니고, 문제해결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어도 말해도 되는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고, 문제를 개발(!)해서는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믿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과가 물리적으로 쥐어지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 힘든 것이 예술가와 예술강사의 삶입니다. 하지만 예술가와 예술강사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 예술교육의 장에서 만나게 될 어린이/청소년/노인/장애인이 접하는 예술에 대한 태도에 가장 근접한 것입니다. 예술의 시작에서 느낀 초보의 설렘과 호기심이 살아있게 환경을 만드는 사람들이 예술강사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포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멤버가 "가서 발표하고 월세 벌어오라"고 해서 발표에 참여했다. 야마도를 만들면서 가졌던 생각을 짧게 정리한 글.
발표를 위한 자료를 그대로 싣는 것을 원치 않아 짧은 글을 씁니다. 발표내용과 무관하진 않지만 이 내용을 포럼에서 발표할 것은 아닙니다.
이웃 어린이의 예술교육
대림동에 2004년 이사왔으니 올해로 9년째 이 집에 살고 있다. 옆집엔 부부와 세자녀가 살고 있었다. 아저씨는 밝은 성격에 얼굴에 웃는 주름이 크게 보일 만큼 멋진 사람이고, 아주머니는 낯을 조금 가리시고 쑥스러움이 많은 분이지만 막상 마주할 땐 늘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분이다. 아들 둘에 딸아이 한명이다. 이사왔을 당시 막내가 태어났다. 세째아이로 딸이었다. 태어난지 한달이 되었다고 했으니 아마 요맘때가 생일일게다. 그 아이는 지금 아홉살이 되었다. 이집에 살면서 가장 즐겁고 신나는 기억은 옆집 아이들이었다. 아침이면 세명이서 밝게 웃으며 복도(오래된 아파트의 전형인 복도식이다)를 뛰어다니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이들 웃는 소리로 아침이 시작된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어느날은 꼬마가 오빠들 학교가는데 따라나가며 데려가 달라고 우는 소리. 어느날은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와서 기승전결 없는 이상한 논리를 심각하게 펼치기도 하고, 또 어느날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소꿉놀이를 하느라 돗자릴 펴고 누워있었다. 친구들과 누워 자는 시늉을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마나 서로 깔깔대고 웃었는지 모른다. 길에서 마주칠때면 내가 바쁜 걸음으로 주차장을 가로질러가는 꽁무니에 자전거를 타고 따라와 인사를 했다. 동네 아이들이 "아는 아저씨야?"라고 하자 "아저씨 아냐. 오빠(?)야!"라는 말이 들렸고, 나는 뒤를 보며 손을 흔들고 사라졌었다.
몇년 전 왁자지껄하는 소리와 함께 옆집에 피아노가 들어왔다. 큰 아이가 피아노레슨을 시작하고 도-미-솔을 벗어나지 않던 소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꽤 근사한 동요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느날 아침엔 아이의 연주에 감동받으며 일어나기도 했다. 조금씩 악보를 보고 제대로 소리가 나기 시작하는 그 아침을 잊을 수 없다. 서서히 피아노 연주는 나아지고 있었다. 어느날 밤, 집에 돌아왔을 때 Michael Jackson의 billie jean이 들렸다. 현관 문을 열고 나서서 연주를 들었다. 다음날 큰 아이를 길에서 마주쳤다. “마이클 잭슨을 어떻게 알아? 피아노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곡이야?”라고 물었을 때 "아뇨...제가 좋아서 듣고 그냥 쳐본거에요"라고 큰 아이가 대답했다. 내가 집에 있는 인기척을 느끼고 들어간 그 아이는 그날 저녁에 들으라는 듯 Smooth Criminal을 연주했다. 옆집에서 은근히 들리는 아이의 연주를 보이스레코더에 담았다. 또 그 다음날은 엄마와 같이 문을 빼꼼 열고는 마이클 잭슨이 좋다며 활짝 웃었다. 아파트가 삭막하다고? 이런 이웃이 있으면 삭막할 틈이 없다.
막내인 여자아이는 14층에 사는 아이와 단짝이다.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계단에서 그 둘은 자주 앉아서 놀았다. 놀이의 도구는 참 간소했지만 늘 실속 있었다. 문구점에서 파는 제품화된 장난감이 아니었다. 나무젓가락, 휴지, 고무찰흙, 손전등을 자주 가지고 놀곤 했다. 참 다양한 놀이가 가능했다. 14층 꼬마가 언니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한 두살 정도 어린것 같았다. 어느날이었다. 계단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는 모양이다.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불쑥 나가지 않고 주춤하고 섰다. 아마 14층 아이가 한글을 못 읽기 때문에 읽어주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곰세마리가 한집에 있어 아빠곰 엄마곰 아기곰” 약속시간때문에 더 있지 못하고 엘리베이터쪽으로 걸어나가자 반갑게 인사한다. 나도 인사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아이들이 보고 있는 동화의 표지에 눈길이 갔다. 표지에 곰이 있었다. 아마 그림동화속의 주인공이 곰이었나보다. 동화책을 읽어준다면서 곰세마리 노래를 같이 부르고 시작하는 이 명장면을 목격하다니 참 운도 좋다.
어느날 차곡 차곡 정리된 박스를 복도에 내다 놓았다. 일요일에 버리려고 정리하나 보다 싶었는데, 그 옆에 점점 쌓여갔다. 이상하다 싶어서 물었더니 이사가기로 했다고 전한다. 방은 두칸인데 아이들은 셋이고 이제 모두 초등학생이 되었으니 좁을만도 하다. 조금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갈거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둘째 아이였다. 둘째는 잘 생긴데다가 쿨하다. 막내동생이 오빠오빠 부르면서 길에서도 꼭 손을 잡고 다니는데, 약간 어색해 하면서도 동생손은 놓지 않는다. 정작 옆집은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을 이런 이웃과의 행복의 순간이 끝나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날 이후로 조금씩 물건들이 버려지고, 다시 나왔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하더니 어느날은 소파가 복도에 나와 있었다. 둘째가 앉아 있다.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내놓은 거실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책을 읽는다. 말을 걸었다. "여기에 의자가 있었으면 참 좋았었겠다. 완전 낭만 적인데"라고 말했다. 둘째의 대답은 "그렇죠 뭐"였다. 집에 들어가서 과자 한 봉지를 가져다 먹으라고 건네주었다. 조심스럽게 받더니 감사합니다 라고 말한다. 정말 이 공간에 저런 푹신한 의자가 있었다면 꽤 재밌는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겠다고 생각하며 또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결국 아이들이 이사갔다. 막내 아이는 태어나 처음하는 이사를 맞이하게 될것이다. 집안에 신발신고 들어가고, 신문지 깔고 중국음식을 먹는 첫번째 경험 말이다. 둘째는 짐이 다 옮겨진 후에 새로 생긴 자기 방을 보면서 시크하게 쳐다 보고는 책본다고 의자에 앉아 있을테고, 큰 아이는 오늘 학원 안가도 된다는 말에 신나 자전거 타고 동네를 한바퀴 돌거다. 아이들에게 삶의 환경이 바뀌는 이 경험이 앞으로 일어나게 될 또 다른 상황에 대한 적응력을 만들어 주게 될것이 분명하다. 지나다니면서 이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을 생각하니 계단에서 시멘트의 냉기가 느껴진다.
생각해 봤으면 하는 것이 있다. 우선 이 아이들의 예술교육과 예술행위는 자연스럽고 적극적이다. 빛나는 성과를 만든 예술가에 의해 탄생했다기 보다 일상에 근거하고 있으며, 스스로 만들어낸 놀이다. 일상속의 예술활동이 준거집단을 중심으로 시작하고 매끄러운 크로스오버가 일어나는 비선형적인 또래의 놀이속에 담겨 있다. 이웃은 어떠한가. 아이들이 뛰는 소리에 경고를 하고 싸움을 벌이는 현실은 물리적 공간의 한계가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문제다. 이런 자연스러운 일상속 예술행위의 현장은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대부분의 가정에서, 이웃에서, 우리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 감각을 깨우는 것이 우선이다.
예술과 거리가 먼 지역일수록 예술행위가 재미있다.
대림동(특히 대림2동)은 이주노동자 인구가 많다. 아침이면 직업소개소에 줄을 서있는 풍경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고, 큰 규모의 소매점은 없으나 중국인을 위한 식료품점이나 음식점이 많다. 마치 상해의 뒷골목 같기도 하고, 시끌벅적한 시장을 지날 때면 우리말로 된 간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9년째 살면서 서서히 익숙해 질 법도 한데 여전히 신기한 것 투성이다. 거리가 변하는 것도 그렇고 새로 상점이 오픈하면 다들 몰려들어 구경하는 것도 즐겁다. 사진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간혹 사람들에게 동네를 찍자는 제안을 하곤 한다. 그때 내가 찍는 동네는 너무 낯선 풍경이 많아서 스스로 놀라곤 했다. 심지어 중국인민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길에서 걸어다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런 특별한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예술적으로 보이진 않는 동네다. 시쳇말로 좀 없어보이거나 딱히 뭐가 없어 보였다. 지식인들이 모여서 문화적인척 하며 모여든 마을같지도 않고, 최신의 것이 소비되는 곳도 아니다. 흔한 별다방 콩다방이 없는 곳이다. 그래서 그저 그런 일상이 있겠거니 하고 살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동네의 모습이 하나 둘 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된 고급스런 다방이 있다. 고풍스런 의자에 장인이 만들었을 법한 고급 커피잔에 에스프레소를 파는 곳이었다. 장사가 잘되고 안되고를 떠나 그 다방의 존재자체가 눈에 들어왔다. 어울리지 않을 법한 곳에 근사한 커피숍이었다. 또한 극단의 연습실이 보였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아직 간판은 그대로 있다. 아마 이곳을 연습실 삼아 공연을 연습했을 곳이었다. 주택가 골목 안쪽 다세대주택의 지하공간이었다. 역시 그 간판의 존재만으로도 기분이 새로와졌다. 그야말로 없는 게 없었다. 삼청동에나 있을 흑백사진을 취급하고 있는 사진관, 명동이나 가로수길에 있을 법한 최고급 앰프와 오디오를 취급하는 가게, 홍대에서나 볼 수 있는 DIY 가구를 제작 공방, 이대앞에서나 만날 수 있는 수선집이나 맞춤 정장을 파는 곳도 있다. 수시로 생겼다 사라지는 각종 아틀리에들도 많았고, 관악기를 배울 수 있는 밴드연습실도 있었다. 대림동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동네가 이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작정하고 만들어진 인위적 커뮤니티인 아파트숲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이 지역사회고 그것이 동네다.
역시 생각해 봤으면 하는 것이 있다.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참 많이들 지도를 그린다. 문화지도를 그린걸 참 많이 봤다. 그 지도는 특정 시간에 특정 인물들과 특정 콘텐트를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이다. 그 지도는 얼마나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정보는 업데이트 되는가 생각해 봐야 한다. 문화와 예술이 담긴 지도는 정주성을 가진 지역민에 의해 구전되며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런 시도가 얼마나 있는가 말이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런 지도는 의미없는 것은 아니었을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
대림동에서 이런 문화적/예술적 생태를 감지하면서 동네친구들과 예술적으로(?) 작정하고 놀기 시작했다. 중국인 상점에 구경가고, 밤마실 나와 수다떨고, 새로 음식점이 오픈하면 동네사람의 의무감으로 팔아주러 가기도 했다. 도반생활을 하자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관심사에 근거해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고, 음식을 나눠먹으며 일상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예술행위는 자연스럽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거의 모두 매일 그림을 그리고, 향이 좋은 차를 나눠 마시며, 거의 매일 악기를 연주하고 공연했다. 사진을 찍고 함께 보며 하우스 콘서트를 열고, 사소한일을 거창하게 만들어 낄낄대며 문화가 공유되기 시작했다. 충분한 콘텐트가 만들어지자 담을 그릇이 필요해졌다. 그 그릇의 이름이 “야마도”다. 워낙 즉흥적으로 함부로 지은 이름이어서 의미따윈 없다. 대신 대림동을 서식지로 문화와 예술을 나누는 부족이 생겼는데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공간이 필요해진 것이다. 문화와 예술이 넘나들기 위해서는 하드웨어가 먼저일리가 없다. 그 필요를 절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가능한 것이 공간이다.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않기 때문에 문화예술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아하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돌파구를 스스로 찾게 되어 있다고 믿는다. 발표에서는 이 과정에 무엇이 개입했는지를 말로 전하려고 한다.
어제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 떠들다 ㅇㄹㅂㄹ캠프 얘기가 나왔다.
"우리 옆집엔 공작새가 살아"
"지구에 남기로 결정하다"
이렇게 두 시즌의 이름은 아직도 마음에 쏙 든다.
참 좋아하는 영상.
밀도 높고, 보도블럭 천지인 서울에서 이런거 보고 따라하지 않았으면.
부산과학관
(1) 창의성의 기본성질
인간은 누구나 창의와 창작의 욕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아동과 청소년은 창의 욕구를 흉내 또는 모방으로 시작합니다. 누군가로 부터 배운다는 것은 이미 그 방법을 따라 하는 행위의 시작입니다. 모방을 통해 방법을 찾아낸 이후가 본격적으로 자기의 방법을 찾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다른 축으로 설명하자면 가르치는 행위는 잘 모방하도록 설계하고 난 이후 스스로 자기 방법을 찾아낼 수 있도록 기다리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이는 최소한 창의력을 실험하는 집단에서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잘 가르치고 잘 배우면 창의력이 신장될 것인가에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사회는 언제부턴가 창의적인 인재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범한 사고와 행동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각종 교육과정안에는 창의력신장을 위한 커리큘럼이 생겨났습니다. 성공인가 실패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적인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면 그 보완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 핵심에는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창의환경입니다. 언어적 창의력을 가진 사람과 수학적 창의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단지 그것이 두드러져 보일 순 있지만 실제로는 통합되어 있습니다.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풀거나, 다양한 기술력을 응용하여 문명에 박차를 가하는 것 역시 창의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교육에서 그 환경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생산방식의 새로운 혁명을 이야기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창의성은 더욱 중요한 화두가 되었습니다. 테크놀로지와 과학은 삶의 양식을 바꾸게 되었지만 과연 교육이 전환의 시대에 걸맞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지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도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원리를 탐구하고, 실험을 반복하면서 지식과 노하우가 쌓여갑니다. 그런데 교육은 최종 결과를 흉내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현실입니다. 결국 양질의 교육콘텐트는 잘 흉내 내는 것이 최종 목표가 되어가는 겁니다. 창의성과 거리가 생긴것입니다.
도구와 재료에 대한 반응방식을 실험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아동/청소년은 현재 우리사회의 문화에서 가장 도구로 부터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세대입니다. 더구나 공교육과 사교육을 포함하여 창작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는 패키지로 쌓여진 재료만을 사용하여 실험이 통제됩니다. 즉, 도구와 재료를 충분히 탐색하는 과정이 거의 생략된 상태로 교사의 방식을 따라하고 끝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부산과학관의 파일럿 프로그램은 우선 도구와 재료에 대한 탐색은 어떤 형식에 담아야 가능할 것인지 실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창의환경에 구축을 위한 기초가 될 것입니다.
(2) 프로그램
소리는 진동_Piezo Microphone 사운드아티스트는 다양한 소리의 영역을 탐구합니다. 그렇게 예술이 되기도 하지만, 실험이 반복되면서 새로운 소재를 만나기도 합니다. 피에조마이크는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지만, 어떻게 응용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창작해 낼 수 있는 도구입니다. 여기서 도구는 마이크가 아닙니다. 피에조마이크로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매질(媒質)을 찾아내야 합니다. 매질은 너무도 다양한 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재료를 거의 가리지 않습니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것부터 창작품까지 아우릅니다. 이때 작업자(교사/강사)는 표현하고 있은 메시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고, 조합방식에 대해 함께 고민하면서 워크숍을 만들어 갑니다.
패턴과 반복_Image Phenomemon 프렉탈은 과학과 예술 모두가 탐구하는 영역입니다. 모든것은 패턴을 가지고 있으면 반복되고, 그것이 분산되지만 분산의 조합이 반복되는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망델브로 집합은 통계학 뿐 아니라 예술의 영역에서도 그 집합의 자기유사성질의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그 예술적 영감은 이미 일상속에서 다양한 패턴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다양한 재료의 관찰을 통해서 어떤 패턴을 가진 물질을 찾아내거나, 의도적으로 반복과 패턴의 상황을 조작해 내거나, 조합한 패턴에 움직임을 가했을 때 일어나는 미학적 가능성을 작품으로 담아내는 워크숍입니다.
(3) 도구와 재료
1) 철물점 철물점은 도구와 사람이 있는 물리적 공간입니다. 지금까지의 교육장면에서 도구와 재료는 철저히 통제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창의환경이라면 지금 사용하지 않지만 언젠가 쓰게 될 도구를 상상하는 것이 필요하거나, 같은 재료를 다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도구가 존재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철물점에는 철물점을 운영하는 작가(철물점사장님이라고 부릅니다)가 상주하면서 이 도구와 재료에 대해 상의하는 것이 가능해야 합니다. 도구/재료와 사람은 철물점의 기본 요소입니다.
2) 워크숍에서 주로 사용하게 될 도구와 재료의 예
나무, 종이, 플라스틱, 인두, 납, 초, 석탄, 숯, 쇠망치, 끌, 컴퓨터, 줄자, 끈, 드라이버, 구리, 저항, 수조, 물 등등. (워크숍의 세부계획에 따라 재료가 달라지거나 추가됩니다. 워크숍을 안내할 때도 주로 사용하게 될 재료에 대한 소개를 전면에 내세울 예정입니다. 최종 작업을 상상하기 보다, 도구와 재료에 어떤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가 이번 파일럿에 주요한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4) 작업자
사운드아티스트 / 정만영 / 부산 애니메이션작가 / 탁영환 / 전주
이런게 어린이 교육자료여야 하는거 아닌가 싶다.
현실을 배우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자기가 속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지할 수 없다.
이런 자료를 볼 수 없게 하는건 결국 자본의 논리였는데, 지금은 무슨 인권이 어쩌고까지 갖다 붙였다.
언제부턴가 경쟁은 분명히 미디어에서 아름답게 드러나곤 했다.
부추기는 수준이 아니라 미화되었다.
어느 광고에서는 1등만 기억하는 사회를 말하면서 2등의 능력을 간과하지 말자고 했다.
그러니까 더 1등이 부각되었다. 사람들은 "1등만 기억하는 나쁜 사회"라고 비아냥과 농담을 주고 받았을 뿐 전체를 바라보려는 노력은 없었다.
건강한 경쟁은...
때론 열등감이....
서로에게 자극을 주면서.....
이런 이야기 많이 들었다.
경쟁자가 있어야 한계를 극복한다는 말이었다.
난 잘 모르겠다. 우리가 극복해야 한다는 그 한계를 위해 경쟁하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오히려 돈과 명예를 위해서라고 해야 맞다.
높은 산에 오르고, 조금 더 높이 날고?
그런게 인간이 극복해야 할 일인가????
어떤 특정한 시기에 다다르면 인간의 상상력이 비슷해 진다.
필요가 자극한 발상이어서 그렇다.
그걸 굳이 경쟁이라고 해야할까.
교육 방법론에서 보는 Cause-Effect
짚으로 만들어진 공예품들은 농경문화에서 온 선물과 같은 예술이다. 먹고 살기 위한 벼농사는 짚더미를 만들어내고, 그 짚더미는 멍석을 만들어낸다. 멍석은 노동과 생산성의 부산물이지만 놀이와 결합하고 있으며, 대화의 장이기도 했다. 농경사회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발전한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장인의 예술과 놀이를 이해하게 된다. 통합방법론, 통합교육이 자주 언급 되지만 교육은 통합방법론을 선택하지 않은 적이 없다. 문화예술교육에서 장르를 뛰어넘고자 하는 시도는 때로는 지극히 관념적이어서 언어자체에 매몰되어 버리는 경우가 발견되곤 한다. 농경문화에서 짚풀이 예술이 될 경우를 생각해 보자. 부산물이 쌓여 여물 혹은 퇴비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가 또 다른 생산성이 생긴 경우다. 하지만 놀라운 예술적 발견이 가능했던 것은 인간의 탐미성이 "용도로써 그릇과 방석"이 아니라, "문화로써 식기와 돗자리"를 만들어낸 것. 결과물 그 자체에 그치지 않고 예측불가능한 어떤 요소가 결합하면서 문화와 예술의 삶으로 통합되는 경험과 결과를 만들어냈다.
practice : 예측가능한 결과란, (통제가능한 변수를 포함한)원인이 결과로 나타날 것을 추론하여 가설을 정교화시키는 과정.
일맥상통 - 경계에서 바라보기
전혀 다른 두 세계의 연관성을 찾는 연습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회가 세분화되고, 부분을 인식하며 살게 종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통합적 관점을 갖는 것이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연속성의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인과관계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다. 두루마리 휴지를 보며 나무를 연상하는 것은 단 하나의 힌트로 유추가 어렵지 않다. 재료를 상상하는 학습이 되어 있기 때문. 하지만 한단계만 이질적 경계만 넘어가면 통합적 사고를 불러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휴지와 물의 연관성은 쉽게 찾지 못한다.
practice : 팀별로 두개의 단어쌍을 가지고 닮은 점을 찾아냅니다. 신발-의자 / 카페-학교 / 도서관-운동장 / 거울-지팡이 / 컴퓨터-식탁 /
조금 다른 방식의 연관성을 찾는 건 가능할까? 메소돌로지의 연관성을 위한 사고의 연습이다. 뜨개질과 분식.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뜨개질은 실을 재료로 삼는다. 원래의 모양새와 완전히 다르게 가공되지만 실 자체로의 쓰임은 지극히 한정적 이다. 하지만 "뜨개질"이란 행위로 옷을 지을 수 있다. 분식은 곡식을 재료로 삼는다. 곡식을 분쇄하여 밀가루 쌀가루 등을 만든다. 마찬가지로 원래의 모양새와 완전히 다르게 가공되지만 가루 자체로의 쓰임은 지극히 한정적이다. 하지만 "반죽"이란 행위로 음식을 만들 수 있다. 프로세스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모든(진짜로 모든)배움/학습/가르침등의 연관성을 찾아보자. 이질적으로 인식되는 두 세계는 프로세스에서 닮은 점이 있듯, 이질적으로 분리되던 교육방법론 역시 원리와 가공의 프로세스에서 닮은 점을 발견해 낼 수 있다. 통합은 이 두 세계의 경계에서 바라보며 원리를 터득하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