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저 속에 내가 있다는것

Buscant 2020-12-02

문화공간과 문화환경_예술교육공간을 세팅하려는 사람들에게 보낸 레터

ARTICLE 2020-12-02

문화를 삶의 양식이라고 조작적 정의를 해 본다면 일상과 문화의 관찰을 통하여 사회적 관계 안에서 성장할 수 있게 돕는 것이 문화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문화적 행위를 포함한 문화활동이 문화시설을 근거로 발생한다고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모든 문화행위는 삶의 근거지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문화적 공간이 주어졌다고 해서 활발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예를 들어 학교문화를 상상해 보자. 학교에서 문화의 발생은 교실과 교실을 이어주는 복도이고, 하교길의 골목이며, 어른들의 간섭이 최소화된 자율적 공간에서 시작한다. 일상으로 그 연결고리가 된 삶의 연장선에 있지 않은 문화는 타자에 의한 조직 또는 조작에서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문화공간은 문화환경의 연장선에서 시작한다. 문화예술교육의 근거지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우선, 문화활동은 문화공간에서 일어나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이 필요하다. 문화공간이 충분하다면 급속하게 문화활동이 일어날까 라는 의문이다. “충분”이라고 하는 기준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문화적 환경과 문화공간은 연관성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문화예술회관, 문화원, 문화의집, 문화센터 등등. “문화”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는 문화공간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더구나 지역의 국공립도서관, 다양한 규모의 갤러러, 작은도서관, 평생교육센터, 예술창작센터등 여러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때 문화행위가 공간이 규정하는 것으로 출발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보아야 한다. 즉, 문화행위 기준이 되는 것이 공연을 보고, 예술콘텐트로 동아리를 만드는 것 등의 단순한 패턴이 우선 연상된다면 문화예술교육의 장을 협소하게 상상하는 것에 그치기 쉽다. 문화예술교육은 기존의 교육패러다임으로 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 왔다. 정책과 제도, 사업등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철학과 그 노력이 변질되어 보이기는 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문화예술교육매개자인 교사가 있고, 이미 생산해 둔 교육 콘텐트를 커리큘럼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 콘텐트를 소비할 학생이 있다면 가능할 것이라는 단순한 발상은 일단 제외해 두자. 모든 사람을 위한 예술이 모두에게 똑같은 내용과 형식의 문화/예술교육으로 일관성있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발상자체가 비문화적, 반예술적 행위이기 때문에 말하고 싶지 않은 테마다.

공연시설을 운영할 주체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일을 하는가에 따라 “문화공간”이 되는가 “대상을 만족시켜 실적을 만드는 공연시설”이 되는가로 구분된다. 문화가 형성되고 예술행위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곳은 요구에 의한 자생적 발생이고 문화예술교육은 스스로 재생산 구조를 끊임없이 생산해 낸다. 즉, 공간을 매개로 한다는 말은 그 자연스러움을 이해한 사람들로 부터 나오는 요구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지금의 문화예술교육이 발생하는 공간은 대부분 자연스럽다기 보다는 억지스러움에 더 가깝다. 더구나 지역문화가 담아낼 수 없는 (오히려 외면하는) 공간자체가 생겼다고 해서 새로운 문화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예는 지역에서 쉽게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지역에서 몇 몇 사람들이 의기투합하여 엄청난 예산규모를 끌어들여 문화시설을 지어 놓았으나, 적당한 콘텐트를 만나지 못해 정체성자체가 흔들리는 경우는 허다하다.

더구나 대량생산하려는 의지는 문화예술교육의 공간적 개념으로 부터 점점 멀어지게 한다. 공연 및 그와 관련한 시설을 만든다고 가정해본다. 대단위 공연장을 중심으로 하거나, 전시실을 만드는 것에 주력한다.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진 불특정 다수의 개인과 집단이 함께 공연장을 사용하려고 하면 그 인원수가 가장 중요하다. 물론 큰 공연장이 때론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자생적 문화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보통사람이 공연장에서 소비재로써의 예술콘텐트를 향유하면서 문화예술교육의 가능성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험재로써의 문화와 예술에 접근하면서 문화예술교육의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균형감 있는 문화예술교육 세팅의 태도다. 교육을 통한 자발적 공연 콘텐트가 생겨났을 때 대규모 시설에서 관객을 채우느라 급급해야 하는 이유는 없다. 더구나 소규모의 교육생집단이나 동아리들의 다종 장르를 모아 발표회 형식을 만들었을 때 그 맥락없는 나열밖에 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지 않은가. 문화시설이나 공연장, 예술활동이 가능한 시설을 만들 때 가급적인 소집단의 다종생산이 가능하도록 디자인 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그것이 문화예술교육공간 설계의 기본이다. 밴드연습실이 있다면 그 연습실을 무대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천명의 객석을 확보하는 공연장 하나를 만들려면 100-200명단위의 공연장 여러 개로 분할하는 것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적합하다. 예산이 항상 문제라고 말한다. 지금 현재 시민이 이용할 수 있는 공연장에 가보라. 초기 예산으로 각종 장비를 들여왔는데 전혀 사용하지 않아서 처분되는 장비들과, 보기에서 그럴싸 하게 포장하기 위해 준비된 것들이다. 사용자중심에 서서 공간이 확보되는 것에 주력하는 것이 우선이다.

듣기

JOB SOUND 2020-12-02

“듣는다”는 행위는 미로에 가깝다. 듣기가 어려운 이유는 모든 개인의 세계관에 타인의 삶이 연결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익숙한 단어의 나열이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어지는 그 순간은, 듣기의 미로에서 빠져나오면서 다른듯 닮은 모습으로 변해있다. 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귀를 열어만 두면 알아 듣는다고 착각하곤 한다. 듣는 행위는 결국 적극적인 태도와 다분히 기술을 요한다. 그래서 매우 능동적이지 않다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Vivien Roubaud

Buscant 2020-11-30

비비앙 후보의 멋진 작업. 간단한 조작으로 매 순간 달라지는 3D드로잉을 공중에 전시.

평상을 찾다.

ARTICLE 2020-11-30

의사소통은 타인의 생각이나 실천에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표현의 이유와 닮은 듯 차이가 있는 것도 변화를 요구하는 화자의 실천행위라는 측면이다. 의사표현은 욕구 또는 욕망을 담아내기 바쁜데 비해 소통은 타자와 교류하는 것을 말한다. 타인에게 단지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인간은 미디어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천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이해받기 위해 미디어가 진화했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 의사소통을 혁신적으로 전환시킨 몇 가지 (발견 또는 발명으로 습득하고 체화한)미디어를 나열해 본다면 몸-소리-음성언어-문자-인쇄-전파와 통신기술-컴퓨터-온라인 네트워크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한다. 물론 이 모든 미디어는 인간의 사용을 근거로 발견했거나 만들어졌다. 또한 이 모든 미디어가 우연이든 필연이든 의사소통을 돕는데 종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뉴미디어의 탄생을 마치 지금까지의 불통을 해소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굳이 아니라고 우길 이유는 없지만 생각해 봐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인구가 늘고 집단을 형성하고, 그 집단에서 문화를 만들어 가노라면 사용해야 하는 새로운 언어와 미디어가 늘어간다. 새로운 언어와 미디어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그로인해 또 새로운 언어와 그 언어를 싣고 나르는 미디어가 탄생한다. 다시 말해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절대시간을 단축하고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이유가 생기기에 뉴미디어가 생기는 사라지는 기간은 단축되고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당연해졌다. 이때 우리를 환기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미디어”그 자체의 개념이다. 모든 미디어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서 인간에게 다가간다. 때로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최고이자 최초의 미디어라고 말해야 한다. 건강한 미디어에는 건강한 인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버추얼...사이버...온라인...네트워크...이제는 이런 단어들도 트랜드에서 조금 벗어난 듯 느껴진다. 소셜미디어, SNS가 화두다. 마치 소셜네트워크를 모르거나, 사용자의 입장이 되지 않는 것이 사회적 도태를 말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곤 한다. 하긴 이 사회의 대부분의 정보가 신문과 TV를 넘어서서 웹으로 움직였고, 웹이 정보를 집적하는 공간에서 분화되는 공간으로 향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정보는 곧 생산력과 비례했다. 역사적으로 그랬다.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잘 듣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던 사회에서 생존을 위한 생산력을 얻는 경위를 따져보면 된다. 사냥하는 방법과 수렵, 이동, 집단생활의 모든 것을 선 경험자의 언어와 행동으로 동 시간에 경험해야 했다. 이를 위해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고 윗세대의 정보는 나의 생존과 직결되었다. 그렇게 쌓여온 것이 지식을 넘어선 지혜가 되는 과정이었다. 시간이 흘러 기억과 경험에 의존하던 정보가 기록되기 시작했다. 기록은 읽고 쓰는 능력을 요구했다. 자연스럽게 기록된 정보를 누가 갖는가에 따라 생산력이 달라졌다. 지식은 문자에 의존했고 사람들은 그 기록된 정보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경험과 지혜를 기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커뮤니티가 확장되고 보다 복잡한 사회를 구성하면서 효율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모든 감각을 열어두려고 노력하지 않고, 기록된 정보에만 매달렸다. 그것은 시각정보였다. 정보는 갖게 된 사람은 생산력을 얻게 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많은 인구가 기록된 정보를 얻고 싶어 했다. 놀랍게도 그렇게 쌓여진 정보들은 지식으로 쌓여갔다. 그 지식을 득한 사람들은 또 다른 정보를 가공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또 다른 생산력을 갖게 했다. 정보와 지식의 교류방식과 태도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방식과 같은 것이었다. 전기와 전파는 수신기를 가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사회는 이렇게 순환되고 있는 정보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태시키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스미디어가 창궐하던 시대에 대부분의 인구가 라디오와 TV를 그렇게 까지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구성원으로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는 미디어를 통한 정보유통 채널에서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이것 역시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생존과 직결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이런 미디어는 미디어문화를 형성하고, 단 한 번도 예술적 삶과 떨어져 있던 적은 없다. 인간감정을 묘사하려 했고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생존과 직결된 정보라지만 인간이기에 풍요로운 삶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문학적 상상력이 그러하며, 인간의 감각을 무뎌지지 않게 하려는 예술의 노력들이 그러하다. 미디어와 미디어문화의 본질은 다분히 인간답기를 지향했다. 최근 정보채널이 늘어나거나 접근성이 좋아졌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대안처럼 말하는 미디어들이 쏟아진다. 마치 개인의 접근권이 열려있으니 언제든 접속하여 “우리의 통계 안으로 진입하라”는 말처럼 들려서 불편해진다. 처리해야 할 정보가 늘어나면 그에 따른 정보해독에 따르는 집중력이 분산되는 것이 당연하기에, 한 개인이 균형을 찾는 일이란 쉽지 않다. 그 덕분에 다수의 의견이나 말 잘하는 논객의 화려한 언어유희에 속아 넘어가기 쉽다. 메일이 이동전화 문자메시지처럼 실시간으로 들어온다. 스마트폰이 실시간으로 우리 사회를 연결하고 중계해 준다. 편리함을 넘어선 처리할 정보의 양이 늘어났다는 것. 속도와 편의성을 무기로 찾아 온 통신의 혁신적 변화에 그리 좋아만 할 것일까를 생각해보자. 마치 새로운 정보를 남보다 빨리 얻게 되면 쿨하고 멋진 신세계에서 사는 것 같은 환상이 늘어난 것은 아닐까. 미디어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여 풍요로운 인간사회를 꿈꾸는 것이라면 지금의 미디어가 취하는 태도는 그에 반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마치 소셜미디어가 생산력을 높여 줄 것이라는 마케팅의 언어로 언제 어디서든 네트워크에 접속해서 노동하라는 행동지침으로 치환된다면 경계하자는 말이다. 지금 당장 하라는 요구가 늘어난다는 것을 행복에 겨워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곳에서 온라인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라는 광고카피는, 당신이 언제든 일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인간에겐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조절할 자율성도 가지고 있 다. (또는 가지고 있다고 믿거나 전제하고 싶다) 정보를 가진 자가 승자가 되는 사회에 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가. 서양인들은 예로부터 생각하는 모든 것은 표현 가능할 것이라는 억지스런 관념을 명제화 한듯하다. 대부분의 수사학과 언어학의 기초는 그렇게 완성되었다고 본다. 그냥 무시할 법도 한데 학자를 신봉하고, 학설을 떠받드는 사람의 수가 워낙 많으니 개인이 무시한다고 무시될 수 있는 건 분명 아니다 싶다. 몰라도 되거나, 몰라야 하는 정보가 나에게 와서 비효율성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그 스트레스의 정도를 안다. 가족이나 지인과의 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수가 혹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전화벨이나 문자메시지라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가. 스마트폰 사용자들이 트위터에 접속하고 세상을 구원할 듯 말하고 있지만,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과 대화가 방해받는다면 "의사소통을 위한 매체가 의사소통을 방해하는"꼴이다. 온라인에서 의사소통의 대안으로 포장된 소셜미디어는 교류와 소통이 사라진 정치와 특정인물의 욕망이 드러나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이른바 "social"이 지향하고 있는 신념과 확신이 빠진 것에 문제의식이 별로 생기지 않거나, 무리한 사회적 요구로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되면 사람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몰려들 것이 분명하다. 이보다 더 중요 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 집에서 나오면서 만나는 동네사람과 인사 나눌 여유는 있었는지? 친구의 현재 고민을 함께 나눌 시간을 내고 있는지? 문자메시지와 실시간 메일을 확인하면서 부모님과의 통화는 늘어나고 있는지?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망치와 못은 가구를 만들 때나 고칠 때 사용하는 도구다. 하지만 같은 도구를 쓰면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그것이 도구의 본질이다. 미디어가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이며 때로는 도구를 넘어선 문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 현재 모습을 한걸음 떨어져서 살펴보려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간혹 학부모(?)특강 강의를 끝내고나면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그 질문의 핵심은 “청소년이 된 우리아이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어려워요” “방문을 꼭 닫고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 저와 말하는 것이 싫은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럴 때면 나는 대답대신 먼저 확인하고 싶은 생각에 질문을 던진다. “혹시 거실에 소파는 TV를 향해 배치되어 있진 않은가요?” 많은 가정에서 온 가족이 모여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은 거실이다. 그런 거실에서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공간을 디자인 해놓고, 자녀와대화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숨 쉬는 것.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공간을 연출하는 것에는 너무도 인색하다. 물론 아이들이 성장에서 흔히 말하는 사춘기를 거치면서 자기세계가 생긴것에도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와 더불어 어떤 환경이나 조건이 없는 상황에서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다소 무모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들어줄 수 있는 구조와 들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닌데 말하는 것은 참 어려운 것이다. 우리 문화 안에서 집단의사소통이 일어나는 과정을 살펴보면, 수없이 반복되는 오류와 ‘사유방식의 소비적 반복’을 목격할 수 있다. 어제 회의에서 충분히 이야기하고 결론을 내렸건만 다시 만나서 확인하면 간혹 전혀 다른 결론을 말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같은 시-공간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 우리는 이런 오류가 생기는 것을 단순히 화자의 ‘말하기 방법’이나 ‘화술을 펼치는 태도’에서 그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상호작용이란 것이 의사소통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청자의 ‘듣는 방법’이나 ‘경청’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같은 말을 다르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내용을 어떻게 잘 전달하고 잘 전달 받을 수 있게 하는가 하는 구체적 내용에 대한 문제라는 것에 초점을 두어보자. 표현에는 구체적인 단어나 문장의 조합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태도와 적극적으로 듣는 행위가 포함된다. 능동적 경청자에게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은 “잘 전달하여 말걸기”보다 더 중요한 “스스로 말하게 하기”가 들어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즉, 의사소통의 환경이 문제라는 발상이 필요하다. 의사소통의 내용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여도 ‘의사소통의 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가능할리 없다. 소통이 시도되는 타이밍은 항상 어떤 환경에 놓여져 있는가와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문화가 평상이다. 근대 이후 교육이나 정보가 공공영역으로 급격히 팽창되어 가정과 지역사회의 기능이 분명히 약화되었다. 하지만 항상 마을입구에는 느티나무가 서 있다. 느티나무는 그저 한그루의 식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이 시작되는 진입에 대한 상징이다.

사람들은 느티나무 밑에서 마을로 들어가기전 잠시 쉰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시작을 알리는 곳이기에 몸이 그렇게 반응한다. 그곳에는 거의 평상이 있었다. 비를 피하기도 하고, 잠시 누굴 기다리기도 한다. 긴 시간을 걸음에 피곤한 다리를 쉴 수도 있다. 이것이 그 기능의 전부가 아니었다. 평상은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앉게 되는가에 따라 인원구성이 다양하다. 둘러앉거나 마주볼 수 있지만 등을 대고 사적인 공간으로 빠져나올 수도 있다. 그래서 평상에 앉은 사람들은 자연스럽다. 그렇게 평상에 앉으면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 현재, 우리에게 평상은 어디에 있는가.

어떤 공부

ARTICLE 2020-11-30

인문학 또는 인문학 학습은 어떤 특정 시기에 유행처럼 번지기도 한다. 학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이 어째서 유행인가 싶기도 할것이라고 생각 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사회에서 교양과 상식이 근사한 장식품으로 여겨지는 때가 있(었)다.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무크가 생산되고 소비되었던 시기를 생각해 보면, 수 많은 독자가 그 내용보다 형식에 더 끌렸던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디지털기반의 다양한 디바이스가 생겨나면서 형식은 더욱 내용을 압도했다. 그리고 정보는 겉잡을 수 없을 만큼 여러방향으로 교환되기도 하고 부유하기도 하면서 2000년대를 열었다. 2020년 현재 인문학과 인문학 학습은 “학습”자체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에 다다랐다. 그 배경에 오지선다의 답안지에 적혀 있지 않을 법한 책과 글은 청소년에게 더 이상 읽혀지지 않았고, 대학의 기능은 고용에 초점이 된 커리큘럼을 생산해 냈다. 독서는 통독의 경험을 강조하기 보다는, 과제를 위한 핵심정리 요약본과 누군가가 권한 챕터별 읽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어떻게 살것인가 또는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의 삶과 지향에 대한 근본적 물음은 그저 종교활동 정도로 대체되었다. 누군가는 이것이 위기라고 말하겠지만, 또 다른이는 자연스러운 변화이며 정보와 지식의 발전단계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수천년간 인류가 쌓아온 지식과 지혜의 깊이를 전달할 수 있는 매개는 여전히 고민거리여야 한다. 무엇을 매개하는가도 중요하지만, 매개자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은 사회적 과제다. 그렇다고 해서 공공사업이 그 기능을 수행해 낼 것이라는 기대는 그리 많지 않다. 여전히 매개자의 역할은 지식공급과 근사한 언어배달에 그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학습자체에 집중하는 매개자의 탄생은 지적욕망이 필요해지는 사회로 진입할 때 가능한건 아닐까? 그렇다면 최소한 한국사회는 예외다.

강제양해

JOB SOUND 2020-11-30

스마트폰이란게 아직 한국에 소개되기 전의 일이다.
둘이서 대화중이었는데, 텍스트 메시지에 답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끊기고 난 그냥 잠깐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또 답장이 오자 다시 메시지를 열어보고는 폰타를 열심히 두드린다.
대화가 또 끊겼다.
그러더니 "죄송해요.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이라고 말했다.
무슨 예의냐고 되물었을 때
"대화중에 문자보내고 있으면 안되는걸 안다구요"라고 말하고는 다시 메시지를 보낸다.
이게 무슨 소린가.
양해를 구하고 행동하는게 아니라 먼저 해놓고 강제양해를 당해야하는 상황이다.
예의가 아닌걸 안다고? 그럼 그 행동을 안해야 맞다. 그냥 미안하다고 해야 옳다.
그리고 자기가 예의없는 사람이란걸 알면된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는 예의바른 사람이지만,
지금 양해를 구하고 굿매너 문자질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발급한 면죄부를 들이밀었다.
소개팅 같은건 어색해서 싫어했었다.
차라리 생물학적 스펙과 커리어나 재력을 묻고 깔끔하게 결혼 전제로 만나자는 맞선이 편하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엔 참 가지가지 인간이 산다. 내가 도저히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인물도 많다.
오래된 친구 만나서 이런 저런 옛날 얘기를 나누다 보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2020년 내가 계절을 이렇게 말하더라

JOB SOUND 2020-11-29

겨울이 올때 "호빵이 나왔네"

여름이 끝날 때 "밤엔 긴팔 입어야해"

봄이 지나갈 무렵엔 "이제 낮이 제법 길어"

가을이 되면 "맑고 파란 하늘은 이제 못보는건가..."

올 가을은 미세먼지와 싸우느라 하늘 한번 제대로 못봤다네. (...다네?)

다리떨기를 허하라

ARTICLE 2020-11-28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교에서 설문을 돌렸다. "집에 혼자 있을 때 가장 하고 싶은 일은?"이라는 문항에서 의외의 응답을 본적이 있다. 정크푸드를 맘껏 먹거나 온라인게임등이 물론 나왔지만 의외의 답변이 있었다. “다리떨기”였다. 어렸을 때 다리를 떨어서 어른들에게 혼난 경험이 있다. 복 나간다며 못하게 했다. 지금은 다리를 떠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어른들에게 제지 당했기 때문에 고쳐진 건 아니다. 과한 움직임과 소리는 타인과의 교류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지가 생기면서 부터다. 각종 인간행동 연구보고서에는 집중력 향상이나 긴장완화의 효과가 있다고도 주장한다. 때로는 뭔가 기대되고 신나서 다리를 떠는 때도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 다리를 떨지 않는 건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신나는 일도 줄어들고, 호기심 자극하는 상황도 줄어든 건 아닐까 의심도 하게 된다. 그런데 다리떨기라고 답을 쓴 초등학생은 진짜 다리를 반드시(!) 꼭(!) 떨고 싶었던 걸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15세기를 가운데 두고 일어난 르네상스의 예술가 절대다수는 과학자였으며, 새로운 물질과 현상에 대한 탐닉 경향을 드러낸다. 다양한 물질의 조합과 현상의 관찰을 즐기는 "광maniac"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에 몰입하고 호기심으로 반복하는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에 문화와 문명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끝없이 시도하고, 실험하는 경험이 쌓여가는 동안 산업혁명이 다가오고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그들은 창의력으로 세계를 변화시켰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찾아가기 보다 생산된 도구와 물질을 소비하는데 익숙하다. 이때 창의력은 조합하는 능력처럼 여겨졌다.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하다 보니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능력과 기술의 전수가 아니라 가르침의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 시스템은 효율성을 기반으로 동작하다 보니, 시도나 도전이 가로막히는 경우가 생긴다. 다시 말해 대량생산 시스템의 환경에서 배움이 일어나게 되니 개인의 창의력은 한계에 부딪히고, "광maniac"이 등장하기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이때 창의력은 학습가능한 능력인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발상과 구현(또는 실현)능력이 통일되어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이른바 창의력이다. 이는 특정한 콘텐트나 커리큘럼에 의해 교육가능하다는 의견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효율이 떨어지고, 성과가 단번에 나오지 않으며,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즐거워서 흔쾌히 하는 탐닉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을 뒤흔들었다. GPS와 초소형칩셋, 무선인터넷환경과 IoT가 놀라운 속도로 대중화 되었다. 자본은 발빠르게 움직이며 판매방식과 유통망을 재편했다. 지금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의사소통하고 소비패턴의 변화를 주도한다. 이런 기술력의 기반에 결국 과학과 수학, 공학과 테크놀로지로 부터 새로운 발상과 행동이 유발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추론 가능한 요소들이다. 하지만 창의력으로 전환되는 티핑포인트를 만든 건 자발적으로 선택한 시간에 충분한 시도와 실험이 가능한 환경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교육상품을 판매하거나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서 창의력 교육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다수의 창의력 교육은 "창의력=생산성"이라는 프레임에서 훨씬 큰 생산을 위한 방법론으로 시작하는 것에 가깝다. 실제로는 자신이 속한 세계나 다양한 재료를 탐색하고, 스스로 선택한 문화적 행위자가 되었을 때 창의적인 발상과 행동으로 이어질 뿐이다. 제공한 창의력 훈련으로 창의적인 인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때 교육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장 문화적인 환경을 세팅하는 것과, 창의적 발상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서점에서 책을 펼치고 첫장을 읽는데 재밌는 사례가 하나 눈에 들어 왔다. 독창성에 대한 내용이다.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들의 업무특징을 조사했다. 여러가지 특이점으로 분류하여 근거를 찾아보는 방식. 인터넷 브라우져에서 실마리를 찾아낸 사례다. 인터넷 익스프로러와 사파리를 쓰는 사람들 보다, 파이어 폭스와 크롬을 쓰는 사람들이 꽤 높은 비율로 독창적 일처리를 해내고 만족도가 높다는 것이다. 컴퓨터를 구매 하면서 이미 설치된 브라우져에 적응하는 사람과 새로운 브라우져를 찾고 자기 방식을 찾아가는 사람의 차이에 대한 설명이다. 당연히 수동적인 것보다 능동적 대처가 독창성을 발휘한다. 하지만 읽는데 헛헛한 웃음이 함께 나왔다. 첫째는 이 책을 읽고 새로운 브라우져를 쓰면서 스스로 창의적인 행동을 했다고 착각하게 될 사람들이 떠올랐다. 둘째로 한국에선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아니면 아예 일을 할 수 없는 업무환경이 얼마나 많은가. 선택할 수 없는 봉쇄된 환경에서 독창성을 넘어서서 창의성을 강요받을 때 과연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에 대한 헛헛함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제약이 그득한 환경에서 선택과 자유로움으로 창의력을 발휘하라고 말하고 누군가에게 성과를 보고하는 일 말이다. 교육환경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창의환경이 있다면 창의력은 발생한다. 그 환경을 만드는 일은 창의력의 발생빈도를 높이는 것이지, 창의력 자체를 전달하는 것은 매우 희박한 확률일 수 밖엔 없다.

수년전 내셔널트러스트에서 선정한 12세가 되기전에 꼭 경험하길 권하는 리스트가 있었다. 나무타기, 큰 언덕에서 굴러 내리기, 야생 자연에서 야영하기, 나무 은신처나 동굴 같은 아지트 만들기, 물 수제비 뜨기, 빗속에서 뛰어다니기. 이 리스트를 보면서 반드시 꼭 해봐야 할 것이 아니더라도 위험하여 금지되거나, 그런 환경을 만나는 것은 특별한 이벤트가 되어 버린 우리사회의 아동/청소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런 경험이 결국 창의력을 만들텐데 말이다. 하물며 다리떨기를 눈치 보고 싶지 않다고 까지 말하면서 자기 선택을 외쳐야 한다면, 우리가 창의력과 창의교육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할 시점은 점점 늦어질 것이다.

산타는 없다.

JOB SOUND 2020-11-26

일단 결론. 산타는 없다.
그 유래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모두가 그렇게 부르는 그 할아범은 없다.
난 산타를 믿는 사회가 무섭다.
나쁜짓을 하면 선물을 안준다고? 선물을 받기 위해 착한일을 해야 한다는 사회.
코카콜라가 입혀 놓은 빨간 옷을 입고 필요와 무관한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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